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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붓을 놓지마" 71년생 이정은이 82년생 김지영에게

중앙일보

입력

평안한 오후, 97x130.3cm, 장지에 채색, 2019. [사진 이화익갤러리]

평안한 오후, 97x130.3cm, 장지에 채색, 2019. [사진 이화익갤러리]

어느 광고에선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엔 당연한 것이 없다'고. 지금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내일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고.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전시장에서 이정은(48) 작가의 그림을 보면서 떠오른 말이다. 한국에서 여성 작가로 산다는 것,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살림하며 계속 그림을 그린다는 것, 그 일이 그렇게 당연한 일은 아니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

이정은 작가 개인전 '열매 맺는 계절' #장지에 색 쌓아 그린 정물, 책가도 #한국화로 풀어낸 고즈넉한 일상 #"언젠간 내 시간이 온다 믿어요"

최근 군대에 있는 작가의 아들이 휴가를 나와 한창 화제인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봤단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화를 보며 엄마가 떠올랐어. (힘들었지만) 엄마는 꿈을 접지 않았네…". 자신의 그림이 걸린 전시장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며 그는 맑게 웃었다.

"작가로서 제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장점은 항상 그리고 싶었다는 것이에요.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도 붓을 놓은 적은 없었어요. 틈만 나면 집 안에 있는 칫솔과 운동화, 그리고 아이가 가지고 놀던 레고 조각까지 그렸어요. 뭐든 그리고 싶었거든요." 

이정은 작가의 개인전 '열매 맺는 계절'이 서울 삼청동 이화익갤러리에서 6일부터 열리고 있다. 2016년부터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 작품을 선보이며 주목받은 한국화가다. "쌀을 씻고 밥을 짓듯이, 그리고 일기를 쓰듯이 날마다 그렸다"는 그의 작품들이 조심스럽게 세상과 만나고 있다.

고즈넉한 시간 담은 현대 책가도  

이정은, '평화로운 서가', 130x162cm, 장지에 채색, 2019. 사진 이화익갤러리]

이정은, '평화로운 서가', 130x162cm, 장지에 채색, 2019. 사진 이화익갤러리]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책들,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 화병이 꽂힌 꽃, 접시 위의 과일들…. 누군가의 고즈넉한 서재를 연상시키는 그의 그림 풍경이다. 조금 더 들여다보니 한국 전통 그림 책가도(冊架圖)와 많이 닮았다.

책가도는 책장과 책을 중심으로 문방구와 골동품, 꽃과 기물 등 서재의 여러 가지 일상용품을 담은 정물화풍의 우리 옛 그림.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그 방주인의 취향은 물론 당대의 사회 양상까지 드러냈다. 이정은 작가의 책가도엔 자연스럽게 현재의 시간이 담겼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책과 차를 마주하고 싶은 시간, 고요하게 내면에 집중하고 싶은 시간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마음을 그린 듯하다. 그것은 작가의 마음이기도 했다. 누구의 아내, 혹은 엄마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그림 그리는 사람 이정은'으로 몰입하고 싶었던 마음.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작가 노트에 "나만의 공간에서 오롯이 그리기에 집중하는 것은 일상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고, 복잡하고 어수선한 걱정거리나 문제에서 잠시 놓여나게 한다"며 "이때 나는 내게 주어진 여러 가지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는다. 내게 그리기의 의미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썼다.

색을 쌓고, 시간을 쌓았다  

이정은, '이음', 100x70cm,, 장지에 채색, 2017.[사진 이화익갤러리]

이정은, '이음', 100x70cm,, 장지에 채색, 2017.[사진 이화익갤러리]

이정은, '열매 맺는 계절', 105x75cm,장지에 채색, 2017.[사진 이화익갤러리]

이정은, '열매 맺는 계절', 105x75cm,장지에 채색, 2017.[사진 이화익갤러리]

그가 집중한 것은 전통적인 한국화 기법으로 장지에 차곡차곡 물감으로 "색을 쌓으며 그린" 일상의 흔적들이다. 그는 "무엇을 그릴까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고 했다. "반찬거리를 사는 길에 만나는 햇과일, 제철 과일, 산책 중 발끝에 차이는 솔방울 등 내 눈이 닿고,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그려보고 싶기 마음이 늘 충만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릴까도 고민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감을 겹칠하고 대상에게 맞는 붓을 골라 그 모양새를 찬찬히 좇다보면 사물들의 표정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물들이 자기 표정을 드러내도록 붓질을 쌓아가는 것, 그게 자기 일이란다.

"마음에 드는 색이 나올 때까지 붓질을 반복하며 색을 쌓아 올려요. 처음엔 투명하게 색들이 겹겹이 올라가며 독특한 깊이감을 만들죠."  

고민 끝에 찾은 나의 길 

서울예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세심한 붓끝으로 줄곧 정물을 그려왔다.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눈앞의 사물을 보고 그대로  그리는 이런 작업이 "내세울 만한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에 고민한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결론은 소박했다.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고, 내게 맞는 일, 즐겁게 할 수 있는 작업을 하자."

그렇게 마음먹은 후엔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그리기에 몰입하는 시간을 즐겼다. 마치 약국을 운영하는 사람처럼 정해진 시간에 작업을 시작해 붓질을 반복하는 시간이 그에겐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종이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시간을 즐겨요. 고양이를 어디에 앉힐까, 화병을 어디에 놓을까 궁리하고, 마지막에 낙관 찍는 자리를 정하는 것까지 모든 과정이 즐거워요."

그의 작품에 관심을 보인 갤러리의 도움으로 2016년 KIAF 전시장에 자신의 그림이 처음 걸렸을 때 "작가들 작품 사이에 학생 그림이 끼어있는 것 같아서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는 그는 "혼자서 그리던 그림이 세상에 나와 누군가와 소통했다는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작품은 첫선을 보이자마자 팔려나갔다.

계속 그릴까 말까 고민하는 이에게  

서울 삼청동 이화익갤러리에서 개인전 '열매 맺는 계절'을 열고 있는 이정은 작가. [사진 이화익갤러리]

서울 삼청동 이화익갤러리에서 개인전 '열매 맺는 계절'을 열고 있는 이정은 작가. [사진 이화익갤러리]

요즘 그는 후배 작가들에게 "곧 너의 시간이 온다"며 다독인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일기 쓰듯이 그리지만, 때가 되면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온다는 얘기다. 그러니 끝까지 붓을 놓지 말라고.

동양화가인 엄마(노숙자 화백)도 그랬단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의 의지가 대단하셨다"며 "삼남매를 키우고, 시부모님까지 모시면서도 붓을 놓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의 엄마에게, 그리고 그에게 그림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는 "내가 들인 시간과 정성만큼 그림은 자신의 모양새를 드러내 준다"며 "그것은 내게 가장 정직하고 반듯한 친구"라고 했다.
전시는 2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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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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