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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잉꼬부부 백건우 고백 "윤정희 알츠하이머 심각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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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본지와 인터뷰하던 당시의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배우 윤정희 부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12년 본지와 인터뷰하던 당시의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배우 윤정희 부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피아니스트 백건우(73)는 아내인 윤정희 배우 대신 딸 진희씨와 함께 8일 인터뷰 장소에 왔다. 둘은 결혼 후 언제나 함께 다녔던 부부였다. 백건우의 손가락엔 결혼할 때 한국 돈으로 약 1만원을 주고 산 굵은 반지가 그대로 있었다. 40년 넘게 한 번도 뺀 적이 없는 반지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딸 진희씨 인터뷰 #"윤정희 배우 10년째 알츠하이머 투병 중" #백건우는 내년 슈만으로 부인에 헌정 무대

백건우는 지난해 쇼팽의 녹턴(야상곡), 즉 밤의 음악 전곡을 녹음하고 12개 도시에서 연주했다. 다음 달에 다시 쇼팽 공연(11일, ‘백건우와 쇼팽’)을 준비했는데 티켓이 빨리 매진되는 바람에 추가 공연(7일 ‘백건우와 야상곡’)을 더 잡았다. 그는 늘 한 작곡가의 생애와 심리 모든 것을 소화한 후 시리즈를 무대에 올린다. 쇼팽 다음은 슈만이다. 내년 10월 슈만의 작품을 2시간 반 동안 연주하기 위해 지난 여름부터 슈만에 빠져 지낸다고 했다.

슈만의 모든 음악을 그는 러브레터라 불렀다. 슈만 평생의 사랑은 알려진 대로 부인인 클라라다. 20세를 갓 넘긴 클라라는 9세 연상의 슈만과 결혼했고 정신적으로 불안한 그를 끝까지 도왔다. 슈만이 말년을 병원에서 보내는 동안 둘은 만나지 못했다. 백건우의 슈만 연주는 두 사람의 인생과 사랑, 비극과 행복을 모두 들여다 보려 한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왼쪽)와 딸 진희씨. 진희씨는 어머니 윤정희 배우의 알츠하이머 투병을 이야기하며 "아버지의 극진한 간호와 사랑에 감사한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피아니스트 백건우(왼쪽)와 딸 진희씨. 진희씨는 어머니 윤정희 배우의 알츠하이머 투병을 이야기하며 "아버지의 극진한 간호와 사랑에 감사한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결혼 후 40년 동안 백건우와 윤정희 부부는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다. 그의 연습·녹음·공연을 늘 함께했던 윤정희는 딸과 함께 파리 근교에서 요양 중이다. 백건우는 “윤정희에게 10년 전 시작된 알츠하이머 증상이 심각해졌고, 딸의 옆집으로 옮겨 간호를 받고 있다”고 했다. “안쓰럽고 안된 그 사람을 위해 가장 편한 환경을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백건우와 윤정희의 삶은 희한하게도 교차한다.

지난해 쇼팽 녹턴 녹음과 연주 반응이 좋았다.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소품으로 생각하던 작품이었다.  

“가볍게 생각했다. 예쁘다고만 보고. 하지만 쇼팽의 작품을 전부 놓고 봤을 때 녹턴이 가장 쇼팽을 잘 그린다. 가장 쇼팽다운 게 녹턴이다. 쇼팽이 친밀한 작곡가기 때문이다. 본인은 스스로 연주자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친밀한 데서 연인에게 속삭이듯 연주하는 것을 원했다. 큰 곡보다는 녹턴에서 진짜 대화가 이뤄졌다. 쇼팽 제자들의 기억을 남긴 자료가 아주 많은데 그걸 봐도 아주 친밀했던 음악가라는 걸 알 수 있다.”

내년은 슈만을 탐험한다 들었다.

“한 작곡가를 탐구하고 연주하고 나면 다른 작곡가 음악이 그렇게 울릴 수가 없다. 와서 닿고. 오래전부터 슈만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슈만 중에서도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곡보다는 자기 얘기 하는 곡을 찾았다. 큰 곡들은 다 빼고 첫 작품인 아베크 변주곡, 그다음에 ‘나비’ ‘어린이정경’ 부터 말년의 유령 변주곡까지 2시간 반짜리 프로그램을 내년 10월 무대에 올린다. 지난 여름은 완전히 슈만하고 보냈다.”

