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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청하면 부엌 들어가 음식 만든 조선시대 문신, 왜?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61)

조선 선조 시기 영의정을 지낸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은 신진 관료 시절 파직된 뒤 33세에 귀양을 간다. 29세에 장원 급제한 그가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우의정 이기의 유임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여한 게 화근이었다. 이른바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의 권력 다툼인 을사사화에 말려든 것이다.

노수신은 31세에 이조좌랑에서 파직된 뒤 1547년 진도로 유배된다. 귀양살이는 이후 19년이나 이어진다. 유배는 노수신의 세계관을 바꾼다. 을사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자신이 잘못 없이 귀양살이한 억울함이 작용한 것일까. 자신이 공부한 천리(天理)와 현실의 괴리 때문일까. 그는 주류 학문이던 주자학을 박차고 나온다.

노수신의 사당과 종택 등이 모여 있는 경북 상주시 화서면 옥연사(玉淵祠) 전경. [사진 백종하]

노수신의 사당과 종택 등이 모여 있는 경북 상주시 화서면 옥연사(玉淵祠) 전경. [사진 백종하]

소재는 진도 유배 5년째인 37세에 ‘숙흥야매잠해’를 쓴다. 성리학의 시간대별 수양 방법에 자신의 논지를 붙인 것이다. 그는 초고를 쓴 뒤 퇴계 이황에게 보내 질정을 구한다. 퇴계는 나이로 소재의 14년 선배다. 소재는 퇴계의 비판을 대부분 수용한다.

소재는 진도 유배 13년째엔 ‘인심도심변’을 쓴다. 다시 3년 뒤엔 ‘집중설’을 저술한다. ‘인심도심변’은 주자의 인심도심설에 이견을 제시한 글이었다. 퇴계와 기대승 등 주자학자들은 소재의 ‘인심도심변’을 비판하고 나섰다. 퇴계는 소재의 사상을 양명학(陽明學)‧상산학(象山學)으로 규정했다. 소재는 퇴계의 비판에 맞서며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견지한다. 조선에서 비주류 양명학이 시작된 것이다. 소재는 주자 학설에 이견을 내고 퇴계와 사상적으로 대립하면서 당대 사림의 거센 비판을 받는다.

양명학에 몰두한 노수신은 뜻밖에도 재기(再起)한다. 1567년 선조 임금은 즉위 직후 을사사화의 피해자인 노수신을 유배에서 풀고 홍문관 교리에 임명한다. 이후 승승장구한다. 소재는 청주목사, 호조 참판, 대제학을 거쳐 59세에 우의정에 오르고 64세엔 좌의정이 된다.

옥연사 인근에 세워진 노수신의 신도비. [사진 송의호]

옥연사 인근에 세워진 노수신의 신도비. [사진 송의호]

옥연사 안 재실인 첨모재. [사진 송의호]

옥연사 안 재실인 첨모재. [사진 송의호]

노수신은 유배 기간 못 다한 효를 지극히 실천하기도 했다. ‘송와잡기’에는 “소재가 부모를 봉양하는데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극진히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짧은 옷을 입고 부엌에 들어가 몸소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 바쳤으며, 관직이 높아진 뒤에도 이 일을 그만둔 적이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1585년(선조 18) 71세 소재는 영의정에 오른다. 그는 경연에서 임금에게 양명학을 논한다. 그는 “사람은 마땅히 존심(存心)에만 힘쓸 것이며, 문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경서의 훈고는 의미가 풀렸으니 문자는 잊어버려도 된다는 것이다. 그는 학문보다 마음공부를 강조했다. 그러나 끝은 명예롭지 못하다. 소재는 1590년 정여립 옥사가 일어나자 그를 천거했다는 죄명으로 파직된다. 그리고 한 달 뒤 세상을 떠났다.

노수신의 시호(문간)를 내리는 교지. [사진 상주박물관]

노수신의 시호(문간)를 내리는 교지. [사진 상주박물관]

소재는 퇴계와 학문적으로 다른 길을 추구했지만 퇴계를 존경했던 것 같다. 소재는 퇴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215자의 긴 제문을 남긴다. 그는 제문에서 “긴 유배 생활로 삶을 포기하려 할 때 퇴계가 책망을 그치지 않고 독려했다”고 회고했다.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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