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엄마, 대학교는 이 아들이 보내 드릴게요"

중앙일보

입력

[더, 오래] 홍미옥의 폰으로 그린 세상(40)

'감출 수 없었네, 지울 수 없었네, 마음속 깊은 곳에 고이 접은 꿈'
흔한 유행가 가사였을까? 놀랍게도 저 노랫말은 어느 학교의 교가다. 무슨 무슨 산의 정기를 받고 나라의 초석이 되라는 흔한 내용의 교가가 아니다. 뒤늦게 배움의 길을 걷는 만학도들의 학교, 전북도립 여성 중고등학교의 교가 중 한 구절이었다.

감출 수 없고 숨길 수 없던 '배움으로의 여행'

스스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 떠난 만학도들의 빛나는 졸업식을 상상해 그려보았다. 갤럭시탭s3 아트레이지 사용. [그림 홍미옥]

스스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 떠난 만학도들의 빛나는 졸업식을 상상해 그려보았다. 갤럭시탭s3 아트레이지 사용. [그림 홍미옥]

우린 가끔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말 그대로 정말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물론 있다. 새로운 뭔가를 시작하는 인생여행도 있을 테고 말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디자인하고 만들어가는 여행을 떠난 이들, 그들이 여기 있다. 감출 수 없고 숨길 수 없던 '배움'이라는 아름다운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학생들의 나이는 평균 62.4세!
그들이 들려주는 당당하고 아름다운 인생여행은 어떤 일정표로 짜여 있을까? 얼마 전 그들의 배움터인 전북도립여성중고의 학습 발표회를 직접 보러 갈 기회가 생겼다. 해마다 열리는 이 행사는 축제처럼 열리고 있다. 강당엔 벌써 열기가 넘치고 있었고 입구엔 학습의 결과물들이 작품으로 변신하여 전시 중이었다. 진솔한 마음을 담은 그림편지와 프로화가 못지않은 수채화까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특히 졸업반 학생들의 자서전 쓰기는 단행본으로 만들어져 눈길을 끌었다.

전북 유일의 여성성인 여중고인 도립 여성중고등학교. 일반 학교와 똑같은 정규과정이다. [사진 홍미옥]

전북 유일의 여성성인 여중고인 도립 여성중고등학교. 일반 학교와 똑같은 정규과정이다. [사진 홍미옥]

매년 가을에 열리는 학습발표회는 30대부터 80대까지의 학생들이 한 마음이 되어 그동안 배운 특기를 선보이는 자리다. [사진 홍미옥]

매년 가을에 열리는 학습발표회는 30대부터 80대까지의 학생들이 한 마음이 되어 그동안 배운 특기를 선보이는 자리다. [사진 홍미옥]

이윽고 시작된 학습발표회, 황혼에 접어든 여학생들의 그림책 구연과 논어 성독, 시 낭송 등은 박수를 이끌어냈다. 청아한 오카리나합주, 신나는 줌바 댄스, 그리고 난타처럼 컵을 두드리며 연주하는 컵타 공연까지 어느 하나 정성이 들지 않은 게 없었다. 평균나이가 62.4세라고 하지만 30대 후반부터 80대까지의 학생들이다.

그들의 노력에 보답하듯 교사들의 단체 댄스까지 신나게 이어졌다. 특히 졸업을 앞둔 고3 학생들의 공연은 감동을 자아냈다. 아주 예전에 대히트했던 진추하의 ‘눈물의 졸업식(graduation tears)’을 원어와 우리말 가사로 불렀다. 학생들은 그 곡을 연습하면서 많이 울었다고 했다. 부르는 이도 듣는 이도 함께 찡했던 시간이었다. 뒤늦은 만학도의 시간이 어찌 즐겁기만 했겠는가! 좋고도 때론 부끄럽고 때론 힘들었을 시간을 생각하며 눈물로 부른 합창이 모두를 감동하게 하고도 남은 것이다.

자녀 앞세우고 입학원서 쓰러 오기도

글쓰기 수업의 결과물인 인생자서전, 저마다의 인생 여정이 빼곡하게 담겨있다. [사진 홍미옥]

글쓰기 수업의 결과물인 인생자서전, 저마다의 인생 여정이 빼곡하게 담겨있다. [사진 홍미옥]

때론 언니처럼 친구처럼 학생들과 함께 배움의 여행길을 걷는 이영희 교장선생님. [사진 홍미옥]

때론 언니처럼 친구처럼 학생들과 함께 배움의 여행길을 걷는 이영희 교장선생님. [사진 홍미옥]

늦게 피는 꽃이 더 향기롭다고 했던가? 하긴 가을 단풍도 끝자락이 더 깊고 아름다운 색감을 보여주지 않던가. 중·고를 합해 약 170여명의 늦깎이 학생들이 다니는 전북도립 여성중고등학교, 그들이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저마다의 사연도 다양했다. 일반 학교와 같은 교과과정을 거치지만 많은 면에서 다르기도 하다. 요즘엔 졸업식은 우는 건 고사하고 아쉬워하는 졸업생도 없는 게 현실이다. 하물며 입학식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여기 학생들은 시작부터 울음보가 터진다고들 한다. 괜히 두려운 마음에 출가한 자녀들을 앞세우고 입학원서 접수를 하러 가기도 하고 교무실 앞에서 망설이며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러니 합격발표를 앞두고 잠을 못 이루는 건 흔한 사례다. 나도 뒤늦게 여고 동창생이 생겼다고 행복해하는 중년 여고생의 사연에도 마음이 찡해졌다.

미처 하지 못한 숙제 걱정을 하며 등굣길을 나서는 어엿한 식당사장님이자 세상이 벌벌 떤다는 문제의(?) 중2 학생도 있다. 우스갯말로 우리는 중2병이 제일 무섭다고 하곤 한다. 가족도 학교도 사회까지 눈치를 봐야 하는 신종 바이러스라고 할까? 미안하지만 여기 학교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라는 말을 주저 없이 하는 그들에겐 중2병은 끼어들 틈조차 없다. 손주가 공부하다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눈이 침침하다는 핑계를 대곤 했다던 우리 귀여운 학생 어르신, 이젠 함께 문제도 풀고 가르쳐 주는 게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고 하셨다.

제일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뒤늦게 학교공부에 열심인 엄마를 보고 사십 줄의 아들이 했다는 말이다. “엄마! 공부 열심히 하세요. 대학교는 제가 보내 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요!” 상상만 해도 아름다운 모자간의 대화 아닌가!

음악 시간에 오카리나연주법을 배우는 등 특기 활동에도 열심인 전북도립 여성중고등학교 학생들. [사진 조은희]

음악 시간에 오카리나연주법을 배우는 등 특기 활동에도 열심인 전북도립 여성중고등학교 학생들. [사진 조은희]

실제로 만학도들의 배움터인 이 학교에는 늦은 나이임에도 대학에 진학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80이 넘어서 대학교 캠퍼스에 발을 내딛는 할머니 학생도 있다. 해마다 각종 자격증취득도 늘어나고 각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졸업생들도 많다.

흔히들 우리는 쉽게 말하곤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배움에 나이의 많고 적음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만 그걸 실천하고 시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란 거 또한 현실이다. 가슴속에 간직한 꿈을 펼치고 내 인생여행의 일정표를 만드는 일엔 용기가 필요하다. 때론 두렵고 망설여지고 숨고 싶었을지도 모를 황혼의 여학생 언니들! 뒤늦게 핀, 그래서 누구보다도 향기로운 꽃인 그들의 앞날에 무한박수를 보낸다.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