쇼팽이 친밀하다면 슈만은.

“모든 음악이 러브레터다. 슈만은 사랑을 찾아서 많이 헤맨 사람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상처가 너무 심했고 게다가 여동생이 자살을 했다. 사랑이 굉장히 필요한 사람인데 어머니는 반대였다. 변호사가 돼라, 공부를 해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때 완전히 어린 클라라가 천진난만하게 깔깔대고 웃다가 또 심각한 얘기를 하면 성숙한 여성이 돼서 이해했다. 그렇게 사랑이 시작됐다.”

지난해부터 쇼팽을 탐구했고 내년 슈만을 준비 중인 백건우는 이달 내한해 저소득층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이들의 소리에 자신감이 붙을 때까지 함께하고 싶다"는 그는 연주료를 받지 않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해부터 쇼팽을 탐구했고 내년 슈만을 준비 중인 백건우는 이달 내한해 저소득층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이들의 소리에 자신감이 붙을 때까지 함께하고 싶다"는 그는 연주료를 받지 않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작곡가의 삶에 늘 깊이 빠진 후에 연주한다.

“그 사람의 심리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슈만의 정신병을 발견한 의사가 이렇게 조언했다 한다.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건 사랑밖에 없다고, 사랑하는 여인을 찾으라고. 그때 클라라가 옆에 있었던 거다. 마지막엔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가 될까 봐 슈만이 스스로 짐을 싸서 병원에 입원했다. 의사가 가족들을 보지 않는 게 낫겠다고 해서 만나지 못했다. 딸이 병원에 찾아왔는데, 슈만이 문을 열었을 때 딸이 서 있으니 얼굴을 가리면서 돌아서서 가버렸다 한다.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예전엔 슈만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는데 이젠 달라졌다.”

처음에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유는 뭔가.

“내가 광적인 것을 못 받아들였다. 낭만주의의 핵심에 다가가면 죽음을 보게 되는데 그게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월이 지났기 때문일까.

“그런 것도 있겠지.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을 수도 있다. 앞으로 음악도 달리하고 싶다. 이때까지 음악하고 너무 싸워 왔던 것 같다. 발표를 해야 하고, 작품을 완성 시켜야 하고, 그런 스트레스가 심했다. 이제는 그냥 편하게 음악을 즐기면 좋겠다. 앞으로 웬만한 곡은 무대에서 악보 놓고 보고 치려 한다. 젊은 연주자들과 더 많이 만나 실내악 무대도 함께 하고 싶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

“인간의 생명이라는 게 한도가 있지 않나. 살아봤자 몇 년이나 살겠나. 언제까지 싸워가면서,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할까 싶다. 이제는 좀 인생을 즐기고 그랬으면 한다.”

윤정희 배우의 투병이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알츠하이머 증상이 10년쯤 전에 시작됐다. 우린 결혼 후부터 단둘이서만 살고 모든 것을 해결해왔다. 사람들은 나보러 혼자 간호할 수 없을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내가 제일 잘 아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본인이 너무 힘들어했다. 특히 연주 여행을 같이 다니면 환경이 계속 바뀌니까 겉잡지를 못했다. 여기가 뉴욕인지 파리인지 서울인지. 본인이 왜 거기 있는지.”

얼마나 심각했나.

“연주복을 싸서 공연장으로 가는데 우리가 왜 가고 있냐고 묻는 식이다.' 30분 후 음악회가 시작한다' 하면 '알았다' 하고 도착하면 또 잊어버린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묻고, '무대에 올라가야 한다'고 하면 '앙코르는 뭘 칠거냐'고 물어본다. 무대에 올라가기까지 한 100번은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식이었다.”

지금은 어떤 상황인가.

“올 초에 한국에 들어와 머물 곳을 찾아봤다. 도저히 둘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너무 알려진 사람이라 머물 곳을 찾기 쉽지 않았다. 그때 고맙게도 진희가 돌봐줄 수 있겠다 해서 옆집에 모든 것을 가져다 놓고 평안히 지낸다. 지금은 잘 있다.”

