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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통신·전기요금 잘 내도 대출 받아요

중앙일보

입력

은행권, 비금융데이터 활용한 신용대출… 신용정보법 개정안, 1년째 국회 계류

대안신용평가 ‘씬 파일러(thin filer)’에 대안될까

두달 전 취업에 성공한 직장인 김성태씨는 대출을 받기 위해 A은행에 방문했다. 급하게 이사를 가게 되면서 3000만원을 대출받으려 했지만 퇴짜를 받았다. “최소 3개월 이상 급여명세서를 받아야 대출심사가 가능하다”는 게 은행 직원의 설명이었다. 김씨는 “지금까지 연체는 물론 A은행만 거래하며 실적을 쌓았는데 대출이 안 된다고 하니 당황스럽다”며 “취업을 해도 금융거래 기록이 부족하다고 대출이 안 된다는 건 불합리하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김씨처럼 급여 입출금 거래명세서나 금융거래 이력이 부족해 은행으로부터 신용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금융 이력 부족자’가 늘고 있다. 금융 이력 부족자는 얇은 파일을 의미하는 ‘씬 파일러(Thin-filer)’라고도 불린다. 이들은 시중은행 대출문턱을 넘기 어려운 만큼 저금리 시대에도 고금리 금융을 이용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씬 파일러의 주요 연령대는 취업준비생이나 사회초년생, 노년층 등 주로 20대와 60대다.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나이스평가정보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올 상반기 기준 금융 이력 부족자(최근 2년 내 신용카드 사용실적이 없고 3년 내 대출 보유 경험이 없는 자)는 1289만7711명으로 전체 신용등급 산정 대상자 4638만7433명의 27.8%다. 2014년(1227만6623명) 이후 62만여 명이 늘었다. 업계에서는 그동안 씬 파일러에 대한 신용평가제도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이에 은행들은 금융권 거래실적이 없을 경우 비금융 정보로 개인의 신용을 평가하는 대안신용평가 모델 개발을 추진했다.

금융 이력 부족자 4년간 62만 명 늘어

대안신용평가는 ‘대체정보(alternative data)’로 불리는 비금융정보를 활용해 신용을 평가하는 방식을 말한다. 즉, 대출이나 신용카드 발급 여부 등 기존 금융거래 정보가 아닌 통신·전기·가스요금 납부 이력, 온라인 구매 정보, 포인트 적립 정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정보, e메일, 모바일 데이터 등 비금융정보를 활용해 신용등급과 점수 등을 산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온라인 쇼핑몰에서 주기적으로 물건을 구입하거나 공공요금을 잘 냈다면 좋은 신용등급을 받는 식이다.

은행들은 최근 비금융데이터를 활용한 신용평가 모델을 구축하고 대출심사에 적용하고 있다. 신한은행과 NH농협은행은 금융 이력이 부족해 대출심사에서 탈락한 고객들을 재심사하는 데 통신3사 정보를 반영한 신용평가시스템을 활용한다. 통신사 이용 정보만으로 대출이 가능한 상품도 나왔다. 우리은행은 지난 7월 11일 소득정보나 직장 정보 없이도 통신사 정보만으로 최대 300만원까지 대출을 받는 ‘우리 비상금 대출’을 출시했다. 소득정보나 직장 정보 없이 휴대전화 요금납부 내역 등을 바탕으로 통신사 신용등급을 통해 신용대출을 해준다. 이 상품은 지난 11월 6일 기준으로 최저금리 연 4.34%, 대출 잔액은 173억원이다. 최근에는 SK텔레콤도 비금융정보를 활용한 저금리 신용대출 상품을 개발 중이다. 대출 대상자는 온라인 마켓을 운영하는 영세 소상공인이다.

신한카드는 자영업자를 상대로 개인 신용등급이 아닌 매출 규모와 성장 가능성 등을 반영한 신용등급 평가모형을 개발해 적용할 방침이다. 지금까지는 대출받을 때 개인신용등급을 1~10등급으로 나눠 여신 심사했지만 앞으로는 개인사업자의 상환 능력을 평가하는 신용평가모형과 가맹점 매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매출 추정 모델로 평가하게 된다. 비금융거래 데이터로 신용점수도 올리는 서비스도 나왔다. 한국카카오은행은 고객의 건강보험납부 내역이나 세금납부 내역 등을 평가에 반영해 신용평가 점수를 재산정하는 ‘신용점수 올리기’는 서비스를 내놨다.

대안신용평가 방식은 데이터베이스(DB)와 동영상·사진 등의 데이터에 대한 클라우드 기반의 빅데이터 활용이 가능해지면서 나왔다. 해외에서는 비금융정보를 활용한 신용점수 산출 신용평가회사가 이미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파이코(FICO)와 렌도(Lenddo)를 들 수 있다. 파이코(FICO)는 통신료, 지불결제 이력 등을 활용한 신용위험 측정모형을 적용해 금융정보가 부족한 개인들의 신용점수를 산출한다. 렌도(Lenddo)는 SNS 친구나 포스팅 등 260억개 데이터를 머신러닝(학습)으로 분석해 일종의 평판 점수인 렌도 스코어를 매긴 후, 이를 통해 고객의 금융 신용도를 평가한다.

납세·사회보험료 정보도 비금융정보로 활용돼야

대안신용평가 모델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비금융데이터 활용 범위를 늘려야 한다. 문제는 현재 비금융데이터를 활용할 길이 좁다는 점이다. 금융 이력 부족자가 신용등급 가점을 받으려면 직접 관련 내역에 대한 정보제공 동의서를 제출하고 이를 1년마다 업데이트해야 한다. 은행권도 활용할 만한 비금융 데이터가 제한적인 상황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현재 활용 가능하고 신뢰할 만한 비금융데이터는 통신사 이력 정도”라며 “납세·사회보험료 정보 등 비금융정보를 활용해야 대안평가모델이 활성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납세·사회보험료 정보 등 비금융정보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지난해 11월 국회에 발의된 신용정보법 개정안이 통과돼야 한다. 신용정보 개정안은 특정 개인을 알아볼 수 없도록 비식별화된 개인신용정보(가명정보)를 상업적 목적의 통계작성이나 산업적 연구를 목적으로 정보 주체의 동의없이 제공 또는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국회에 1년째 계류된 신용정보법 개정안은 최근 법안심사 소위원회에서 안건으로 상정됐지만 논의 끝에 보류됐다. 여야는 법 개정 자체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보완사항이 있다며 11월 열리는 법안소위에서 추가로 논의하기로 했다. 개정안에 대해 과세당국, 시민단체 등에서 반대하고 있어 통과까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시민단체에서는 데이터 활용 규제 완화가 되면 개인정보 악용 가능성이 높다며 법안에 반대하고 있다. 백정현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 교육국장은 “빅데이터가 개인정보와 결합하며 범죄자들의 수익원이 되고 있다”며 “개인정보 활용이 활성화되면 보이스피싱 문제가 지금보다 심각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성희 기자 kim.sung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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