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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하다] 6년차 조사원의 고백 "2016년 총선 때 여론조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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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보다 두 배 많은 보수를 주는 것부터 수상했어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습니다. 여론조사가 아니라 여론조작을 하라고 시키더군요.”

여론조사 경력 6년 차 조사원인 김성진(41·여, 가명) 씨는 2016년 총선 때 한 중소 여론조사업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참여했다 황당한 일을 겪었다. 외부엔 RDD(Random Digit Dialing: 기계가 생성하는 무작위 번호로 전화 걸기)를 활용한 조사인 것처럼 속이고, 실제론 업체에서 미리 확보해 둔 명부를 활용해 여론조사를 하라는 요구였다.

당시 본인을 슈퍼바이저(관리인)라고 소개한 30대 남성은 김 씨에게 “이른 시일 안에 정확한 여론을 알아보기 위해 불가피한 방법을 쓰게 됐다”며 “문제가 생길 일도 없지만, 문제가 생겨도 내가 다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김씨가 슈퍼바이저에게 건네받은 파일엔 경기도 A 시 거주자 3000명의 휴대전화번호를 비롯한 개인정보가 빼곡히 담겨 있었다. 그 중엔 붉은색으로 따로 표기한 ‘우선 조사대상’도 있었다. 심지어 슈퍼바이저는 김 씨에게 “DB가 있으니 출근하지 않고 집이나 원하는 장소에서 따로 조사한 뒤 결과만 정리해서 줘도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 씨는 나중에 문제가 될 것 같아 결국 조사 도중에 일을 그만두고 나왔다.

김 씨는 “이 업체가 특정 후보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조작하려고 이런 꼼수를 썼던 것 아니겠냐”며 “그 전까진 실시간 감청을 통해 조사 과정 자체를 모니터링 하는 대형업체에서만 일했기 때문에 이렇게 엉터리 조사를 하는 곳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여론조사는 사실상 ‘감시 없는 권력’이다. 공적 영역에서의 영향력이 갈수록 막강해지고 있지만 이를 견제·감시하는 장치는 턱없이 부족하다. 조사원 선발‧교육부터 조사를 진행하는 방식과 결과 추출까지 모든 과정이 ‘깜깜이’로 진행된다. 민간 업체라는 특성 때문이다.

‘김영란법’의 적용대상도 아니다. 조사 결과의 왜곡을 청탁하는 외부의 유혹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구조다. 한 여론조사 업체의 고위 간부는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결과를 부풀리거나 특정 방향으로 여론을 왜곡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업체의 도의적 책임만 믿고 여론조사가 공정할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많은 업체에서 한 달에 수십 건의 저품질 여론조사가 쏟아진다”고 말했다.

이용구 중앙대 응용통계학과 명예교수는 “각종 정치‧사회 관련 조사에서 왜곡‧조작 현상이 발생하고 있지만 아무런 통제 장치가 없다”며 “조사업체들은 그 영향력에 합당한 엄격한 법적‧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선거철 ‘떴다방’ 조사업체, 부실·왜곡조사의 온상

특히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있어 여론조사의 공정성은 더욱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선거철엔 지역구별로 여론조사 수요가 급증하는 데다, 여야 정당들이 ‘여론조사 공천’을 광범위하게 실시하기 때문에 여론조사 업체들이 대목을 맞는다.

선거철만 되면 ‘떴다방’처럼 신생 조사 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가 선거만 끝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건 여의도의 흔한 풍경이다. 그러나 이들 신생 업체들은 대부분 저가의 ARS 조사를 시행하는 데다 표본추출 과정이 엄밀하지 않아 조사의 신뢰도가 낮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자유한국당 관계자는 “2014년 지방선거 때 3000만원을 주기로 하고 여러 번 여론조사를 의뢰했는데 투표 전날까지 내가 크게 우세한 것으로 나와 방심했다가 결국 졌다”며 “화가 나서 잔금을 주지 않았는데 업체가 아무 말도 못 하더라”고 말했다.

여론조사, 어떻게 활용되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여론조사, 어떻게 활용되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여론조사가 민주주의의 공식 절차로 편입된 여론조사 경선은 다른 나라에선 유례가 드문 한국적 현상이다. 2002년 노무현-정몽준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에 여론조사가 활용된 이래 여론조사는 공천 시즌마다 전가의 보도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여론조사 경선이 과연 민주주의 원리에 맞냐는 논란은 끊이질 않는다. 민주당 관계자는 “여론조사는 연령·성별 등 가중치를 반영하기 때문에 1인이 1표의 가치를 갖는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상대당 지지자가 일부러 약체 후보를 선택하는 ‘역선택’ 논란도 벌어질 수 있다. 특히 여론조사의 특성상 존재할 수밖에 없는 오차범위를 무시하는 것도 문제다.