2007년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연주하던 때의 백건우 윤정희 부부. 딸인 바이올리니스트 진희씨가 "음악을 할 때 아빠보다 엄마가 더 신경쓰였다"고 할 정도로 윤정희 배우는 클래식 음악광이다. [사진 중앙포토]

2007년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연주하던 때의 백건우 윤정희 부부. 딸인 바이올리니스트 진희씨가 "음악을 할 때 아빠보다 엄마가 더 신경쓰였다"고 할 정도로 윤정희 배우는 클래식 음악광이다. [사진 중앙포토]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 출연했다. 병의 증세가 잘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작품인데 참 이상하지 않나. 그 역할이 알츠하이머 앓는 역할이라는 게 그게 참…. 그때 배우로서 자존심 때문에 출연했는데 긴 대사는 써놓고 읽으며 하고 그랬다. 그 뒤에도 하나 더 영화를 하고 싶어서 시나리오도 같이 보고 구상도 했는데 잘 안되더라. 상 받으러 올라가기도 쉽지 않았으니.”

부인의 병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어땠나.

“아침에 일어나면 접시에 약을 골라서 놓고, 먹을 걸 다 사와서 먹여주고 했다. 그 사람이 요리하는 법도 잊어서 재료를 막 섞어놓고 했으니까. 밥 먹고 치우고 나면 다시 밥 먹자고 하는 정도까지 됐었다. 딸을 봐도 자신의 막내 동생과 분간을 못했다. 처음에는 나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내가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아무리 영화를 봐도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질 않을 정도였다.”

딸 진희(43)씨는 “엄마는 본인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알지만 병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으시는 상황이다. 두분 사이가 너무 각별했기 때문에 누군가 도와줄 틈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음악을 공부하고 오케스트라에 들어가 연주 활동을 하고 있다. “평생 독주자로 산 아버지와 나는 완전히 다른 음악 인생을 걷는다”고 했다. 윤정희 배우의 증세를 묻자 진희씨가 자세한 설명을 맡았다.

“나를 못 알아볼 때가 정말 힘들었다. 내가 ‘엄마’ 하면 '나를 왜 엄마라 부르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내가 ‘여기 내 턱밑에 바이올린 자국 봐봐. 엄마 딸 바이올린 했잖아. 이 자국이 있으면 딸인 줄 아세요’ 했다. 전세계로 여행을 너무 많이 다니면서 시차와 환경이 바뀌는 게 이 병에는 가장 안 좋다 한다. 지금은 엄마가 머무는 곳에 엄마가 익숙한 사진과 십자가, 옛날 잡지 같은 것을 가져다 놨다. 5월부터 요양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제 많이 편해지셨다.”

부부가 늘 함께했는데.

“요새도 가끔 물어본다. 아빠가 어디 갔는지 물어서 연주 여행 갔다 하면 함께 간다고 빨리 택시를 부르라고 했다. 습관이 된 거다. 아빠가 아까 얘기한 슈만처럼, 아빠를 만나면 엄마가 더 불안해졌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괜찮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창문 밖의 작은 호수를 보면서 행복하게 생활한다.”

백건우는 요즘 아내에게 갈 때마다 발코니에 꽃이나 화분을 하나씩 올려놓고 온다고 했다. “올 초 스페인에 연주 여행을 같이 간 게 마지막이었다. 이제 혼자 다니려니 적응이 쉽진 않다”고 했다. “내년 슈만 연주가 어쩌면 본인의 클라라인 윤정희 배우에 대한 헌정이 아니냐”고 하자 “그럴 수도 있겠다. 그도 참 로맨틱한 사람”이라고 답했다.

윤정희는 문희, 남정임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로 60년대를 풍미했던 영화배우다. 1965년 오디션에서 발탁돼 67년 ‘청춘극장’ (감독 강대진)으로 데뷔한 이후 한 시대를 이끌었다.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시’에서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중학생 외손자와 함께 살아가며 시를 쓰는 할머니 미자 역을 맡았다.

아버지 백건우씨에게 외투를 입혀주는 딸 진희씨. 파리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부모님과 늘 이야기했던 한국어에도 능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아버지 백건우씨에게 외투를 입혀주는 딸 진희씨. 파리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부모님과 늘 이야기했던 한국어에도 능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마지막으로 진희씨가 어머니의 병을 세상에 밝히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엄마는 요즘도 ‘오늘 촬영은 몇시야’라고 물을 정도로 배우로 오래 살았던 사람이다. 그만큼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사람이다. 이 병을 알리면서 엄마가 그 사랑을 다시 확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엄마에게 사랑의 편지를 많이 써줬으면 좋겠다. 지금 엄마에게 그게 정말 필요하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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