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전 우리는 미국에게 일본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 경고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미국은 진주만을 공격당했다. 오늘날 우리는 동일한 경고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일본을 이전보다 더 강력한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격앙된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비판과 경고와 동시에 미국에 대한 실망을 쏟아냈습니다. 1957년 6월 26일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 내용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기는 워싱턴과의 갈등으로 채워졌으며 심지어 6ㆍ25 전쟁 중엔 미국이 이승만 제거계획-‘플랜 에버레디(Plan Everready)’를 검토했다는 것을 지난 기사(‘‘이승만 제거작전’까지 세웠던 美…주한미군 탄생 비화’ 참조)에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갈등을 협상의 지렛대로 삼았던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 단독 북진’이라는 카드를 적절히 활용해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6ㆍ25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남한의 북진을 막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승만식 ’벼랑 끝 외교‘의 승리로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면서 이승만-아이젠하워의 갈등은 종식될 줄 알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1954년까지가 미국과의 갈등 국면의 1차전이라면 1955년부터는 2차전이 벌어집니다. 1차전에서 갈등의 매개체가 북한이었다면 2차전은 일본이었습니다.
※이후엔 문맥 편의상 이승만 대통령은 이승만,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로 줄여서 호칭하겠습니다.
흔들리는 북진정책과 새로운 카드
이승만의 북진정책은 대외적ㆍ대내적 측면이 모두 작용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과의 관계였습니다. 미국을 상대로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면서 약소국의 지도자로서는 보기 드문 자율성을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대내적으론 남북통일이라는 담론 속에서 국민적 합의와 동원을 유지해 지지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53년 휴전과 함께 ‘약발’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954년부터 흔들림의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이해 11월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으로 무리하게 3선 연임 철폐를 없애면서 ‘독재자’라는 이미지가 구축됐고 김영삼 의원 등 여당 소장파 등이 이를 비판하며 이탈했습니다. 야당에서는 통합 세력인 민주당이 등장해 강력한 견제가 시작됐습니다. 이어 1956년 치러진 정ㆍ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장면이 자유당 후보 이기붕을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됐고, ‘빨갱이’라고 비하했던 진보당의 조봉암이 대통령 후보로 30% 가까이 얻어내는 저력을 보였습니다.
1957년 10월엔 민주당이 전당대회를 열어 ‘유엔 감시 하의 남북 총선거’를 들고 나왔습니다. 지금 시각에서 보면 상상 가능한 공약이지만 ‘북진통일’이라는 어젠다로 리더십을 강고하게 다져왔던 이승만에겐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만큼 시대 분위기는 변하고 있었고, 이승만은 북진 정책을 대신할 카드가 필요했습니다.
“이승만은 끝까지 북진 주장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책의 무게중심을 북진에서 다른 것으로 조금씩 이동하기 시작했다. 외교정책은 물론 국내정치의 수단으로써 효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북진 대신에 반공과 반일(反日)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김일영 『이승만 정부에서의 외교정책과 국내정치-북진ㆍ반일정책과 국내 정치경제와의 연계성』)
변화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과 공산권의 위협이 커지고 중국과 한반도 북부까지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이 일본을 부흥을 지원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당인 미국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막대한 예산이 투입될 수밖에 없는 국제문제 개입을 꺼리고 고립주의를 선호했습니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국제 문제를 외면하기보다는 적절한 개입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그러면서도 6ㆍ25 전쟁을 휴전시킨 것처럼 미국 내 막대한 국력이 소모되는 방식에는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타협의 결과가 이른바 ‘뉴룩(New Look)’ 전략입니다. 비용은 줄이면서도 대외 영향력은 지속하는 방식입니다.
①해외기지(직접 주둔) 축소 ②재래식 전력의 유지비는 동맹국이 부담 ③동맹국 간 군사동맹(지역적 집단안보체제)의 구축 ④미국은 비용 편익 면에서 효과적인 핵무기와 해ㆍ공군 강화 등입니다.
