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코노미스트] 은행이자 0% 시대, 내 돈은 어디로

중앙일보

입력

은행 역마진 우려에 기업 뭉칫돈 꺼려… 현금 선호로 5만원권 환수율 떨어져

은행 예금금리가 속절없이 떨어지면서 이자 0% 시대가 열렸다. 한국은행이 지난 10월 16일 기준금리를 1.50%에서 1.25%로 내리면서다. 신한은행 영업점에서 취급하는 1년 만기 정기예금 기본금리는 연 0.9%로 0%대에 진입했다. 연 0%대인 적금도 등장했다. Sh수협은행의 ‘스마트one적금’ 1년 만기 기준 기본금리는 연 0.9%다. 이제 1억원을 금리 0.9%인 예금에 넣어두면 1년 후 받는 이자는 90만원에 불과하다.

해외 눈 돌리는 한국판 와타나베 부인 늘어

이자 0%대 시대로 접어들면서 경제 주체들은 고민에 빠졌다. 대출이 많은 가계는 이자 부담이 다소 줄겠지만, 전체 가계 대출의 30%에 해당하는 고정금리 대출자에겐 남의 얘기다. 이자로 생활하는 은퇴자는 물론, 노후 자금 마련이 절실한 40~50대, 자산을 늘려야 하는 20~30대 모두 초저금리의 덫에 빠지게 됐다. 기준금리가 0.25% 내리고, 예금금리가 0.2~0.5% 내린다는 의미는 생각보다 큰 충격이다. 특히 이자가 주요 소득인 노년층에게 타격이 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가계 이자소득은 30조5795억원이다. 1년 전보다 2.2% 줄었고, 1995년(29조7340억원)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자 소득 30조원에서 예금금리가 0.5%만 빠져도 가계 소득은 1500억원 정도 줄어든다.

“0% 금리시대엔 연 4~5% 수익도 과분”

0%대 예금금리가 가져올 사회·경제적 파장은 만만치가 않다. 먼저 금융권의 근심이 커지고 있다. 특히 예대마진이 주요한 수입원인 시중은행은 고객예금 이탈이 걱정거리다. 여기에 예금으로 들어오는 기업의 뭉칫돈도 골칫거리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기업 예금이 들어오면 예금 이자가 운용 이자보다 더 높아 역마진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보험 업계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많은 보험사가 고객에게 약속한 고리의 이자보다 자산을 운영해 얻는 수익이 낮아지는 역마진 공포에 떨고 있다. 일본이 그랬다. 이와 달리 상대적으로 이자를 많이 주는 상호저축은행이나 신용협동조합·새마을금고 등은 시중은행보다 높은 금리를 내세워 고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실제로 지난 9월 JT저축은행이 선보인 ‘JT 점프업 저축예금’은 하루만 맡겨도 아무런 조건 없이 기본금리 연 2.1%를 제공한다. 0.1%라도 이자를 더 받으려는 수요는 제1·2 금융권 간 출혈 경쟁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0%대 이자로 개인투자자의 투자 성향도 이원화될 것으로 보인다. 예금·적금·채권·금 등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이어지겠지만, 조금이라도 수익률이 좋은 기업어음(CP)이나 해외 주식·채권·부동산 등 위험자산으로 돈이 몰릴 가능성도 크다. 실제로 인컴형(정기적으로 현금 수익을 낼 수 있는 자산) 펀드와 해외 채권 펀드에 돈이 몰리고 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10월 30일 기준 최근 6개월 동안 국내에 설정된 105개 인컴형 펀드에는 1조2742억원의 돈이 들어왔다. 192개 채권형 펀드에 3조9382억원이 몰렸다. 박승안 우리은행 TC프리미엄강남센터장은 “국내 금리도 낮아지면서 저금리를 피해 해외 채권이나 부동산 자산에 투자하는 한국판 와타나베 부인이 다시 늘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저금리 기조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 속에 퇴직연금이나 연금저축 같은 장기 투자 상품에 관심을 갖는 투자자도 늘고 있다. 특히 이자가 낮으니 세금이라도 줄여보자는 심리가 확산하면서 절세 상품이 더욱 인기를 끌 전망이다. 투자자들의 기대 수익률은 갈수록 낮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조재영 웰스에듀 부사장은 “5% 금리 시대엔 10%의 수익률을 기대했다면, 0% 금리 시대엔 4~5% 수익만 내도 과분하다”고 설명했다.

현금 선호 현상도 눈에 띈다. 이자는 바닥이고, 자금을 운용할 곳도 마땅치 않으니 현금을 갖고 있는 게 낫다고 보는 것이다. 이상 징후를 보이는 5만원권 환수율도 현금 선호 현상을 드러내는 한 단면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5만원권 환수율은 올 1~7월까진 70%가 넘었지만 8월에는 42.2%에 그쳤다. 금융가에서는 현금 보유 실익이 더 크다고 보는 부자가 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박승안 센터장은 “은행 대여 금고에 5만원권을 쌓아두거나 현금 상속을 문의하는 고객이 이전보다 늘었다”고 설명했다.

초저금리에 ‘좀비기업’ 연명 부작용

초저금리를 활용해 회사채를 발행하려는 기업도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9월 국내 기업의 일반 회사채 발행 규모는 2조8400억원으로 전월 대비 76.8% 늘었다. 재계에서는 회사채의 평균 금리가 떨어지면서 기업들이 낮은 금리에 회사채를 발행해 비싸게 빌린 부채를 갚으려는 것으로 분석한다. 금융권에 미치는 영향도 작지 않다. 기업들이 싼 금리로 회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직접 조달하면, 은행은 가계나 중소기업 대출에 주력하게 되고 제2금융권과 경쟁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정부나 한은의 바람과 달리 예금금리 0% 시대가 오히려 돈의 흐름을 막을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이른바 ‘유동성 함정’이다. 유동성 함정은 시장에 현금은 넘치는데, 기업의 투자와 가계 소비자 늘지 않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초저금리로 시중에 돈은 넘치는데, 정작 설비투자나 고용·소득·소비는 늘지 않는 것이다. 이자가 낮으니 소비가 늘고, 기업이 투자를 늘릴 것이라는 이론이 통하지 않을 경우, 오히려 0%대 이자 시대는 자금의 단기 부동화를 부추기고 소비 위축과 경기 침체로 이어질 수도 있다.

낮은 금리로 자금 조달이 쉬워지면서 기업 투자가 늘 것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좀비기업’으로 불리는 한계기업이 연명하는 부작용을 걱정하는 시각도 있다. 과거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기업 구조조정이 늦춰지면서 기업 부실이 심화돼 장기적으로 한국 경제에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계기업은 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외부 회계감사를 받는 기업 3236곳이 한계기업으로 집계됐다. 한계기업은 2017년 3112개로 전체 외감기업 중 13.7%였으나, 지난해는 이 비중이 14.2%로 커졌다.

김성희 기자 kim.sunghe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