가령 2014년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의 오산시장 경선에선 1위 후보가 40.90%를 얻어 2위 후보(40.65%)를 고작 0.25%포인트 차이로 제쳐 논란이 됐다. 오차범위 이내의 격차는 우월을 논할 수 없다는 게 통계학의 기본이다. 하지만 각 정당은 행정적 편의를 위해 조금이라도 숫자가 높은 후보의 승리를 인정한다. 그러다 보니 여론조사 경선이 벌어지면 조금이라도 지지율을 높이려고 탈법 행위를 시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대법원, 여론조사 경선 공식 투표로 인정…총선 앞두고 파장

이와 관련해 최근 대법원이 여론조사 경선을 공식 투표로 인정하는 판단을 내려 여의도에 파문이 일고 있다. 대법원 형사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지난달 31일 선거 후보자가 여론조사에 부정하게 개입한 경우 이는 공직선거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놨다. 지난해 6‧13 지방선거 때 자유한국당 대구시장 후보 경선에서 불법 여론조사를 주도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 등으로 기소된 이재만 전 한국당 최고위원 사건에서다.

이 전 최고위원은 당시 경선을 앞두고 특별보좌단과 지인, 친인척을 동원해 1147대의 유선전화를 개설, 휴대폰 하나로 착신 전환하고 이를 통해 여론조사를 조작한 혐의다.

이후 진행된 재판에서 쟁점은 여론조사를 방해한 행위를 선거 투표 방해 범죄로 처벌할 수 있는지였다. 2심 재판부는 “무작위로 건 전화 여론조사에 응답한 것은 투표권이 있는 행위로 볼 수 없다”고 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뒤집었다.

대법원은 투표를 ‘후보자에 대한 선택의 의사표시’로 규정하고 여론조사 경선도 투표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동안 암암리에 이뤄지던 착신전환 등 여론조사 조작에 대해선 업무방해 혐의만 적용됐지만, 앞으론 선거법 위반 혐의가 적용돼 보다 엄중한 처벌이 이뤄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론조사도 투표? 1, 2, 3심 재판부 논리.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여론조사도 투표? 1, 2, 3심 재판부 논리.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미 더불어민주당은 21대 총선(2020년 4월 15일) 당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 룰로 일반 국민 여론조사(안심번호) 50%에 권리당원 투표 50%를 더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자유한국당 경선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여론조사가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대법원이 여론조사 경선을 투표행위로 인정한 만큼 여론조사 경선 결과를 놓고 후보자 간 여론조사 왜곡 시비가 격화될 소지가 커졌다”고 전망했다.

이렇듯 높아진 여론조사의 위상에 비해 내부 검증 또는 모니터링 시스템은 허술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조사업체 임원은 “업계 상위권에 있는 업체들은 그나마 내부 검증팀이 있지만, 비용의 한계 때문에 철저히 검증할 수 없다”며 “가령 응답자가 1번이라고 답했는데 조사원이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3번으로 마킹해도 내부에서 걸러내기 힘들다”고 털어놨다.

불법조사 걸려 처벌받아도 1년 뒤에 재개업 가능

조사원의 전문성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현재 조사원에 대한 교육·관리는 100% 업체 몫이다. 업체가 아무런 사전교육 없이 조사원을 선발해 조사 업무를 맡겨도 이를 제재할 수단이 없다.

조사원 경력 4년 차인 박주희(37) 씨는 “조사원 업무를 처음 시작할 때 ‘질문지를 그대로 읽고 답변을 정확하게 기재해야 한다’는 언급 외에 특별한 교육을 받은 적 없다”며 “특별한 자격이나 능력이 필요치 않기 때문에 진입장벽 자체가 없고 이런 탓에 부업으로 조사원 일을 하거나 전업주부가 아르바이트 형태로 업체 의뢰를 받아 조사를 시행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관계자는 “조사원 선발은 민간업체인 여론조사 업체의 경영과 관련된 사항이기 때문에 여심위 차원에서 개입할 여지가 없다”며 “조사원에 대한 교육 역시 업체가 자율적으로 시행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들의 전문성을 직접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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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는 2017년 5월 저품질 여론조사를 양산하는 업체의 난립을 막기 위해 ‘선거 여론조사 기관 등록제’를 시행했다. 인력·규모 등 등록 요건을 충족한 업체에 한해 공표·보도용 선거 여론조사를 할 수 있도록 제한한 조치다. 이에 따르면 ▶전화면접 조사 시스템이나 ARS 시스템 ▶사회조사 분석사 자격증 보유자 등 전문인력 1명을 포함, 3명 이상의 상근 직원과 사무실 ▶10회 이상의 조사실적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학계와 업계에선 이런 자격 요건이 너무 느슨해 오히려 ‘떴다방’ 업체의 난립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양훈 칸타코리아 이사는 “장벽이 너무 낮아 오히려 군소 업체들이 요건만 갖춘 뒤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되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불법 선거 여론조사 관련 혐의로 100만원 이상의 벌금형을 선고받을 경우 등록이 취소되지만 1년만 지나면 다시 업체 등록을 허용하는 규정도 문제다. 2년 단위로 총선·지방선거가 번갈아 실시되는 탓에 여론조사 관련 불법 행위를 해도 다음 선거에서 얼마든지 업체를 다시 등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리·규제 맡은 여심위, “녹음 파일 일일이 검증 불가능”

