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국토부는 오늘도 ‘김부선’만 바라본다

중앙일보

입력 2019.11.26 00:25

업데이트 2019.11.2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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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돌아온 겨울 난방비가 불안하다

2000여 세대가 사는 경기도 광명의 R아파트 단지. 지난 2018년 동대표로 뽑힌 박광규씨가 총무이사를 맡아 관리 내역을 살펴봤더니 관리비가 줄줄 새고 있었다. 소독업체는 하지도 않은 소독을 했다고 서류까지 위조했지만 아무 관리 감독 없이 돈이 나갔다.

2000여 세대가 사는 경기도 광명의 R아파트 단지. 지난 2018년 동대표로 뽑힌 박광규씨가 총무이사를 맡아 관리 내역을 살펴봤더니 관리비가 줄줄 새고 있었다. 소독업체는 하지도 않은 소독을 했다고 서류까지 위조했지만 아무 관리 감독 없이 돈이 나갔다.

한국산업기술시험원(KTL) 경영관리본부장을 지낸 박광규씨는 정년퇴임 후인 지난 2018년 4월 거주하고 있는 경기도 광명의 R아파트 동대표로 나섰다. “시설관리 전문가이니 아파트 관리업무를 살펴봐 달라”는 주변의 부탁에 “재능기부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2년 임기의 입주자대표회의에 발을 담갔다. 스스로 지옥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 20조 관리비, 정부는 “나 몰라라”
‘관리 카르텔’의 고질적 비리 만연
한 단지서 1억 부당 집행도 예사
여전히 난방비 0원 단지 수두룩

총무이사로 활동하며 감사와 손발을 맞춰 과거 2년 동안 부당 청구된 경비인건비 3200만 원을 환수하고, 위조 서류로 과다 청구된 소독 비용 300만 원을 압류하고, 시공사에 입주 5년 차 무렵 발생한 시설하자 비용을 청구하는 등 활동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1억 원에 가까운 비용을 절감해 그중 일부는 이미 주민에 돌려주기까지 했지만 돌아온 건 동대표 해임이라는 불명예와 속병뿐이었다. 대다수 주민들의 무관심 속에 아파트 관리를 둘러싼 전·현직 동대표들 간의 갈등으로 해임과 보복 해임이 이어지는 판에 박힌 ‘아파트 개싸움’ 스토리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공란으로 남겨진 회장 결제란.

공란으로 남겨진 회장 결제란.

비리 의혹에 누군가 투명한 아파트를 만들겠다고 나섰다가 아파트는 오히려 무법천지가 되고 주민 간 갈등만 심화하는 사례는 비단 R아파트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연일 벌어진다. 주민들은 “꾼들끼리의 다툼”으로 치부하지만 실은 내 주머니 털리는 걸 알면서도 눈을 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껏해야 1년에 몇만 원 되겠느냐”며 애써 못 본척하지만 전국을 합치면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서울과 경기 등 각 지자체가 앞다퉈 아파트 비리를 근절하겠다고 나서고, 국토부는 ‘공동주택 관리비리 신고센터’까지 설치한 이유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아파트는 지난 2014년 배우 김부선이 ‘난방열사’를 자처하며 관리비리를 폭로했던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 과장이 아니다.

적법한 절차를 거쳐 관리회사 등에 비용을 청구하려 했지만 회장이 거부했고, 그는 결국 해임됐다.

적법한 절차를 거쳐 관리회사 등에 비용을 청구하려 했지만 회장이 거부했고, 그는 결국 해임됐다.

국토부가 지난 4월 중앙·지역난방식 전국 222만 세대를 골라 난방비를 조사한 결과 열에 하나꼴인 19만4222세대가 지난 겨울 난방비를 단 한 푼도 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서울 양천구의 S아파트는 2256세대 중 절반을 훌쩍 넘는 1384세대의 난방비가 0원이었다. 수원 N아파트는 전체 64%, 고양 D단지도 45%가 난방비를 내지 않았다. 사유는 ▶실제 미사용 ▶계량기 고장 ▶원인 불명으로 다양하지만 상식적으로 관리가 제대로 됐다면 나올 수 없는 수치다. 다시 말해 누군가는 내가 쓴 내집 난방비려니 하고 냈던 관리비에 실은 옆집 난방비까지 얹어져 있었던 셈이다.

올겨울이라고 이런 일이 또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다. 아니, 올해도 벌어질 일이다. 실제로 경기도는 앞서 2016년에 관리비 부실이 의심되는 도내 556개 아파트 단지를 대상으로 일제점검을 실시한 결과 152억원이 부적정하게 사용된 걸 적발하기도 했다.

