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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비 “기여”→“비용 상쇄”…에스퍼 무기거래 용어 썼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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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18일 서울 한국국방연구원에서 열렸다. 정은보 한국 대표(왼쪽 셋째)와 제임스 드하트 미국 대표(오른쪽 둘째) 등 양국대표단이 회의하고 있다. [사진 외교부]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18일 서울 한국국방연구원에서 열렸다. 정은보 한국 대표(왼쪽 셋째)와 제임스 드하트 미국 대표(오른쪽 둘째) 등 양국대표단이 회의하고 있다. [사진 외교부]

제11차 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 체결을 위한 3차 협상이 18일 1박 2일 일정으로 서울에서 시작됐다. 정은보 한국 대표와 제임스 드하트 미 국무부 SMA 대표는 이달 초 드하트 대표의 일시 방한 이후 열흘 만에 마주 앉았다. 양측은 미국이 1·2차 협상때 요구한 50억 달러 상당의 총액을 놓고 본격적인 줄다리기에 들어갔다.

로비스트 출신 트럼프의 측근 #방한 때 “비용 상쇄” 2번 언급 #동맹을 거래로 바꾸는 표현 #미국, 옛 서독과 ‘상쇄협정’ 땐 #국채 매입, 제3세계 지원까지 요구

미국의 속내는 사흘 전 방한했던 마크 에스퍼 국방부 장관의 발언 속에 있었다. 지난 15일 한·미 안보연례협의회 후 열린 양국 국방장관 공동 기자회견에서다. 에스퍼 장관은 방위비 분담금에 대한 입장을 이례적으로 밝혔다. “한국은 부자 나라고, (미국의 한반도)방어 비용을 상쇄(offset the cost of defense)하기 위해 더 내야한다”는 것이다.

이틀 전 인도태평양사령부를 향하는 기내에서도 그는 “(전세계에) 전진 배치된 미국의 비용을 어떻게 상쇄(offset U.S. costs)할 수 있을지”라고 했다. 전직 협상팀 관계자는 ‘비용 상쇄’란 용어와 관련, “그 전엔 ‘기여(contribution)’로 완곡히 표현했다. 완전히 생소한 단어가 나왔다”고 말했다. ‘상쇄’를 고리로 이번 방위비 분담금 협상 성격을 짚어본다.

①미국에 주는 돈, 기여 아닌 거래=‘기여’라는 레토릭은 동맹 개념이 전제다. 같은 목표로 한·미가 함께 가는 만큼 한국도 미국의 군사적 노력에 기여하라는 논리다. 그런데 ‘상쇄’는 철저히 계산형 표현이다. ‘상쇄’는 무기계약에서 많이 쓴다. 돈이 아닌 현물제공, 기술이전으로 비용을 보전하는 거래 용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인 에스퍼 장관은 방산업체 로비스트 출신. 그런 그가 방위비를 거론하며 이 용어를 쓴 건 방위비 분담금을 동맹 차원이 아니라, 거래 내지 계약으로 보는 트럼프 대통령의 시각이 반영됐다는 관측이다.

지난 1,2차 협상에서 드하트 대표는 “한국 방어에 미국이 이만큼 쓰니 방위비의 상당한 증액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폈다고 한다. “한국 방어에 미국이 50억 달러를 쓴다”며 이를 상쇄하라는 주장은 전액 현금은 아니어도 현물이든 인력이든 한국이 그 정도를 채우라는 의미다.

18일 태국 방콕 에서 열린 아세안 확대 국방장관회의 에 참석한 정경두 국방부 장관(왼쪽)과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 [연합뉴스]

18일 태국 방콕 에서 열린 아세안 확대 국방장관회의 에 참석한 정경두 국방부 장관(왼쪽)과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 [연합뉴스]

②상쇄엔 미군 주둔 이외 비용까지 포함=미국의 방위비 분담금 협정사로 보면 ‘상쇄’는 서독 사례에서 등장했다. 2013년 국회예산정책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1961년 부터 75년까지 ‘상쇄 협정(offset agreement)’을 통해 서독에게서 112억 3000만 달러를 받아갔다. 연평균 8억 달러다. 미국의 방위비 분담금 협정의 시초였다.

금액 속엔 미국산 무기구입, 국채 매입, 미군 숙소 건설, 미국의 제3세계 지원금 인수 등이 포함됐다. 주독미군 유지비가 아니라, 독일 방어 비용 상쇄를 위해 경제·무역·외교 분야까지 온갖 비용을 서독에게서 충당했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냉전으로 국방비 지출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 8%에 이를 때였다. 베트남 전쟁까지 더해지면서 동맹국들에게 비용 분담을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방위비 분담금은 주한미군이 쓰는 인건비, 군사건설비, 군수지원비 등 세 항목 중 일부를 한국이 분담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기여가 아닌 상쇄가 되면 이런 틀이 사라진다. 서독처럼 미국이 한국 바깥에서 쓰는 각종 안보 비용까지 한국이 부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상쇄’란 용어 뒤에 숨은 의미다.

에스퍼 장관은 13일 방위비 분담금을 설명하면서 “GDP 대비 2%가 기본”이라고 언급했다. 2000년대 들어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미국의 유럽 우방국들의 GDP 대비 국방비 지출은 1%대로 점점 낮아지고 있다. 미국은 줄긴 했지만 여전히 3%대다. 2001년 9·11 이후 중동 테러와의 전쟁 과정에서 국방비 지출이 커지자 동맹국들에 방위비 분담 압력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③“10억 달러 주면 10억 달러어치만 주둔”=냉전 시기 미국은 자본주의 진영 유지를 위해 미군을 전진 배치하면서 주둔국에 분담금을 요구했다. 당시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 때문에 유럽에서 쉽게 미군을 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최소한 한반도에 관한 한 그런 ‘붙박이군’ 개념이 점점 약화하고 있다. 21세기 ‘상쇄형 분담금’ 개념엔 상쇄해주는 돈 만큼 지켜준다는 함의도 있다는 우려다.

박휘락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는 “한국이 50억 달러 중 10억 달러만 낸다면 10억 달러어치만 주둔하겠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제임스 김 아산정책연구원 미국연구센터장도 “그간 트럼프 대통령의 패턴을 볼 때, 협상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으면 순환배치 인력을 줄이는 등 비용 절감 방식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의 경찰’ 미국의 해외주둔 정책이 트럼프 정부 들어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로 전환되고 있다. 한국과의 이번 방위비 협상이 그 첫번째 신호탄이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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