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이 드넓게 펼쳐진 경기도 평택시 오성면 들녘 한쪽에 자리 잡은 미듬영농조합의 연 매출은 70억원이나 된다. 전국의 스타벅스 매장에 쌀로 만든 라이스 칩(쿠키)과 '옥고감'(옥수수·고구마·감자), 하루 견과 등을 납품해 연간 40억 매출을 올리고 있다.
[개도국 지위 포기 선언에도 '농촌 유토피아' 도전하는 젊은 농부들] #창의적인 아이디어 승부수 던져 #고급쌀 막걸리 시중 가격의 5배 #농업에 예술 더하면 가치 20배 #농촌·농업·농민 3농 변화 이끌어 #보조금에 의지하면 자생 어려워 #농어촌 특위,12월 농정 비전 발표
쌀값이 폭락한 2005년 전대경(49) 대표는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아버지와 주변 농민들을 참여시켜 영농법인을 만들었다. 쌀만 재배해서는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판단해 쌀과 과채류의 가공품 생산에 도전했다. 제품을 개발하고 판로를 고민하던 이 대표는 마침 스타벅스가 경기도와 업무협약을 맺고 우리 농산물로 만든 메뉴를 개발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2008년 10월부터 열번 정도 스타벅스 관계자를 찾아가 호소한 끝에 납품이 성사됐다. 2009년 2억5000만원이던 스타벅스 납품 규모는 올해 40억원으로 급증했다. 10년만에 16배 성장했다.
이 대표가 출시한 라이스 칩은 스타벅스 매장에서 연간 30만개가 팔릴 정도로 대박이 났다. 농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전 대표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제품 생산이 제일 중요하고 유통 경로 확보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9일 찾아간 평택시 포승읍의 밝은세상영농조합이 운영하는 양조장 옆에 감미로운 재즈 선율이 흘렀다. 법인 설립 10주년을 기념해 '낮에 시작하는 소호의 밤, 더 재즈 나이트'라는 이벤트 공연이었다. 2008년 아버지가 세운 영농조합에 6년 전에 합류한 이혜인(40) 대표의 마케팅 아이디어다. 호랑이 모양의 한반도에서 평택이 배꼽에 해당한다는데 착안해 '호랑이 배꼽 막걸리'를 빚고, 웃는 호랑이라는 뜻을 담은 프리미엄 증류 소주 'SOHO(笑虎)'를 생산하고 있다.
이 영농조합의 비밀 병기는 예술가 출신 4인 가족이다. 도예가 어머니(이인자·67)는 용기를 만들고, 화가 아버지(이계송·72)의 작품을 새기고, 의상디자인을 공부한 언니(이혜범·41)와 사진을 전공한 이 대표가 아이디어를 보탰다.
이 대표는 "쌀값 변동이 심해도 떡을 만들면 부가가치가 5배, 술을 빚으면 10배, 예술적 가치를 더하면 20배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이 영농조합의 호랑이 배꼽 생막걸리(750mL)는 6000원(일반 막걸리의 3~6배)이고, 알코올 56도짜리 프리미엄 증류 소주(500mL)는 20만원에 팔린다. 지난해 1억5000만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 3억원을 예상한다.
이 대표는 "중간 유통상을 통하는 손쉬운 판매 방법 대신 전통 주류에 대한 통신판매 규제 완화로 기회가 열린 SNS 마케팅에 승부를 걸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잘 먹힌다"며 "변심하기 쉬운 고객을 만들기보다는 우리와 계속 함께 길게 갈 팬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공을 들인다"고 말했다.
전대경 대표와 이혜인 대표는 농촌과 농업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도전해 착실히 뿌리 내리고 있는 3040세대 농부들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3농(농촌·농업·농민) 부문은 누적된 문제를 미처 풀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위기에 노출됐다. 문재인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기로 선언(10월 25일)한 데 따른 것이다.
정부는 "당장 피해는 없다"고 강변하지만, 농민 단체나 현장 농민들의 반응은 다르다. 농업 인구 감소로 농촌이 소멸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정부가 예고도 없이 개도국 지위 포기를 선언한 것은 통상 주권과 식량 주권을 내팽개친 행위라고 비판한다.
우울한 '농업인의 날'(11월 11일)을 보낸 농민들은 지난 13일 서울 여의도에서 '개도국 포기 규탄! 전국 농민 총궐기 대회'를 열었고, 오는 30일 여의도에서 '전국 농민대회'를 또 열 예정이다.
1993년 12월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타결 이후부터 최근까지 농민들이 투쟁하면 정부는 그동안 총 161조원 규모의 각종 지원 사업을 추진했다. 이번에도 유사한 패턴으로 가면 농촌은 정말 살기 좋은 곳으로 변신할 수 있을까. 농민도, 국민도, 정부 당국자도 회의적이다.
