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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물건 말고 헌 물건 사라" 부추기는 패션 브랜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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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옷장 문을 열고 내가 가진 옷의 개수를 세어보자. 아마 수십 벌 정도를 세다가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그 중 번듯한 옷만 추려도 옷장 하나는 거뜬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더 문제는 옷이 늘어난 만큼 사용 빈도는 줄어든다는 점이다. 열 번 이상 입지 않은 옷만 추려도 꽤 많은 양이 나온다.

必환경라이프⑫ 중고 패션 시장, 주류로 떠오르나

소비자의 집에 잠자고 있는 패션을 깨워라. 전 세계 패션 업계가 재판매 시장(resale market)을 주목하는 이유다. '세컨드핸드'(second-hand), 즉 중고 의류 판매가 미래 패션 시장의 주류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이어지고 있다.

너무 많은 옷을 소유하고 있는 현대인들. 입지 않은 옷을 순환시킨다는 측면에서 중고 패션 시장이 지속 가능한 패션 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 Lauren Fleischmann on Unsplash]

너무 많은 옷을 소유하고 있는 현대인들. 입지 않은 옷을 순환시킨다는 측면에서 중고 패션 시장이 지속 가능한 패션 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 Lauren Fleischmann on Unsplash]

미국의 대표적인 중고 패션 플랫폼이자 패션 스타트업 ‘더 리얼리얼(The RealReal)’이 지난 6월 ‘나스닥’에 상장해 화제가 됐다. 2011년 만들어진 회사로 럭셔리 패션 제품을 회원 간 중고로 거래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다. 현재 이 플랫폼에는 800만 명의 회원이 자신의 제품을 사고‧팔고 있다. 더 리얼리얼은 나스닥에 상장하자마자 주가가 40% 급등했다. 시가총액이 23억2000만 달러(약 2조6000억원)에 달했다.

고가 브랜드 중고 판매 앱 '더리얼리얼'은 고가 브랜드들이 그동안 외면했던 중고 시장에 진입, 성공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사진 더리얼리얼 인스타그램]

고가 브랜드 중고 판매 앱 '더리얼리얼'은 고가 브랜드들이 그동안 외면했던 중고 시장에 진입, 성공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사진 더리얼리얼 인스타그램]

미국 온라인 중고 의류 유통 업체 ‘스레드업(ThredUp)’이 발표한 ‘2019 리세일 리포트(resale report‧재판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3년간 미국에서 재판매 시장이 다른 패션 소매점보다 21배 빠르게 성장했다. 현재 240억 달러(약 28조3000억원) 규모로 2023년까지 510억 달러(약 60조)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 환경 의식이 높은 소비자들이 더 많은 중고 제품을 사려고 할 것이며 향후 10년 이내에 중고 패션 시장 규모가 패스트패션 시장 규모의 1.5배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패스트패션(fast fashion)은 최신 트렌드를 즉각 반영해 빠르게 제작하고 빠르게 유통하는 의류를 말한다. H&M, 자라, 유니클로 등이 대표적이다. 보고서에서는 현재 패션 시장 트렌드도 엿볼 수 있었다. 소비자의 72%가 친환경 브랜드를 선호하며 60%는 재활용 프로그램이 있는 브랜드에 대해 충성도가 높았다.

'더리얼리얼'은 지난 6월 미국 나스닥에 상장, 첫 날에만 무려 40% 주가가 급등해 화제가 됐다. [사진 더리얼리얼 인스타그램]

'더리얼리얼'은 지난 6월 미국 나스닥에 상장, 첫 날에만 무려 40% 주가가 급등해 화제가 됐다. [사진 더리얼리얼 인스타그램]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는 지난 2011년 뉴욕타임스에 ‘우리 재킷을 사지 말라’는 광고를 내 화제가 됐다. 파타고니아가 자신들의 옷을 구매하지 말라는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 재킷을 하나 만들려면 목화 생산에 물 135ℓ가 소비된다. 이는 45명이 하루 3컵씩 마실 수 있는 양이다. 두 번째, 해당 재킷의 60%는 재활용 소재를 이용해 생산됐지만, 이 과정에서 20파운드의 탄소가 배출됐다. 이는 완제품 무게의 24배가 되는 양이다. 세 번째, 해당 재킷을 오래 입다가 버린다고 해도 완성품의 2/3만큼 쓰레기가 남는다. 옷을 만들 때마다 환경이 파괴되니 이 재킷이 정말 필요한지 생각해 달라는 얘기다. 그러면서 파타고니아는 2011년 가을부터 중고 거래 플랫폼 이베이(eBay)와 협약을 맺고 ‘파타고니아’를 검색하면 새 제품이 아닌 중고 제품이 전면에 배치되도록 했다. 새 옷이 아니라 헌 옷을 사자는 의미다. 이런 광고와 캠페인 덕분에 파타고니아는 마니아층을 넓혀가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미국 포춘지에 따르면 2011년 당시 뉴욕타임스 광고가 실린 이후 파타고니아 매출은 40% 급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꼭 필요치 않은 제품은 사지 말고, 되도록 새제품이 아닌 중고 제품을 사고, 구입했다면 오래도록 고쳐 입을 것을 소비자들에게 제안하는 '파타고니아'.

