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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말들에게 물어봐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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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주 검찰이 타다를 기소했을 때, 나는 이 정부의 불통과 무능도 함께 기소됐다고 생각한다. 타다는 ‘한국형 우버’로 불리지만, 언감생심이다. 우버처럼 개인 차량을 공유해 쓰는 게 아니라, 렌터카와 대리기사를 결합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형적 형태다. 현행법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 불법과 합법 사이에서 줄타기한 결과다. 다종다양한 서비스와 빅데이터의 산실로 불리며 기업가치 100억 달러를 넘어선 우버·디디추싱·그랩에 비하면 창피한 수준이다. 이걸 우리는 한국형 우버, 공유경제의 씨앗이라고 부른다. 검찰의 기소는 그 씨앗마저 ‘밥그릇 사수’ 택시업계와 ‘표가 우선’ 정치권, ‘눈치 보기’ 정부의 연합 십자포화에 말라죽게 됐다는 의미다. 대통령이 혁신 성장하자며 “공유 경제 활성화”를 외치는 정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어찌 불통·무능을 탓하지 않으랴.

타다는 4차 산업혁명의 교두보 #뚝심의 이재웅마저 실패하면 #말들에게 투표권 줘야 할 수도

쏘카 이재웅 대표는 그런 불통·무능과 일 년 넘게 맞서고 있다. 이미 두 차례 이 칼럼난에서 그를 편 들었는데, 한 번 더 해야겠다. 어디 예뻐서 그러겠나. 그와는 일면식도 없다. 게다가 그는 대표적인 친정부 기업인이다. 문 대통령과 백두산도 함께 올랐다. 공정거래위원장·금융위원장·경제부총리에게 “오만하다”“어느 시대 부총리인지 모르겠다”고 돌직구를 날렸다. 그러고도 무사했다. 여느 기업인 같았으면 진작 사달이 났을 것이다. 음모론적 시각에서 보면 보수 언론에서 ‘비호’는커녕 비판해야 마땅하다.

이재웅 편을 드는 것은 그가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재웅이니, 다음을 창업한 혁신 DNA와 정·관계 인맥을 두루 갖춘 이재웅이니, 여기까지라도 왔다. 그런 그마저 안 되면 대한민국에선 안 되는 것이다. 오죽하면 장병규 4차산업혁명위원장은 타다를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같다”고 했을까. 노르망디에서 밀리면 차량 공유는 바다에 빠져 익사할 것이라는 의미다.

일차 책임은 국토교통부에 있다. 지난해 10월 타다 출시 땐 “적법하다”던 국토부였다. 분위기가 바뀐 건 같은 달 광화문 시위에 7만 택시기사 몰리면서다. 전 청와대 관계자 A 씨는 “보고를 받은 대통령이 ‘그래도 공유 경제 활성화를 포기해선 안 된다’며 ‘호들갑 떨지 말라’고 역정을 냈다”고 전했다. A 씨는 “광장의 직접 민주주의에 남다른 가치를 매기는 문 대통령의 고심이 느껴졌다”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김현미 장관은 두 달 뒤 “우버 형태 카풀 반대”를 선언했다. 승차 공유 업계는 “정치인 출신답게 택시업계 100만 표를 먼저 챙겼다”며 낙담했다. 급기야 올 2월 택시업계가 타다를 고발하자 국토부는 “적법하다고 한 적이 없다”며 발을 뺐다. “검찰 판단에 따를 것”이라며 공을 떠넘기고는 “적극적으로 전달하겠다”던 의견은 열달이 다 되도록 내지 않았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검찰 기소 탓을 하며 “보고를 했네 안 했네” 청와대·검찰·법무부와 얽혀 진실 공방을 벌이니 이런 목불인견, 후안무치가 없다.

타다 사태의 핵심은 마차 시대의 법을 뜯어고치는 것이지만 국토부는 생각이 없다. 승차 공유 업계가 ‘택시산업발전법’이라고 비웃는 ‘규제 혁신형 플랫폼 택시’ 법안 하나를 달랑 내놓고 나머지는 국회 몫이라며 뒷짐만 지고 있다. 막상 그 국회는 “타다는 불법, 이재웅을 구속하라”고 외치는 의원들 목소리가 더 큰 곳이다.

또 다른 핵심, 소비자의 편익과 후생은 아예 고려 대상도 못 된다. “1. 5분간 기다려준다. 2. 클래식 음악만 튼다. 3. 정치 얘기나, 자기 얘기를 마구 떠들지 않는다. 4. 몇 살이냐 묻고 금세 반말로 깔지 않는다. 5. 라디오 볼륨 좀 줄여주세요, 말할까 말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타다를 타고 누렸던 이런 소소한 행복도 곧 사라질 것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말들에게 투표권을 줬다면 자동차는 없었을 것”이라고 했을 때, 그건 그냥 멋진 비유였을 뿐이다. 19세기 영국뿐 아니라, 현실에선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서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선 그 말을 웃어넘길 수 없게 됐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