이런 전략에 따라 한국과 일본의 국교 재개는 물론 적극적인 동맹 관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또한 한정된 예산으로 지원해야 하는 만큼 동맹국의 향후 진로도 특화해야 했습니다. 그런 기준에서 ‘일본=경제개발, 한국=군사 강화’라는 등식이 도출됐습니다. 즉 일본의 경제를 부흥시키고, 한국은 군사력을 강화해 일본의 돈으로 한국의 군사력을 지탱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습니다. 그래야 미국의 ‘돈’을 절약할 수 있었으니까요.
미국은 한국에 연평균 2억 달러가 넘는 원조를 제공했는데, 미국은 점차 한국 정부가 이 돈으로 일본 물자를 사들이도록 압박했습니다. 미국 정부가 ‘달러의 이중적 움직임’이라고 표현했던 방식인데, 결국 동일한 액수를 사용해서 한ㆍ일 양국을 동시에 부양한다는 것이죠.
이승만의 반발, "미국과 싸우게 될 수도 있다."
6·25 전쟁이 끝나자 이 문제를 두고 이승만과 아이젠하워의 갈등이 본격화됩니다.
일단 이런 미국의 구상은 이승만의 구상과는 달랐습니다. 이승만은 한국이 동아시아에서 정치ㆍ경제적으로 패전국인 일본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신은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대우받기를 원했습니다.
연구자들은 미국이 생각하는 이승만의 역할과 이승만 자신이 생각하는 역할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다고 봅니다.
또 뉴룩정책은 한국보다 일본이 더 수혜를 입는 구조였습니다. 한국이 미국에서 받은 돈으로 일본 제품을 사들이면 일본의 공업화와 경제는 발전하겠지만 한국의 경제부흥은 느려지고, 일본 경제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으니까요. 그래서 일본 물자를 구매하는 것이나 일본과의 국교 개선 등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는 기회가 날 때마다 주변에 이에 대한 불만을 꽤 강도 높게 토로했습니다.
“나는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씨에게 미국이 일본과의 협조를 강요하여 일본의 주도 아래 놓인다고 믿게 되면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은 미국에게 등을 돌리고 공산주의자와 협력해 미국과 싸우게 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1957년 12월 20일 이승만이 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에게 보낸 편지)
'반일주의자' 이승만
‘친미주의자’ 못지않게 ‘친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이승만이지만 사실 그의 일생 대부분은 일본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 활동했던 이승만은 1930년대부터 일본에 대한 미국의 각성을 촉구했는데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우호적이던 당시엔 누구도 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1941년 7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을 경고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냈는데, 5개월 뒤 일본의 진주만 습격이 벌어지면서 비로소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후 이승만은 미국 조야에서 ‘일본을 잘 아는 인사’로서 대우를 받게 됐고 이는 훗날 그가 해방 정국에서 주요 지도자로 활약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 대한 경계와 거부감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954년 월드컵 진출을 놓고 한·일전이 벌어질 때도 이승만 대통령을 시합을 막았습니다. 그때 이유형 감독과 선수들이 “일본에 지면 현해탄(대한해협)에 빠지겠다”며 각서를 쓰고 겨우 출전한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승만은 한ㆍ일 국교 정상화 이전에 상호 불가침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요구하는가 하면, 장개석 총통에게는 일본을 축으로 하는 미국 측 동아시아 구상 대신 한국과 대만이 주축이 되는 지역방위동맹을 구축하자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이승만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원한 것도 북한뿐 아니라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때마침 1958년 일본에서 시작된 만경봉호 북송 사업은 반일 정책의 좋은 명분이 됐습니다. 북한과의 체제경쟁 중이던 한국 측엔 타격이었던 것이죠. 당시 일본의 총리는 기시 노부스케, 아베 총리의 외조부입니다. 이승만은 미국에 보란 듯이 대대적인 반일 군중시위를 조직하며 위력을 과시했습니다.
