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의 향기

카니발을 방해하는 것들

중앙일보

입력 2019.11.19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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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오민석 시인·단국대 교수·영문학

오민석 시인·단국대 교수·영문학

요즘 한국 민주주의는 (입에 재갈을 물리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거의 완벽한 단계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제재를 받지 않는 놀라운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 도대체 언제 이런 시절이 있었나. 거짓말을 마구 해대도, 대통령을 공산주의자이며 간첩이라 지칭해도, 심지어 특정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죽여도 된다”고 떠들어도 제어되지 않는다. 겉만 보면, 이제 한국에서 주변화되고 억압되며 움츠린 목소리들은 완전히 사라진 것 같다.

분별없는 말들이 축제 가로막아
건강한 논쟁 없는 불일치는 소음
정당한 윤리·어법이 축제 만들어

바흐친이 스탈린주의를 염두에 두며 이론화하고 고대했던 ‘카니발(축제)’의 ‘유쾌한 상대성’은, 이제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화려하게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랑시에르의 말대로 정치가 ‘치안’이 아니라 ‘불일치’를 생산하는 것이라면, 최근의 한국처럼 불일치가 극대화된 때도 드물었던 것 같다. 만일 바흐친이나 랑시에르를 기계적으로 적용을 한다면 한국 정치가 잘 굴러가고 있다는 논리까지도 가능해지는데, 문제는 다중(多衆)은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좋은 의미의 ‘유쾌한 상대성’과 ‘불일치’가 가동되려면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것들을 허용하지 않는 ‘가혹한’ 체제의 존재다. 오로지 한 목소리가 국가를 지배할 때 구성원 다수의 목소리는 공포에 짓눌리며 주변화된다. 바로 그때, 평소에 억압되었던 목소리들이 일제히 터져 나온다면, ‘유쾌한 상대성’은 해방의 ‘가치’로 부상된다. 다중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국가 전체를 ‘치안’의 상태로 몰고 갈 때, ‘불일치’는 죽은 정치를 살리는 건강한 가치가 된다. ‘마음대로 떠들 자유’로 한정해서 말한다면, 지금 대한민국에 이런 것을 막을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 먼 70~80년대에 존재했던 앙시앵 레짐들의 살벌한 얼굴들이었다.

미셸 푸코의 후기 사상의 핵심 개념 중의 하나로 ‘파레시아(parrêsia)’라는 것이 있다. 이 말은 “모든 것을 말하기”를 뜻하는 그리스어다. 영어로는 ‘프리 스피치(free speech)’라 번역되기도 한다. 신분과 사상·계급과 권력을 떠나 모든 것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모든 전제적 시스템에 대한 대안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푸코에 의하면 파레시아에도 ‘나쁜 파레시아’가 있다. 이 경우 파레시아는 “자신이 말하는 바에 신중하지 않고, 마음에 있는 것을 무분별하게 모두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볼 때, 지금 한국 사회는 나쁜 파레시아의 천국이 되었다.

‘뉴스앤조이’ 보도(11월14일)에 따르면, 얼마 전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단체로 알려져 있기도 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회장인 목사가 청와대 앞의 주일예배에서 “성령과 기름 부음을 사모하라. (기름 부음이) 100% 임하면 문재인 저거 나오게 돼 있다. 우리가 끌고 나올 필요도 없다. 하나님이 아마 심장마비로 데려갈 것이다”라며, 본인을 “메시아 나라의 왕”이라고 말했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자신을 메시아 나라의 왕이라 칭한 것이 신학적으로 얼마나 불경한 일인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기독교의 대표자(?) 격인 목사가 예배 자리에서 자국의 대통령을 “하나님이 심장마비로 데려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신중하지 않고 분별없는 행위가 아닌가.

어느 사회에나 수많은 ‘나쁜 파레시아’들이 존재한다. 물론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의 나쁜 파레시아들은 대부분 그 안에서 사소한 소란을 일으키다 소멸되고 만다. 문제는 그것이 다수가 모인 공적인 공간에서 나름의 상당한 ‘권력’을 가진 매체나 주체에 의해 수행될 때다.

‘좋은 파레시아’는 정당한 윤리와 철학, 그리고 가치와 어법을 전제로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비윤리적이고, 몰가치적인 파레시아들이 합당하지 않은 어법을 통해 무한 생산되고 있다. 권력을 가진 매체와 주체들이 경쟁하듯 나쁜 파레시아들을 쏟아놓을 때, 진정한 ‘카니발의 정치’와 공동체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불일치가 건강한 논쟁으로 발전하지 않을 때, 불일치는 정치가 아니라 소음이 된다.

사적인 모임에서도 사람들은 ‘나쁜 파레시아’들을 자주 만나며, 그것만으로도 고통을 당하고, 때로 관계가 파괴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 공적인 매체와 주체가 전체 공동체를 향하여 이런 것을 마구 수행할 때, 전 국민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어야 할까. 카니발은 재갈이 풀린 ‘모든’ 주체가 아니라, 정당한 윤리와 어법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다.

오민석 시인·단국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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