이런 허점을 메우기 위해 자유한국당 이종배 의원은 지난 1월 등록이 취소된 선거 여론조사 기관의 재등록 요건을 강화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여론조사 관련 규정 위반에 따른 형벌·과태료의 정도에 따라 재등록 제한 기간을 1년에서 4년까지 세분화하는 것이 골자다.

여론조사의 객관성·신뢰성 확보를 위해 2014년 출범한 여심위의 관리·규제 역시 사후약방문식 대처에 그치고 있다. 여심위의 선거 여론조사 모니터링 자체가 조사 과정 자체를 검증하는 것보단 조사 결과를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다.

주요 선거별 여론조사 불법행위 적발건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주요 선거별 여론조사 불법행위 적발건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업체는 의무적으로 여론조사 과정을 녹음해 보관해야 한다. 하지만 여심위는 “민원·신고가 들어오지 않는 한 녹음 파일을 검증해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졌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여론조사 결과를 왜곡·조작하고 거짓·중복응답을 유도하는 등의 불법 행위가 적발돼도 형사처분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드물다. 20대 총선에서 여심위는 207건의 여론조사 불법행위를 적발했지만, 이 중 고발되거나 수사 의뢰된 경우는 21건에 불과했다. 나머지 불법행위에 대해선 경고(98건)·준수촉구(61건)·과태료(16건)·시정명령(3건) 등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여론조사의 파급력을 무시할 수 없다면 국가가 나서서 관리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개선이 어렵다면 민간에만 맡기지 말고 여론조사 심의 기구를 만들어서 모든 여론조사를 심의·관리해 공정성을 담보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신기현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사전 여론조사와 실제 선거 결과를 비교해 공시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업체별 신뢰도 평가를 할 수 있고 업체도 책임감을 갖게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탐사보도팀=김태윤·최현주·현일훈·손국희·정진우·문현경 기자 pin21@joongang.co.kr

“여론조사 공천은 가장 무능한 정치”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지난 8월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지난 8월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론조사 공천은 정당 민주주의에 반한다. 정치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내년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이 후보 선출을 위한 여론조사 경선을 추진하면서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박용진 의원은 “여론조사에 편승해 공천하는 것은 가장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정당 정치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당 공천에 또 여론조사 결과를 적용하기로 했다.

“지도부는 당의 노선과 정체성에 맞는 후보를 찾아 공천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정당에 대한 신뢰도가 워낙 낮으니까 대안으로 여론조사를 해 뽑는 지경이다.”

- 그게 왜 문제인가.

“여론조사가 과학적 방식이 아닌 경우가 많다. 모집단 역시 너무 적고 조작의 우려도 크다.”

- 대안은 뭔가.

“여론조사는 말 그대로 여론의 추이를 보는 참고용으로 써야 한다. 정당의 후보자를 정하는 주요 수단이 되면 안 된다.”

또 정치신인들 사이에선 “여론조사 경선은 일방적으로 현역 의원에게 유리한 방식”이란 비판이 제기된다. 최홍재 신문명연대 대표는 “여론조사 전화가 오면 후보 중 들어본 인물의 이름에 귀가 기울여지게 마련”이라며 “이름이 알려진 현역 의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룰”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20대 총선에서 여야 지역구 현역의원의 여론조사 경선 생환율은 평균 70%가 넘었다. 장성철 공감과 논쟁 정책센터 소장은 “전화 여론조사는 선호 투표 적 경향이 강하다”며 “후보자의 지역 공헌도 보다는 지명도나 그럴싸한 경력에 현혹되기 쉽다”고 지적했다.
탐사보도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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