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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치가 떨린다”는 기업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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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인이 12분 51초짜리 동영상을 보내왔다. 지난달 10일 국정감사 장면이다. 산업통상위원회에서 난데없는 고성이 오갔다.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인 게, 고함의 당사자가 증인으로 나온 기업인이었다. 한국 최초로 아울렛을 만든 ‘아울렛의 대부’, ‘구로공단의 전설’로 불리는 홍성열 마리오아울렛 회장. 그는 “한국산업단지공단에 할 말이 많다”고 했다.

낡은 규제에 묶여 15년 실랑이 #“이런 나라에서 무슨 기업이냐” #국감서 절규, 무반응에 더 낙담

“20년간 가산디지털단지(옛 구로공단)에서 사업을 하면서 국감에 네 번 (증인으로 채택됐고) 두 번 불려 나왔다. 동네북도 아니고 툭하면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하나. 공단이 아파트형 공장은 창고를 임대하면 안 된다고 해서 5층부터 12층까지 3000평을 1년째 비워두고 있다. 근 15년간 산업단지공단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걸핏하면 법을 어겼다며 계약 해지하겠다고 한다. (그 법이라는 게) 1960년대 처음 만든 국가산업단지법이다. (몇 개 업종 빼고 모두 안 되는) 그 법을 지금까지 즐기고 있다.”

영상 속 홍 회장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이런 나라에서 무슨 기업을 합니까. 저는 사업도 하기 싫습니다. 치가 떨립니다. 치가….”

그를 이달 초 찻집에서 만났다. 한 달이 지났지만 홍 회장은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했다.

“봉제·섬유 업체가 떠난 90년대 말 구로공단은 허허벌판이었다. 외환위기의 직격탄까지 겹쳤다. 대한민국 1호 공단이 죽어갔다. 진도·잔피엘·BYC가 공단 공장에서 만든 옷을 현장 판매하고 있었다. 공단 내 판매는 불법이었지만, 폐업 위기에 몰린 업체들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거기서 힌트를 얻었다. 패션·의류 아울렛으로 위기를 돌파해야겠다.”

그의 역발상은 성공했다. 2001년 마리오아울렛이 들어서면서 꺼졌던 공단에도 불이 켜졌다. 정부의 구조고도화 사업과 맞물려 구로공단은 첨단 IT산업단지로 재탄생하게 됐다. 그는 “죽어가던 공단을 살리고 소비를 살렸다고 자평한다”고 했다. 지금 가산디지털단지에는 1만여 개가 넘는 IT기업이 입주해있다. 마리오아울렛은 2004년 2관, 2013년 3관을 차례로 개관해 패션·의류의 명가로 자리 잡았다. 그 과정에서 피 말리는 ‘옛법’과의 싸움이 있었다. 화근은 제조업만 가능할 뿐 유통업체 입주를 금지한 국가산업단지법이었다. “심지어 내가 내 브랜드를 중국에서 만들어 내 건물에서 파는 데, 그것도 불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날 홍 회장의 진짜 울분은 따로 있었다. 규제와 노동의 목소리는 커지는 데 기업인은 호소할 곳도 없는 현실이다. 그는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언론엔 한 줄도 안 나더라”며 “기업인의 절규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나라가 됐다”고 했다.

산단 측도 할 말은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마리오아울렛을 양성화하고, 산업부 고시를 바꿔 유통과 판매를 허용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명이 징계를 받았다. 2013년 산업부의 K 과장은 르노삼성의 구로공단 입주를 승인했다가 감사원의 징계를 받기도 했다. 행정법원이 ‘적법하다’고 판결했지만, 감사원 징계는 철회되지 않았다. 오래된 법과 규제의 틀은 풀뿌리처럼 질기다. 산단의 어느 한 사람, 산업부의 어느 한 공무원의 소신으로 극복하기엔 한계가 크다.

산단은 대한민국 제조업 경쟁력의 산실이다. 제조업 생산의 70.3%, 수출의 73.9%, 고용의 48.5%(2018년 말 현재)를 차지한다. 그런 산단의 경쟁력이 낡은 시설과 규제, 새 정부의 정책 과욕과 맞물려 최근 2년 새 급속히 쪼그라들고 있다. 정부는 19일 뒤늦게 ‘국가산단 대개조 계획’을 내놨다. 주거·문화·복지·교통을 갖춘 공동체로 체질을 바꾸고 원칙은 허용, 일부만 금지하는 ‘네거티브 방식’도 도입한다. 만시지탄이지만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말로 그쳐서는 안 된다. 풀뿌리 규제의 관성부터 뿌리 뽑아야 한다. 현장의 유연성이 감사원의 징계로 이어지는 한 산단 대개조는 구두선에 그칠 것이다. 제2, 제3 홍성열의 외침도 이어질 것이다. “치가 떨립니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