꼭 필요치 않은 제품은 사지 말고, 되도록 새제품이 아닌 중고 제품을 사고, 구입했다면 오래도록 고쳐 입을 것을 소비자들에게 제안하는 '파타고니아'.

중고 의류 판매 시장의 주 소비층은 밀레니얼 세대 혹은 Z세대를 주축으로 한 젊은 층이다. 물론 중고 의류 구매는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 좋은 제품을 소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경제적인 이유와 함께 이들의 소비 습관도 한몫했다.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의 특징은 의식 있는 소비, 환경을 고려한 소비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를 부추기는 기존 패션 산업은 환경을 오염시키는 가장 더러운 산업으로 지목돼왔다. 2050년이 되면 전 세계 탄소배출의 25%를 섬유 생산이 차지한다고 한다. 하지만 만약 중고 제품을 구매한다면 탄소 발자국이 82%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향후 10년 이내 중고 패션 시장 규모가 패스트 패션 시장 규모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 중앙포토]

향후 10년 이내 중고 패션 시장 규모가 패스트 패션 시장 규모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 중앙포토]

중고 패션 시장의 장밋빛 전망에 업계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스레드업’ 보고서에서는 패션 소매 기업 10개 중 9개 업체가 2020년까지 재판매 시장에 진입할 의사가 있다고 응답했다. 실제로 지난 4월 H&M그룹이 중고 의류와 빈티지 제품을 판매한다고 발표했다. 스웨덴의 신생 중고 판매 플랫폼 셀피(sellpy)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H&M 그룹 의류 브랜드 ‘앤아더스토리즈’ 온라인 사이트에 ‘프리-러브드(pre-loved 먼저 사랑받았던 제품)’ 섹션을 구축해 사업을 전개할 예정이다. 제품의 수명을 연장함으로서 환경적 영향을 줄이고 소비자들에게도 도움을 주겠다는 설명이다.

지난 4월 5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2019 체인지 메이커스 랩' 세미나에서 H&M이 지속가능 패션 비전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이날 H&M은 자사 브랜드 '앤아더스토리즈'에 중고 섹션을 신설한다고 알렸다. [사진 H&M]

지난 4월 5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2019 체인지 메이커스 랩' 세미나에서 H&M이 지속가능 패션 비전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이날 H&M은 자사 브랜드 '앤아더스토리즈'에 중고 섹션을 신설한다고 알렸다. [사진 H&M]

더 리얼리얼처럼 럭셔리 업계의 중고 시장 진출도 눈에 띈다. 그동안 브랜드 가치 하락, 위조품 문제 등으로 중고 시장을 외면했던 고가 브랜드도 차츰 중고 시장에 눈을 돌리고 있다. 고가 브랜드를 취급하는 온라인 패션 플랫폼 ‘파페치’는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라는 파일럿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소비자가 자신이 갖고 있던 디자이너 브랜드의 핸드백을 파페치에서 신상품 구매에 사용 가능한 크레딧으로 교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샤넬, 디올, 구찌 등을 포함한 27개 브랜드의 핸드백을 크레딧으로 교환할 수 있다.

온라인 패션 플랫폼 '파페치'도 중고 패션 시장에 뛰어들었다. 파페치의 중고 거래 프로그램 '세컨드 라이프.'

온라인 패션 플랫폼 '파페치'도 중고 패션 시장에 뛰어들었다. 파페치의 중고 거래 프로그램 '세컨드 라이프.'

미국 핸드백 브랜드 ‘마크 크로스’도 자체 재판매 플랫폼을 시작했다. 사용하지 않는 마크 크로스 핸드백을 매장에 가져가 인증하면 현금이나 매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크레딧을 받을 수 있다. 이 제품들은 회사 웹 사이트에 구축된 재판매 매장에서 판매된다.

'프라이탁'은 데이트 앱의 구동 원리에서 착안, 소비자들의 중고 가방을 서로 매칭해주는 온라인 플랫폼 '스와프'를 시작했다. [사진 프라이탁]

'프라이탁'은 데이트 앱의 구동 원리에서 착안, 소비자들의 중고 가방을 서로 매칭해주는 온라인 플랫폼 '스와프'를 시작했다. [사진 프라이탁]

소비자들 간 물물교환 방식으로 자사 제품의 수명을 늘리는 경우도 있다. 업사이클링 브랜드 ‘프라이탁’은 기존에 갖고 있던 가방을 새로운 가방으로 교환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 ‘S.W.A.P’을 선보였다. 프라이탁 가방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이용하는 앱으로 교환하고 싶은 가방 사진을 올린 후 다른 사용자들의 가방을 보며 마음에 드는 제품을 선택할 수 있다. 서로의 제품을 선택해 매칭이 성사되면 양도 협상을 통해 가방을 교환하는 구조다. 새로 사지 않고도 무료로 새로운 가방을 이용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제품의 수명주기를 늘린다는 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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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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