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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진보는 실력으로 말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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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피터 다이아몬드 미국 MIT대 교수는 2010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석학이다. 하지만 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상원의원들의 반대로 연방준비제도 이사가 되지 못했다. 정치 대립의 희생양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반대 의원의 입장은 확고했다. 그가 통화정책 분야의 전문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일은 2000년 영국에도 있었다. 옥스퍼드대 거시경제학 교수가 금융통화위원으로 추천됐지만 선출위원회에선 그의 실력을 의심했다. 평범해 보이는 학문적 업적으론 중요한 직무를 맡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진보는 큰 정부, 높은 목표를 추구 #그러나 실력 없인 부작용 속출해 #문재인 정부 정책 우려스런 패턴 #이젠 돌이켜 실력 위주로 나가야

한국에선 어느 때부턴지 정책결정자의 자리가 한없이 가벼워졌다. 청문회는 실력보다 도덕성 검증, 정치적 난타의 전장이 돼 버렸다. 그럴수록 코드와 충성도가 중요해졌다. 확실하게 엄호해주는 세력을 얻음은 물론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해도 대통령이 임명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후보자 시절부터 충성하면 한 자리 얻을 수 있다는 도박이 이젠 대략의 법칙으로 자리 잡았다. 정책결정자가 된 후에도 분야를 꿰뚫는 실력보다 권력자의 생각을 읽어내는 독심술이 더 요긴하다. 이전 정부처럼 문재인 정부도 이 법칙에 예외는 아닌 듯하다.

실력 없는 진보는 능력 없는 보수보다 위험하다. 진보는 보수에 비해 더 큰 정부를 지향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문제에 개입하려 한다. 공동체가 도달해야 할 목표 수준도 높게 설정한다. 만약 진보가 이상만 나열한 채 실력 없는 팔로 온갖 문제를 헤집기 시작하면 사회는 뒤죽박죽된다. 경제는 병들고 나라는 분열된다.

문재인 정부 정책에는 세 가지 우려스러운 패턴이 보인다. 첫째, 문제를 일으키는 정책 자체를 바로 잡지 않고 재정으로 덮으려 한다. 소득주도성장이 대표적이다. 국민이 진보 정부에게 특별히 바라는 것은 양극화 해소와 불평등 완화일 것이다. 그런데 생존을 위협받는 이웃에게 돌아가야 할 재원이 일자리안정자금 등의 명목으로 오히려 소득이 더 높은 계층에게 지출되고 있다. 2019년 3분기에 소득 하위 0~20%에 속한 가구 1인의 명목 소득은 2년 전 동기와 대비해 거의 그대로였다. 반면 소득 하위 20~40%, 40~60%에 속한 가구의 1인 소득은 각각 7%, 9% 증가했다. 엉터리 성장론으로 경제 활력은 물론 분배도 잃었다.

둘째, 좌충우돌하며 외교·안보 리스크를 증폭시킨다. 한·일 간 역사 문제는 타 영역으로 확전하지 않고 외교로 풀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지소미아 종료를 결정함으로써 경제를 안보 문제로 확전시켰다. 또 남북 평화경제만 이루어지면 일본경제를 단숨에 따라잡을 수 있다고 둘러대면서 ‘외교·경제·안보·남북’을 패키지로 만들어 위험을 키웠다. 다행히 지난 주 지소미아 종료를 조건부 연기함으로써 한·일 문제가 한·미 갈등으로 증폭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미 관계는 내상을 입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여러 차례 유럽석탄철강공동체와 같은 아시아 공동체를 꿈꾼다고 했다. 유럽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 경제공동체를 만든 것처럼 북한을 포함한 동아시아도 경제공동체를 통해 전쟁과 갈등을 영구적으로 막겠다는 비전일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문제로 갈등하는 한·일 두 나라의 경제 통합도 이 비전의 일부가 돼야 하지 않을까. 제도와 가치가 균일한 한·일부터 시작해 아시아 공동체를 추구해 가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

셋째, 계속 풍선을 띄워 남북 관계에 근거 없는 희망을 주입시킨다. 전에 띄운 풍선이 터지면 즉시 다른 풍선을 날려 항상 국민의 시선이 허공에 머물게 한다. 정부는 싱가포르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대단한 결과가 나올 것처럼 기대를 부풀렸다. 스톡홀름 실무회담 때도 비슷했다. 그러나 성과가 없자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북한 참석이 가능할 수 있다며 또 풍선을 날렸다. 현실을 직시해야 할 정부가 희망 풍선만 날리니 국민이 오히려 정부의 판단력을 걱정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최근 국민과의 대화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전쟁 위험을 없애고 대화 국면을 만든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아직은 잠시 누리는 평화에 불과하다. 그것도 이번 정부만의 공은 아니다. 협상의 기회를 포착한 것은 이번 정부지만 협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도록 제재라는 구조를 만든 것은 지난 정부의 공로다. 그런데 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유엔안보리 제재를 열심히 만들고 집행했던 고위공무원 여러 사람이 오히려 물러났다.

자기희생을 마다 않는 보수와 탁월한 실력을 갖춘 진보가 건강한 경쟁을 벌일 때 나라는 발전한다. 반대로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보수가 큰 자선 및 자기희생으로 사회의 사각지대를 메우지 못할 때 사회는 분열된다. 진보가 큰 정부만 주장하고 그에 걸맞는 실력을 갖추지 못하면 나라는 망가진다. 지금 우리 진보 정부와 보수 정치는 과연 어떤 수준인가. 이대로 계속 가서는 안된다.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보여준 정책 패턴과 인선에서 돌아서야 한다. 돌이켜 진정한 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