이승만의 실패와 좌절
이런 이승만의 반일 기조는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에 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미국의 한 관료는 한ㆍ일 관계개선 및 뉴룩 전략은 “이승만이 현장에서 사라진 후에야(only after Rhee's departure from the scene) 해결될 수 있는 주요한 정치적 문제”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야당의 성장, 동맹과의 갈등, 미진한 경제발전 등이 1950년대 후반 이승만 정부를 옥죄어왔습니다. 이럴수록 이승만 정부는 정권 유지에 급급한 강경파가 득세했고, '사사오입' 개헌, 조봉암 사형, 경향신문 폐간 등 각종 무리수를 두면서 스스로 좌초하기 시작합니다.
이승만에게 실망한 미국은 한국에 대한 원조를 대폭 삭감했고, 이는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을 안겼습니다. 미국은 한국의 경제악화가 일본과의 관계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기대했지만 이승만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파국은 결국 1960년 3ㆍ15 부정선거와 4ㆍ19 혁명을 통해 종결됩니다.
한 연구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국내 정치에서 터져 나온 터무니없는 부정선거와 그에 대한 한국민의 분노는 미국에 이승만이라는 부담을 덜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950년대에 네 차례 입안되고 검토되었던 미국의 ‘비상한 조치(이승만 제거계획)’가 한국민의 분출에 편승하여 성공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이후 등장한 박정희 정부는 1965년 한ㆍ일 협정을 체결하면서 미국과의 긴 줄다리기를 끝냈습니다. 한·일 협정 체결로 미국을 안심시킨 박정희 정부는 정치적 공간을 넓혔고, 산업 육성에 매진합니다. 이승만의 예상과 달리, 한·일 협정과 청구권자금은 한국 경제 도약의 발판이 됐습니다. 한ㆍ일 분업 체계 속에 일부 품목에선 일본 기업이 우리 대기업의 하청업체기도 합니다. 이승만 패러독스입니다.
이는 당초 미국의 구상과는 달랐지만 박정희 정부는 한·일 협정과 월남전 파병 등으로 주변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미국의 견제와 압박을 적절히 풀어나가는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고비 때마다 외교적 혜안과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던 이승만이 이런 유연성을 보이지 못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반일'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던 노정객이 넘을 수 없었던 '벽'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2일 문재인 정부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을 조건부 연장하기로 하자 미국 국무부는 즉각적으로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소미아 폐기’라는 카드를 꺼냈을 때, 전문가들이 이에 우려했던 것은 지소미아가 한ㆍ일 간의 문제가 아니라 그 너머에 한ㆍ미의 문제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소미아 종료를 이틀 앞두고 미국 상원은 지소미아 폐기 중단 촉구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고, 미국에선 고위 인사들이 잇달아 한국을 방문해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정부는 지소미아를 통해 일본의 수출 제한 조치를 풀 기회를 마련했다고 자평합니다. 청와대엔 “성과”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청와대와 정부 밖에선 냉소적입니다. 지소미아 카드까지 쓸 필요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현 집권세력이 이참에 지소미아가 단순히 한ㆍ일 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과 외교적 결정을 내릴 때는 복잡한 국제정세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맞물려 판단해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됐다면 다행입니다. 과거 한ㆍ일 협정이 그랬듯이 말이죠.
주변 강국의 외교 정책과 국제 정세의 흐름을 활용하는 것은 신라-고려-조선을 거치며 한반도의 지도자가 터득해야 할 지혜였습니다.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국가”는 국제 관계에서 ‘누구도’ 이룰 수 없는 꿈입니다. 심지어 미국과 중국도 이로부터 자유롭진 못합니다. 과거 조선에서 이런 의지로 외교를 풀었다가 화를 입은 것이 병자호란입니다.
역사는 분노를 자극하고 분풀이를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중요한 갈림길에서 과거에 저지른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차가운 이성을 찾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김일영 『이승만 정부에서의 외교정책과 국내정치-북진·반일정책과 국내 정치경제와의 연계성』, 홍석률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과 냉전외교정책』, 신욱희 『이승만의 역할 인식과 1950년대 후반의 한미관계』를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