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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해태상이 문지기? 원자리는 정부청사 앞, 정의 상징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3) 

지금 경복궁의 광화문 양편에는 옹색하게 담장에 바짝 붙은 채로 광화문을 지키고 있는 해치(獬豸)상이 있다. 자못 부릅뜬 두 눈과 앙다문 이빨이 무서워 보이기도 하고, 세워진 위치로 보아서는 광화문을 지키는 문지기 같기도 한데, 아무도 해치를 두려워하거나 문지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사실 상상의 동물이라고 해도 해치의 속성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 해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듯하다. 적어도 해치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 세상의 정의나 선에 대한 개념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시대의 불행일지도 모르겠다. 해치는 일반인에겐 ‘해태’로 더 잘 알려진 동아시아 고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광화문 앞의 해치는 경복궁 영건에 참여했던 이세옥(李世玉)의 작품이다. 조선시대 궁궐의 석수조각과 비교했을 때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조각기법도 뛰어난 걸작이다. 두 눈을 부릅떴지만 살벌하게 무섭지 않고 해학적인 표정과 함께 위엄을 갖춘 당당한 자세가 일품이다.

광화문 앞의 해치는 경복궁 영건에 참여했던 이세옥의 작품이다. 조선시대 궁궐의 석수조각과 비교했을 때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조각기법도 뛰어난 걸작이다. [사진 pxhere]

광화문 앞의 해치는 경복궁 영건에 참여했던 이세옥의 작품이다. 조선시대 궁궐의 석수조각과 비교했을 때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조각기법도 뛰어난 걸작이다. [사진 pxhere]

해치는 해태, 신양(神羊), 해타(獬駝) 등 여러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해태가 불을 쫓는 동물이라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려고 궁궐 앞에 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좀 더 생각해 볼 일이다. 조선시대 궁궐의 돌조각은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 낸 모습으로 대부분 길상 또는 벽사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광화문의 해치가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세워졌다는 것도 풍수지리적인 해석의 벽사다.

고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해치 상을 궁궐 문 앞에 세우는 것은 중국 초나라 때부터 있었다. 그 뜻은 관리들이 마음속의 먼지를 털어내고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으로 법과 정의에 따라 매사를 처리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광화문 해치를 궁궐 대문 밖에 세운 이유 역시 조선왕조의 통치철학과 그 뜻을 같이한다. 옛날 사람들은 해치가 선악을 구분할 줄 안다고 생각했고 공명정대한 법을 수호하는 역할의 상징으로 삼았다. 더 나아가 해치의 범접하기 어려운 자태 뒤에는 법과 정의에 따라 광명정대한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 숨어 있다.

중국 한나라 때 양부(楊孚)가 지은 『이물지(異物志)』에 따르면 해치는 동북 지방의 땅에 사는 짐승으로 모습은 사자와 비슷하나 기린처럼 머리에 뿔이 하나 있으며, 몸 전체는 비늘로 덮여 있다. 해치는 성품이 충직하며 시비곡직(是非曲直)을 가릴 줄 알아서 사람들이 싸우면 바르지 못한 자는 그 뿔로 들이받고 거짓말을 하는 자에게 덤벼들어 깨문다고 했다.

고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해치 상을 궁궐 문 앞에 세우는 것은 중국 초나라 때부터 있었다. 관리들이 마음속의 먼지를 털어내고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으로 법과 정의에 따라 매사를 처리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사진 pixabay]

고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해치 상을 궁궐 문 앞에 세우는 것은 중국 초나라 때부터 있었다. 관리들이 마음속의 먼지를 털어내고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으로 법과 정의에 따라 매사를 처리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사진 pixabay]

중국의 순임금 때 법을 맡았던 고요(皐陶)는 나라 안팎의 오랑캐를 물리쳐 백성을 편하게 하고, 법을 엄격히 적용해 풍기를 바로잡은 인물로 후세 법관의 귀감이 됐다. 고요는 옥사 문 앞에 해치를 두어 죄가 있는 자를 가려내고, 해치의 능력을 빌려 죄의 유무와 경중에 따라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광화문 해치상은 정수리에 뿔이 없고 목에 큰 방울을 달고 있다. 마치 고요가 그의 옥사 앞에 해치를 붙들어 두고 시비를 가리게 했던 때의 표식처럼 어느 정도 인간에 길들여져 인간을 돕는 모양새처럼 말이다.(광화문 앞의 해치보다는 경복궁 안 흥례문 계단의 해치가 옛 기록 이물지에 나오는 묘사 그대로 일각수의 모습이 뚜렷하다)

원래 광화문 앞의 해태가 놓여있던 자리는 옛 육조거리 사헌부 앞의 길 양쪽으로, 현재 정부서울청사 앞 부근이다. 조선시대 사헌부는 시정의 잘잘못을 따지고 관원들의 비리를 조사하여 탄핵하던 대표적인 사법기관이었다. 해치는 법과 정의를 상징하는 신수(神獸)로, 사헌부의 관원들은 관복에 해치 흉배를 달았고 해치관을 썼다. 해치상을 광화문 밖 사헌부 앞 양쪽에 세워 궁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말이나 가마에서 내리는 하마(下馬)비 같은 역할을 하게 했을 것이다.

