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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호랑이 등에 탄 국내 VR 투자

중앙일보

입력

한 달 여 남은 2019년은 미래 미디어 기술의 총아로 꼽혀온 가상현실(VR)의 역사에 매우 흥미로운 해로 기록될 것이다. 헤드셋 속에서 환상의 세계를 펼쳐주는 VR은 2014년 페이스북의 오큘러스VR 인수를 시발로 2016년 전 세계 IT업계를 뜨겁게 달궜다가 2017년 추락했다. 이후에도 VR은 계속 ‘차세대 기대주’로 지목되었지만 눈에 띄게 떠오르지는 못했다.

그런데, VR이 2019년 유독 한국에서 새롭게 날개를 달고 힘찬 날개짓을 했다. 5세대(5G) 이동통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국내 통신3사가 VR을 5G의 킬러 콘텐츠(폭발적 보급을 이끄는 핵심 콘텐츠)로 만들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때문이다. 통신3사는 5G 시장의 승패를 가르는 열쇠가 콘텐츠라고 보고 각기 VR·AR(증강현실) 콘텐츠의 독점 제공에 전력을 기울였다. 올해 통신3사가 내 보인 VR 관련 기술과 콘텐츠는 짧은 시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양과 질에서 눈을 휘둥그레 할 정도이다.

SKT는 최근 가상공간에서 자신의 분신 역할을 하는 아바타를 꾸미고 다른 아바타들과 만나 함께 노는 이른바 ‘소셜 VR’ 서비스를 출시했다. 페이스북과도 손을 잡고 내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할 계획이라고 한다. KT는 VR 헤드셋에 스마트폰을 끼우지 않고 초고화질(4K) 영상을 제공하는 무선 헤드셋 상품 ‘슈퍼 VR tv’ 를 내놓고 VR 플랫폼 사업자로서의 야심을 분명히 밝혔다. LGU+는 스마트폰으로 고사양 게임을 즐기는 클라우드 게임을 출시했고, VR· AR 등 5G 콘텐츠에 향후 5년간 2조60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모두 세계 시장에서 처음은 아니나 선두로 내놓은 기술이고 혁신 서비스로 평가받고 있다. 국내 통신3사의 VR·AR에 대한 투자는 마치 달리는 호랑이의 등에 탄 기세(기호지세·騎虎之勢) 같다.

특히, 이러한 움직임은 한국에 이어 5G를 상용화한 미국이나 통신 선진국인 유럽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전 세계 VR 업계가 모바일 VR의 화려한 개화를 위해 기대했던 구글의 VR 통합 플랫폼 데이드림이 지난 10월 문을 닫았고, 페이스북이 VR영화 제작을 위해 설립한 오큘러스 스토리 스튜디오는 2017년 폐쇄되었다. 2018년 오큘러스의 대표적인 VR 헤드셋인 오큘러스 리프트의 출하량은 35만4천대에 그쳐 같은 기간 소니 플레이 스테이션 4 게임기의 1700만 대 판매와 대조를 보였다.

지난 7월에 발간된 미국 포춘 지의 VR에 대한 기획기사는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의 오큘러스VR 인수가 사업성에 대한 고민 없이 수십억 달러(인수가 23억 달러)를 쓴 것 같다”고 논평했다. 이 기사는 5G를 상용화한 미국의 버라이즌이 VR을 이용하여 대리점주의 강도 대응 교육훈련을 했다고 소개하면서 업무용(B2B) 시장의 성장성에 주목하라고 제안했다. VR 회의론자들은 VR이 2010년 대 반짝했다가 사라진 3D TV 유행과 비교하며 깎아내리고 있다고 이 기사는 밝혔다.

전 세계적으로 VR 수요가 부진했던 탓인지, 올해 초 까지도 유럽에서 나온 컨설팅 보고서들은 VR이 5G의 킬러 콘텐츠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VR은 게임이나 성인물 같은 틈새(니치)콘텐트이지 주류가 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외의 통신사들은 한국 통신사들이 VR·AR을 5G의 킬러 콘텐츠로 삼겠다는 전략을 주목하고 있다고 보고서들은 전했다.

국내 통신 3사 VR 실무자들도 국내에서 소비자용 VR 콘텐츠의 사용이 뜨지 않는 점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한 통신사의 임원은 11월초 국회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한류에 거품이 빠지고 유튜브가 플랫폼을 장악하면 VR 실감 콘텐츠 성장이 힘들 것”이라고 토로했다. 또 다른 통신사 임원은 자체 컨퍼런스에서 “VR 콘텐츠의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고 그래서 대작 제작이 불가능 하다”고 말했다.

근본적 문제는 아직까지 국내 5G 가입자들이 VR·AR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통계를 보면, 지난 9월 5G 전체 가입자 1인당 월 데이터 사용량(26.6 GB)이 4G 무제한 요금제 가입자의 월 데이터 사용량(24.3 GB)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VR 콘텐트 1시간 사용에 20 GB의 데이터가 소모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직 VR 콘텐츠 사용이 미미한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다. 통신3사가 VR·AR 유료 상품을 출시했지만 가입자 수를 발표하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통신 3사는 올해 5G 상용화를 하며 VR·AR 콘텐트를 내세우고 5G 폰에 역대급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400만이 넘는 가입자를 끌어들였다. 이들에게 앞으로 VR·AR 등 매력적인 콘텐트를 제공하지 않으면 가입자의 유지가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달리는 호랑이를 타고 가다가 도중에 내리면 잡혀 먹히고 만다. 호랑이와 함께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국내 통신3사의 VR·AR 투자가 다른 나라들이 못한 5G의 꽃을 피워 낼지, 무모하게도 너무 서두른 게 아니었는지는 내년이면 판명될 것이다. 통신사들은 VR·AR콘텐츠들이 사용자들에게 무엇인지 이해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영렬 서울예술대학교 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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