그래도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생명 산업이라는 농업을 포기할 수도, 마음의 고향인 농촌을 방치할 수도 없다. 한국의 3농이 처한 현실의 어려움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결국 사람이, 농민이, 국민이, 정부가 함께 움직여 뭔가 대안을 찾아야 한다.
충남 홍성군 장곡면에서 14일 만난 젊은협업농장 정민철(53) 대표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에서 12년간 교사로 일했다. 정 대표는 젊은이 5명을 농장에 받아 교육한 뒤 농민으로 독립시키는 일종의 '농민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 수원에서 귀농한 이원석(36)씨는 2년째 이곳에서 농사를 배우면서 월 100만원을 벌고 있다. 월 10만원에 빈집을 임대해 사는 그는 내년에 400평을 빌려 하우스 2개 동에 엽채류를 키울 꿈에 부풀어 있다.
정 대표는 "사람을 모아 농민으로 교육하고 농촌에 시장 기능이 작동하도록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농촌의 살길"이라며 "농민들과 함께 '장곡면 2030 발전 계획'을 만들기 위해 주민 공동학습회를 열 예정"이라고 소개했다.
지리산과 덕유산이 보이는 경남 함양군에 가보니 지역 특산물인 산삼(산양삼)의 판로를 개척하기 위한 노력이 치열했다. 서춘수 군수는 "2002년부터 '산삼=함양'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2003년에 산삼 축제를 열었고, 2005년 산삼 특구로 지정받았다"며 "2020년 9월에 산삼 엑스포를 개최하면 13개국에서 130만명이 몰려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서 군수는 "어렵게 유지해온 인구 4만 명 선이 무너졌고 면 단위에서 아이가 한 명만 태어나도 잔치를 한다"며 "산삼 엑스포와 전기버스 생산 공장(에디슨모터스) 등으로 '함양형 일자리'를 만들어 사람이 몰려드는 농촌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전문가들도 움직이고 있다. 3농과 직간접 관련이 있는 각계 전문가 50여명은 농촌경제연구원(원장 김홍상) 주최로 지난 15일 경남 함양군 지곡면 사무소에 모여 '포용사회를 향한 농산촌 유토피아 실천 구상 현장 워크숍'을 열었다.
국내에 '농촌 유토피아(Utopia)' 개념을 처음 제시한 성경륭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은 "농촌 인구가 급감하고 급속한 고령화로 농촌이 소멸 위기인데 어디서도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며 "실천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 바로 시범 사업이라도 착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미홍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은 "인구 급감으로 사람과 수요가 없는데 농촌만 바라보면 답이 없으니 농촌을 도시와 연계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며 "도시와 성장촉진지역(낙후 농촌)에 각각 주택 한 채를 보유하면 1가구 1주택으로 간주하는 파격적인 주택 정책을 시도해 보자"고 제안했다.
송미령 농촌경제연구원 농업농촌정책연구 본부장은 "지금의 농촌 현실은 디스토피아(Dystopia)처럼 보이지만 성장동력은 결국 농촌에서 나온다고 보기 때문에 우리 농촌을 유토피아로 만들 기회와 가능성은 아직 있다"고 강조했다.
중앙 정부도 이제서야 움직이고 있다. 대통령 직속 농정 자문기구인 농어업·농어촌 특별위원회가 주선한 '농정 틀 전환을 위한 전국 순회 타운홀 미팅'이 전국 9개 광역 시·도에서 순차적으로 진행 중이다. 지역별로 농민과 소비자, 공무원과 전문가 등 100여명이 참여해 농정의 비전과 대안을 찾자는 움직임이다. 지난 13일 경기도 수원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타운홀 미팅 현장에 가봤다.
옹기종기 둘러앉은 참가자들은 '농업의 미래를 방해하는 요소'를 각자 적은 뒤 그룹별로 포스트잇을 붙였다. 다국적 기업, 독점 유통 자본의 폭리, 개도국 지위 포기, 수입 농산물, 정부 관료의 구태 농정, 국가 보조금 의존, 소득 불평등, 농지 투기 자본과 부재지주, 정치인과 미디어, 시설 중심의 지원 구조, 새로운 것을 배척하는 농민의 고집, 왜곡된 소비자 인식, 고령화와 인구 감소, 정부와 민간의 소통 부재, 쌀소비 감소, 기후변화 등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농정 틀의 근본적 전환을 위한 핵심 과제'를 묻자 참가자들은 농민 기본 소득 보장, 공익형 직불제 도입, 귀농·귀촌 정책 현실화, 농산물 수급 안정 정책, 농업인 양성 교육, 농업 빅데이터 활용, 문화농업 확산, 보조금 지원 위주 정책 지양, 농어촌 체험 마을 활성화, 환경을 보존하는 선순환 농업, 지역공동체 활성화, 농업 가치 홍보, 소비자 인식 교육 등의 아이디어가 나왔다.
박진도 농어촌 특위 위원장은 "전국을 돌며 얻은 아이디어를 모아 12월 중순에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새로운 농정 비전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