김부선

김부선

의무적으로 관리비를 공개해야 하는 공동주택(300세대 이상)이 1000만 세대, 한 해 내는 관리비는 무려 20조 원에 달하지만 이렇게 ‘관리비=눈먼 돈’ 공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적발도 어렵지만 적발돼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재발하는 게 아파트 관리비리다. 박씨가 “R아파트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아파트와 모든 주민들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근거다. 최근 부산의 한 아파트 관리소장이 관리비를 빼돌리고 공사업체로부터 수천만 원의 뇌물을 받은 죄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지만 만연한 아파트 관리비리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법처리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개 합법의 탈을 쓰고 있어서다.

박씨는 이 고질적 비리의 원인을 이렇게 정리했다. “시행령 한 줄 탓에 대한민국 아파트가 지옥 같은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가 말한 시행령은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제5조 2항이다. 주택관리업자의 선정 등은 경쟁입찰이 원칙이지만 전체 입주자 10분의 1 이상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입주자대표회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수의계약을 할 수 있다. 박씨는 “이 조항을 악용하는 사례가 너무 많다”며 “이 한 줄이 합법적 불법을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김용수 자유한국당 국토교통위 전문위원은 “오래도록 입주자대표회를 장악한 고착세력이 관리자와 카르텔을 형성하는 게 문제”라고 했다. 수의계약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입주민의 무관심에다, 동대표의 무신경과 무능 속에 관리소장이 업체를 자의적으로 평가하다 보니 업체 선정 과정 등에서 관리소장이 입주자대표회장과 담합하면 손쉽게 각종 이권을 챙길 여지가 크다는 게 핵심이다. 실제로 전·현직 입주자대표회장 사이의 다양한 소송전 배경에는 관리소장의 농간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박씨는 “수의계약으로 선정하지 말아야 할 업체를 고르면 관리는 부실해지고 관리비는 더 비싸질 수밖에 없다”며 “이런 직접적 피해에도 불구하고 문제제기를 하는 주민은 거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사정이 이러니 원천적으로 수의계약을 막도록 시행령을 삭제해 비리의 싹을 잘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아무리 경쟁입찰이라도 업체끼리 서로 돌아가면서 들러리 서는 방식의 묵시적 담합이 횡행하는 데다 시행령이 아니라 아예 공동주택관리법을 강화해도 입주자대표회의를 장악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합법적 비리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시행령 삭제가 답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2년 동안 송도의 한 아파트 동대표로 일하면서 한 달에 100만 원이나 하던 관리비 폭탄을 40만 원으로 줄인 경험을 담아 『아파트 관리비의 비밀』을 쓴 내과 의사 김윤형 원장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 역시 문제의 핵심에 관리회사가 있다는 데는 동의한다. 다만 그는 경쟁입찰이냐 수의계약이냐 하는 계약방식보다 아파트가 처음 지어졌을 때 시공사가 임의로 관리회사를 선정하는 게 아파트 비리와 갈등의 출발점으로 본다.

시공사가 주민 동의 없이 일단 관리회사를 결정하다 보니 관리회사로선 짧은 기간 많이 벌어서 나가겠다는 ‘먹튀’의 유혹이 크고, 주민들로선 잘못 꿴 첫 단추를 바로잡느라 불필요한 잡음에 시달리는 게 현실이다. 통상 첫 관리회사와 계약을 해지하고 재선정하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 관리회사를 지지하는 주민과 새 관리회사를 원하는 주민 간에 갈등이 유발되는 탓이다.

특히 이권과 직접 관련된 사람일수록 생업같이 열심히 활동하기에 결국 이권을 취하는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아 비리의 온상이 되기 일쑤다. 싸구려 장비를 수천만 원에 구입하고 이런저런 수당으로 아파트 돈을 가져가도 절차만 적법하면 불법이 아니라 마땅한 제재 방안이 없다. 지자체에 신고해도 콕 집어 이권이 오간 증거가 없으니 관여할 수 없다는 답만 반복한다. 지자체에 감사 기능이 있다지만 입주민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히다 보니 분쟁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관리비 비리를 알리려다 전과 5범에 금전적 어려움까지 겪었다며 눈물을 쏟은 김부선의 호소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김부선 같은 ‘난방열사’ 없이는 비리가 드러나기 쉽지 않고, 심지어 비리가 드러나도 비리를 저지른 사람보다 폭로한 사람이 더 고통받기 쉽다. 이권을 바라보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 오래 버티는 사람이 대부분 이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 원장은 “법에 얽매이면 오히려 갈등이 커진다”고 말한다. 법이 까다로워질수록 이권을 노리는 사람들이 무기로 활용할 우려가 크다는 얘기다. 그는 “동대표를 하며 투명하게 모든 과정을 공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놓았으니 내가 관두더라도 시스템 안에서 제대로 돌아가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었다”며 “결국 법이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고 했다. 또 “국민 돈 20조원이 굴러가는데 아무 해법없이 방치된 느낌”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국토부 이유리 주택건설관리과장은 “여러 해법을 고민하는 중”이라고만 밝혔다.

안혜리 논설위원

모비온

Innovation 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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