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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끼고 침입해 거꾸로 입힌 속옷…화성 8차도 이춘재 짓

중앙일보

입력

경찰이 '억울한 옥살'이 논란이 일고 있는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도 이춘재(56)라는 잠정 결론을 냈다. 이춘재는 일관적으로 범행 당시 상황 등을 설명했는데 경찰이 과거 사진 등을 분석한 결과 자백 상당수가 현장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재소자 신분카드에 부착된 이춘재.[JTBC 캡처]

재소자 신분카드에 부착된 이춘재.[JTBC 캡처]

이 사건을 수사 중인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전담수사본부는 15일 8차 화성 살인 사건에 대한 중간수사 결과 발표 브리핑을 열고 "이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옥고를 치른 윤모(52)씨의 과거 진술보다 이춘재의 자백이 더 신빙성이 있다"며 이렇게 밝혔다.

8차 화성 살인 사건은 1988년 9월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현 화성시 진안동)의 한 가정집에서 A양(당시 13세)이 숨진 채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이듬해 이 사건의 범인으로 붙잡힌 윤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하다 2009년 가석방됐다. 윤씨는 수감 당시부터 "경찰의 고문 등 강압 수사로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해 왔다. 지난 13일엔 수원지법에 재심청구서를 제출한 상태다.

뒤집어 입은 속옷…이춘재 진술에 부합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 [뉴스1]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 [뉴스1]

경찰은 이춘재가 8차 화성 살인 사건을 포함한 화성 연쇄살인 사건 10건 등 14건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자백함에 따라 윤씨와 이춘재의 진술 신빙성, 과거 강압수사 여부 등을 조사해 왔다. 그리고 과거 범행 현장 사진과 수사 기록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이춘재가 8차 화성 살인 사건의 진범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경찰은 "이춘재가 피해자 A양의 신체적 특징은 물론 집과 방 구조, 침입 경로, 시신 위치 등을 자세하고 일관되게 진술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이춘재는 열려 있는 대문으로 A양의 집에 침입했다. 단발머리 등 A양의 신체적 특징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춘재는 양말을 손에 낀 상태에서 A양의 옷을 모두 벗긴 뒤 범행을 했고 다른 속옷 등을 다시 입힌 뒤 집 안을 빠져나왔다고 진술했다.

A양이 입고 있던 속옷은 혈흔 등이 묻어서 가지고 나와 버렸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춘재는 "중학교 1년 후배가 피해자 집에 살아서 어릴 적 가 봤다. 이 친구가 이사한 뒤엔 외지 사람들이 와서 사는 것을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 A양의 집 [중앙포토]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 A양의 집 [중앙포토]

반면 윤씨의 과거 수사 기록과 자술서 등엔 윤씨가 담과 방문 앞에 있던 책꽂이가 놓인 책상을 넘어 침입했다고 돼 있다. A양의 옷을 무릎까지 내린 상태에서 범행했고 다시 입혔다고 쓰여 있다.

경찰이 과거 수사기록과 범행 현장 사진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이춘재의 자백이 더 현장 상황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결정적 증거물은 A양이 입고 있던 속옷이었다. 과거 범행 현장을 찍은 사진 속 A양이 착용한 속옷은 상표 등이 찍힌 라벨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 뒤집어 입은 것이다.

반기수 수사본부장(2부장)은 "과거 수사 기록엔 속옷을 뒤집어 입었다는 부분이 없었는데 현장 사진 등을 확인해 본 결과 속옷을 뒤집어 입을 것을 확인했다"며 "중학생인 피해자가 속옷을 거꾸로 입었다고는 볼 수 없어 '옷을 무릎까지 내려 범행을 했다'는 윤씨의 진술보다는 '모두 벗기고 다른 속옷으로 다시 입혔다'는 이춘재의 자백에 더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화성 8차 사건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화성 8차 사건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이춘재 "양말을 손에 끼고 범행" 

과거 수사 기록 등을 보면 당시 A양 방 안에 있던 책상 위에선 흙이 발견됐다고 한다. 맨 발자국도 3개 발견됐다. 왼쪽 발가락과 오른발 뒤꿈치, 십자 모양으로 찍힌 족적 등이다.

윤씨는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하다. 과거 현장검증 사진에도 윤씨가 책상을 양손으로 책상을 짚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혔다. 담을 넘는 시늉을 하는 사진도 나왔다. 과거 자술서 등엔 "장갑을 끼고 범행을 했다"는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범행 현장에서 윤씨의 지문이 발견되진 않았다고 한다.

이춘재가 자백한 범행 상황은 구체적이다. 양말을 벗어 양손에 끼고 맨발로 들어가 범행을 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범행 당시 사진을 재감정 의뢰한 결과 "A의 시신에서 발견된 범행 흔적이 맨손으로 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추정이 나왔다고 한다.

고문 여부와 과거 국과수 조사 결과는 수사 중 

경찰은 이런 점을 토대로 8차 화성 살인 사건의 진범을 이춘재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윤씨가 주장하는 과거 경찰의 고문 등 위법행위와 윤씨를 범인으로 지목한 과거 국과수의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에 대해선 아직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과거 경찰관들은 여전히 "윤씨가 범인이라는 국과수 수사 결과가 있어서 윤씨를 고문할 이유가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검거돼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해 온 윤모(52) 씨의 공동변호인단 박준영 변호사(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지난 13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경기중앙지방변호사회관에서 열린 재심 청구 기자회견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검거돼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해 온 윤모(52) 씨의 공동변호인단 박준영 변호사(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지난 13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경기중앙지방변호사회관에서 열린 재심 청구 기자회견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과거 경찰은 이춘재는 2차례, 윤씨는 4차례 체모를 뽑아 조사했는데 이춘재는 1차 조사에선 'B형', 2차 조사에선 'O형'으로 나와 B형을 용의자로 봤던 경찰 수사를 피할 수 있었다. 반 본부장은 "국과수에서 체모를 통한 혈액형 분석은 시료량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 있어서 이춘재의 체모 1·2차 결과가 달리 나온 것 같다는 답변을 받았다"며 "윤씨를 범인으로 지목한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 결과에 대해서도 '당시 외국의 통계를 국내 분석 결과에 적용해 감정한 것인데 해당 외국 통계는 여러 논문에 인용됐지만,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밝혀왔다"고 말했다.

앞서 경찰은 이춘재의 DNA가 검출된 3·4·5·7·9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이춘재를 입건했다. 하지만 8차 사건의 피해자로는 입건하지 않은 상태다.

국과수에 DNA 감정을 맡겼던 2차 화성 살인 사건 증거물에서는 이춘재의 DNA가 검출되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고문 등 불법·가혹 수사와 과거 국과수 감정 문제는 계속 수사 중"이라며 "윤씨가 최근 재심을 청구한 만큼 재심절차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당시 수사기록을 검찰에 송부했다"고 말했다.

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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