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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나쁜 정치가 경제 지배하면 경제발전은 불가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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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77ㆍ현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은 특이한 관료다. 군사정부의 고도성장기, 정부가 시장을 압도했던 시기에 정부에 몸담았으면서도 철저한 ‘시장주의자’가 됐다. ‘환란 주범’으로 몰렸지만 무죄 판결을 통해 명예를 회복한 그는 외환위기 역시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큰 원인이 됐다고 본다. 그는 지금도 사무실에 ‘시장으로의 귀환’이란 표어 액자를 걸어두고 있다. 그런 그가 현재 한국경제 위기의 뿌리를 정부가 시장주의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50년의 공적 삶을 담았다”는 회고록 『명(明)과 암(暗) 50년―한국 경제와 함께』발간을 앞둔 그를 5일 인터뷰했다.

김인호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 #한국경제 구조적 위기 심각 #시장 못 믿고 소비자 선택 제약 #세계 기업 유치 경쟁...한국만 반대 #'50년 공적 삶' 담은 회고록 발간

김인호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이 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김인호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이 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한국 경제가 위기인가.  
“위기다. 경기 사이클 측면에서 성장률 하락 등은 언제든지 극복가능하다. 첫째 문제는 추세다. 장기적으로 오르는 추세냐, 내리는 추세냐인데 지금 추세적으로 내리막길에 있다. 둘째는 구조다. 나는 경제를 숫자로 보지 않는다. 숫자는 실체의 그림자다. 경제의 3주체인 정부, 기업, 소비자가 제 역할을 다하는 구조가 되면 경제는 잘 되게 돼있다. 지금 그런가.”
무슨 말인가.  
“우선 정부가 소비자 선택을 제약하는 것이 본질적 문제다. 일요일에 대형마트 영업을 못하게 한다거나, 아파트 구입을 규제하는 거다. 최근의 ‘타다’ 사태도 그렇고. 기업에 대해서도 경쟁제한행위나 독점을 막으면 되지 잘해서 성장하는 것을 벌 주면 되나. 자산 규모가 5조원이 되는 순간 각종 규제가 첨가된다. 잘하면 칭찬받고, 못하면 야단맞는 인센티브와 페널티, 그게 경제의 기본 아닌가. 그걸 통해서 기업은 잘해야겠다, 세계 시장에서 싸워 이겨야겠다는 의욕을 갖게 된다. 그걸 충족시켜주지 못하는데 무슨 동기로 기업활동을 하나. 지금 세계는 어떻게 하면 다른 나라보다 더 좋은 기업 환경을 만드냐는 경쟁을 하고 있다. 법인세만 해도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훨씬 많이 물린다. 왜 외국 기업들이 한국으로 오겠나. 글로벌 트렌드와 전혀 반대로 가고 있다.”

그는 주52시간제, 최저임금 급등, 정규직화 등도 시장과 역행하는 사례로 꼽았다. 정규직화만 해도 고용과 해고가 자유로워야 고용을 늘릴 수 있는데, 정년까지 고용을 유지해야 하는 부담에 고용을 꺼리게 되고 그것이 양질의 일자리 감소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왜 이런 정책이 나온 것일까.  
“정부가 시장을 못 믿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의 기능을 믿으면 근로시간, 임금 등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다. 토요일 휴무제 역시 제도 때문이 아니라 경제가 좋아지면서 정착한 것이다. 현 정부는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정부가 어떻게 그렇게 하나. 저마다 다른 국민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나. 발상이 잘못 됐다. 그런 발상의 대전제는 정부가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도덕적이라는 걸 전제한다. 그런 정부가 지구상에 존재한 적이 있나. 하이에크는 이런 생각을 ‘치명적 자만’이라고 했다.”
‘시장 실패’가 정부 개입을 부른 측면은.
“과거 정부도 시장에 충실한 정책을 쓰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나는 박근혜 정부때도 그런 비판을 많이 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다. 현 정부가 시장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시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제도를 통해 이념적으로 접근한다. 주52시간제나 정규직화 이슈가 나왔을때 시장 원리를 크게 깨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해야 한다는 얘기를 한 사람이 정부에 있었나. 시장의 긍정적 기능이 경제문제 해결 수단이라는 걸 부정하면 시장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책에서 “우리나라와 우리 경제가 외환위기로부터 충분한 교훈을 얻는데 실패했다”고 썼다. 외환위기는 달러가 부족해서 온 것이 아니고 위기가 왔기 때문에 달러가 빠져나가 부족해졌다는 점, 달러 이탈은 한국경제에 대한 국제금융계의 신뢰 저하에서 비롯됐다는 점, 따라서 외환위기의 본질은 ‘신뢰의 위기’였다는 것이 그가 강조하는 내용이고, 많은 전문가들도 동의한다.

무엇을 배우지 못했나.  
“당시 정부가 총력을 기울인 금융개혁의 좌절은 정치 때문이었다. 당시는 대선의 해였다. 금융노조가 반대한다고 여당도, 야당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 대한 반성 조차도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한 개혁은 우리가 다 준비해놓았던 것이고, 우리 힘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치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게 정치적 고려였다. 당시 김영삼(YS) 대통령에게 김대중(DJ) 후보와 전화해 금융개혁법안 처리 협조를 당부해 달라고 세 번이나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훗날 YS는 ‘DJ가 선거를 앞두고 있고 노조가 그래쌓고 하는데, 내가 전화 한다고 내 말을 듣나? 김 수석은 정치를 안해봐서 모르는데, 선거 때가 되면 정치인 눈에는 표밖에 안 보인데이’라고 하더라.”
김인호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의 서울 역삼동 사무실에는 '시장으로의 귀환'이라는 표어가 걸려 있다. 서예가 배종승 씨의 글씨이며, 1997년 2월 28일 김 이사장이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취임할 때부터 사용했다. 강광우 기자

김인호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의 서울 역삼동 사무실에는 '시장으로의 귀환'이라는 표어가 걸려 있다. 서예가 배종승 씨의 글씨이며, 1997년 2월 28일 김 이사장이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취임할 때부터 사용했다. 강광우 기자

그의 책엔 “문제는 정치야, 바보야!”라는 대목이 나온다. “나쁜 정치가 경제를 지배하는 한 경제발전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한국에선 특히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는 외환위기의 객관적이고 편견없는 규명보다 희생양 만들기와 자기 사람 감싸기에 몰두했던 과거 정치권의 행태가 오늘의 적폐청산과 편가르기의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또 이런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의 얘기를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만난 사람=이상렬 경제 에디터, 정리=강광우 기자 kang.kwang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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