1890년대의 사진을 보면 해치 상 앞에 ‘ㄴ’자 모양의 받침돌이 보이는 데 이것은 말이나 가마에서 내릴 때 발을 딛는 노둣돌이다. 이곳부터는 왕의 신성한 영역이니 누구든 왕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이라면 궁으로 들어가기 전 탈 것에서 내리라는 하마의 표시였던 것이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7년(1870) 2월 12일 기사에는 임금의 가마가 움직일 때(동가:動駕) 시위대 안으로 인마(人馬)가 난입하는 일이 없도록 해치 이내에서는 백관이 말을 타지 못하게 엄히 신칙하라고 하교했다.

또 고종실록 고종 7년(1870년) 7월 10일 2번째 기사에서 왕은 광화문 앞에서 아무나 말을 타는 일이 없도록 사헌부에 규찰을 명했다. “대궐 문에 해치를 세워 한계를 정하니, 이것이 곧 상위(象魏, 엄정한 법률제도)이다. 조정 신하들은 그 안에서는 말을 탈 수가 없는데, 이것은 노마(路馬, 임금의 수레)에 공경을 표하는 뜻에서이다....” 이 실록 기사로 보아 임금과 왕실의 권위를 위해 규칙을 세우고 다스렸으나 관리들이 말을 안 듣고 계속 광화문까지 말을 타고 다녔다는 사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광화문과 해치 사이의 거리가 만만치 않았던 까닭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경복궁을 지었던 조상들의 자연관이나 뜻깊은 사상적 이념을 이해하고 다가갈 때 한낱 생명 없는 돌조각에서도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진정한 우리 것을 우리의 마음자리에 되돌려 놓을 수 있는 길이 된다. [사진 pixabay]

현대를 사는 우리가 경복궁을 지었던 조상들의 자연관이나 뜻깊은 사상적 이념을 이해하고 다가갈 때 한낱 생명 없는 돌조각에서도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진정한 우리 것을 우리의 마음자리에 되돌려 놓을 수 있는 길이 된다. [사진 pixabay]

그러던 것이 요즘에는 경복궁 담장에 바짝 붙어 있는 해치를 눈여겨보지도 않으니, 광화문 앞을 차를 타고 질주할 뿐만 아니라 걸어서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경우에도 전혀 신경 쓸 일이 없다. 예전에는 높은 관리만이 드나들 수 있던 광화문으로 들어간다 한들 이미 임금 없는 평등한 민주사회에서 누구의 눈치를 볼 것인가. 이래저래 제 위치에 있지 않은 해치로 인해 우리가 굳이 경건한 마음으로 경복궁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누구 하나 책망할 사람도 없고 법령도 없다. 강직하고 늠름했던 기개를 잃고 제구실 못 하는 무덤덤한 해태로 하여 무너진 조선왕조의 일말을 보는 것 같은 안쓰러운 마음이 이는 것은 나만의 감상일까. 그러나 고리타분한 생각이라 해서 현대에는 해치의 상징성이 아무 상관 없다고 무시해도 되는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조선시대에 해치상은 관리들을 감찰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헌부의 상징이었다. 이런 의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어 국회의사당, 대검찰청, 사법연수원 등에도 해치상이 설치되어 있다. 모든 국민은 그들이 법을 제정하고 실행하는 기관으로서 정의의 편에 서서 법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즉 나랏일을 하는 이들은 국민 앞에 바르고 정의로운 사람이 되라는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해태 상을 국회의사당 문지기 정도로 취급하고 무심히 지나가는 국회의원이 없기를 바라고, 나랏법을 자신의 권력으로 생각하는 법관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일터에 놓인 해태의 의미를 아무도 신경 쓰는 이가 없는지 지금 나라의 국회와 검찰은 너무도 시끄럽고 저마다의 목소리를 높인다. 국민의 실망감은 염두에도 없는 모양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경복궁을 지었던 조상들의 자연관이나 뜻깊은 사상적 이념을 이해하고 다가갈 때 한낱 생명 없는 돌조각에서도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진정한 우리 것을 우리의 마음자리에 되돌려 놓을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의 계획대로라면 해치상의 위치도 광화문 월대의 복원과 함께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해치가 제자리를 찾아가면 우리의 법과 정의도 더욱 반듯한 모습으로 시행되지 않을까?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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