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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갈 테면 가라”…결기는 좋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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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유럽이 벼랑 끝에 섰다.” 유럽의 안보 위기를 묘사하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표현에서 절박함이 배어난다. 마크롱은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신호와의 인터뷰에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는 ‘뇌사(腦死)’ 상태에 빠졌다”고 진단하고, “우리 스스로 각성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갈수록 권위주의적이고 거칠게 변해가는 이 세상에서 유럽은 지정학적 존재감을 잃고, 자기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익 우선 고립주의는 미국의 대세 #마크롱은 벌써 나토 이후 안보 고민 #과거 얽매인 편협한 대일외교 탈피 #미국발 안보 공백에 공동 대비해야

나토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유럽 안보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한 회원국에 대한 공격은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나토 헌장 제5조는 유럽에 대한 미국의 안보 공약을 상징한다. 나토를 통해 미국과 유럽은 소련의 위협에 맞서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냉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하지만 나토를 한물간 ‘낡은(obsolete) 동맹’으로 폄훼하는 도널드 트럼프가 등장한 이후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동맹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는 트럼프에게 나토는 미국의 방위비만 축내는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나토 헌장 제5조가 제대로 지켜질 것으로 보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마크롱의 대답은 “알 수 없다”였다.

설사 내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하더라도 ‘탈(脫) 동맹’으로 가는 미국의 발길을 되돌리긴 어려울 것으로 마크롱은 전망한다.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는 쪽으로 대외정책의 흐름이 바뀌면서 역사의 힘은 미국과 동맹국들을 점점 갈라놓는 쪽으로 작용할 거란 분석이다. 미국 우선주의와 고립주의 노선을 트럼프만의 돌출적이고, 예외적인 현상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긴 시야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재검토하고, 나토 이후에 대비한 자구책을 고민할 때라고 마크롱은 역설한다.

한국 전쟁 이후 한국은 한·미 동맹에 의지해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한반도 평화를 지키고, 경제발전과 번영을 추구할 수 있었다. 지금도 한·미 동맹은 한국 안보의 근간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동맹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기 시작하면서 한·미 동맹에 금이 가고 있다. 대북 정책을 둘러싼 입장 차이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연장 여부를 둘러싼 갈등도 있지만, 한·미 동맹이 당면한 최대 도전이자 불안 요인은 현재 진행 중인 내년도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다.

한국은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고 있지만, 엄연한 주권국가다. 그 어떤 한국 정부도 갑자기 분담금을 5배로 올리라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수는 없다. 정치적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더구나 내년 4월엔 총선이 있다. 트럼프가 제정신이라면 한국이 미국의 요구를 액면 그대로 받을 수 없다는 걸 모를 리 없다. 터무니없는 액수를 불러 기선을 제압한 뒤 양보하는 척하며 적당한 타협점을 찾는 트럼프식 협상술로 보이지만, 최근 미 국방장관부터 합참의장까지 모두 몰려와 노골적인 압박을 가하는 걸 보면 트럼프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솔직히 헷갈린다. 그렇다 보니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를 위한 명분 쌓기용 아니냐는 억측까지 나온다. 한국이 ‘거부할 수밖에 없는’ 카드를 던져 협상 결렬을 유도한 뒤 이를 핑계로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를 단행한다는 것이다.

마크롱은 미국이 빠진 공백을 유럽 스스로 어떻게 메울 것인가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을 촉구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첫 번째 대책은 당연히 자주국방이다. 유럽의 자체 방위력을 구축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둘째는 외교 전략이다. 미국과 중국이란 두 고릴라 사이에서 중재력을 발휘할 때 유럽의 영향력 확보가 가능하다고 보고, 그 첫 단추를 러시아와의 관계 재구축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제 서울에서 시작된 분담금 협상 3차 회의를 앞두고 여야 국회의원 47명이 성명을 발표했다. 주한미군은 한국의 이익을 위해서만 아니라 미국의 필요에 의해서도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한미군 철수 카드라는 ‘블러핑(공갈)’에 속지 말고, ‘갈 테면 가라’는 결연한 태도로 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결심한다고 트윗 한 방으로 주한미군 철수나 감축을 쉽게 할 수 있는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미국 우선주의와 고립주의로 가는 미국의 큰 흐름을 보면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긴 어렵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그쪽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 ‘갈 테면 가라’는 결기는 좋지만, 진짜 갈 경우에 대비한 방책도 필요하다. 마크롱의 지적대로 대책의 중심은 자주국방과 외교가 될 수밖에 없고, 그 초점은 북한의 핵 능력에 맞선 억지력 확보에 맞춰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와 똑같이 방위비 분담금 대폭 인상 압력을 받고 있는 일본과 공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핵무장을 하더라도 우리 혼자서 할 수는 없다. 되돌리기 힘든 현실이 된 북핵 위협을 내세워 일본과 동시에 핵무장을 추진할 때 그나마 국제사회에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미국발(發) 동북아 안보 공백에 대비하려면 과거사에 얽매인 편협한 대일 외교에서 탈피해야 한다. 지소미아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