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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애쓰지 말아요” 밑바닥 시인이 건네는 짠한 위로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47)

얼마 전에 한 친구를 만났다. 일도 잘하고 사회관계도 좋으며 가정에도 충실한 그는 ‘만능형 인간’이다. 그런데 이 만능형 인간, 잔을 부딪치며 얘기를 나눠보니 꽤 큰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모든 것을 잘해야 하는 강박감이 그를 짓누르는 모양이었다.

이후 서점에 갔다가 ‘외국 시’ 코너에 멈춰 섰다. 만능형 인간에게 권해주고 싶은 시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찰스 부코스키(Henry Charles Bukowski). 미국을 대표하는 밑바닥 시인임과 동시에, 미국 서점에서 가장 많이 도난당하는 책의 주인공이다.

1920년 독일에서 태어난 부코스키는 두 살 때부터 LA에 살기 시작했다. 이십 대에는 소설을, 삼십 대에 접어들어서는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는 우체국 직원이라는 신분 외에는 오직 주정뱅이, 노름꾼, 바람둥이로만 알려졌다. 그러나 그가 여타 주정뱅이와는 다른 점이 하나 있었으니, 계속해서 시와 소설을 쓴다는 것이었다.

부코스키는 수십 년이나 글을 써서 투고했다. 출판사, 잡지, 신문사, 문예지… 보낼 수 있는 곳에는 다 보냈다. 연락이 오는 곳은 없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작은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책을 한 권 내보자는 것이었다. 부코스키는 그 순간 직감했다. 이것이 우체국 일을 그만두고 전업작가가 될 수 있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단 한 번의 기회임을. 그러나 그의 나이 이미 오십이었다. 생계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코스키는 고민 끝에 이렇게 회신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밑바닥 시인이면서 미국 서점에서 가장 많이 도난당하는 책의 주인공 찰스 부코스키. [자음과모음 제공=연합뉴스]

미국을 대표하는 밑바닥 시인이면서 미국 서점에서 가장 많이 도난당하는 책의 주인공 찰스 부코스키. [자음과모음 제공=연합뉴스]

둘 중 하나를 택해야겠군요.
이 우체국에 남아서 미쳐버리거나
아니면 작가 놀이를 하며 굶거나.
전, 굶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우체국을 그만둔 부코스키는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첫 작품 『우체국(1971)』은 출판사와 계약한 지 3주 만에 탈고한 작품이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다양한 소설과 시집, 평론 등을 발표했는데 남긴 책이 무려 60권에 달한다. 그는 작가로서 꽤 인정을 받았으나 일흔다섯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외부의 평가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돈과 명성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그는 내키는 대로 마셨고 내키는 대로 썼다. 만일 독자 여러분께서 언젠가 ‘최고의 괴짜들’란 주제로 지인들과 대화를 할 가능성이 있다면 찰스 부코스키라는 이름과 다음과 같은 그의 시 한 편 정도는 기억해두는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작가로서는 매우 열심이었으나, 부코스키의 인생을 ‘좋은 삶’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사생활 측면에서는 거의 자기파괴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방탕했기 때문이다. [사진 pxhere]

작가로서는 매우 열심이었으나, 부코스키의 인생을 ‘좋은 삶’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사생활 측면에서는 거의 자기파괴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방탕했기 때문이다. [사진 pxhere]

아직도 기억나
뉴올리언스의 쥐들.
어스름한 이른 아침
변소 앞에서 차례를 기다릴 때면
발코니 난간에 나와 있던
쥐들.
커다란 놈 두 세 마리는
꼭 있었다.
(…)

변소 문이 열리면
꼴이 거기 쥐만도
못한
세입자 하나가
밖으로 나왔다.
그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면
나는 숙취를 데리고 아직
냄새가 나는 변소 안으로
들어갔다.
(…)

그러면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으로
그렇게
통로를 걸어
박봉의
고달픈
일터로
들어갔는데
쥐들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째서 저놈들이
나보다 더
잘 지내나 싶어서.
(…)
-찰스 부코스키,〈아침 풍경〉부분. 시집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민음사, 2019, 황소연 역)』

작가로서는 매우 열심이었으나, 부코스키의 인생을 ‘좋은 삶’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사생활 측면에서는 거의 자기파괴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방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전혀 귀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코스키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오직 내면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일흔다섯의 나이로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는 늘 자신의 삶에 관한 진실되고 자유로운 글을 썼다.

나는 부코스키의 시집 한 권을 사 들고 서점을 나왔다. 다음번 만능형 인간을 만나면 전해줄 요량이었다. 속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적었다. “너무 애쓰지 마(Don’t try).” 찰스 부코스키의 묘비에 적혀 있는 말이다.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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