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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지켜보던 대만인들 "독립 필요없어···지금처럼 살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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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사태를 지켜보는 대만인들의 심사는 복잡하다. ‘오늘의 홍콩이 내일의 대만이 될 수 있다’는 불안과 함께 일국양제(一國兩制·한 나라 두 체제)의 틀 속에서 대만을 통합하려는 중국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고 있다.

일국양제의 민낯 드러낸 홍콩 사태 #대중 경계감 팽팽 대만 현지 르포 # #약발 떨어진 홍콩 일국양제 #시진핑 대만통일 수단 강조 # #중국의 군사·경제적 압박 불구 #대만 민심 현상유지 절대지지

국민당이 대륙을 뒤로 하고 대만으로 탈주한 지 70년. 양안(중국·대만)을 보는 대만인들의 시각도 달라졌다. 대륙 출신 1세대들이 사망했고 대만에서 태어난 2·3세대들은 1세대와 달리 대만에 대한 귀속감과 대만인으로서 정체성이 크다. 이 때문에 중국과의 통일이나 독립이 아닌 일단 현상유지를 지지하는 여론의 목소리가 높다.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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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 민낯을 드러낸 일국양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1월 공개 연설에서 대만이 홍콩과 같은 일국양제 방식의 통일을 수용해야 한다며 무력 통일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강성 발언을 했다. 중국의 압박과 홍콩의 혼란이 맞물리면서 대만인들의 반중국·탈중국 정서에 불이 붙었다.

지난 8월 대중정책을 담당하는 대만 행정원(정부격) 대륙위원회가 발표한 여론조사. 대만인 88.7%가 일국양제에 의한 통일을 반대했다. 또한 ‘상황을 보면서 독립인지 통일을 결정한다’ 혹은 ‘영원히 현재대로가 좋다’는 ‘광의의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의견도 87.3%에 이르렀다.

대만행정원 대륙위가 지난 8월 발표한 대만인들의 통일과 독립 여론조사. 위에서부터 1.현상유지, 이후 결정 2. 영원히 현상유지 3. 현상유지, 이후 독립 4. 현상유지, 이후 통일 5. 신속히 통일(빨강) 6. 신속히 독립선언(녹색) [사진 대만 대륙위]

대만행정원 대륙위가 지난 8월 발표한 대만인들의 통일과 독립 여론조사. 위에서부터 1.현상유지, 이후 결정 2. 영원히 현상유지 3. 현상유지, 이후 독립 4. 현상유지, 이후 통일 5. 신속히 통일(빨강) 6. 신속히 독립선언(녹색) [사진 대만 대륙위]

특히 현상유지를 전제로 하는 세 가지 항목에서 눈에 띄는 변동이 나타났다.

절대적으로 현상유지를 바라는 여론과 독립을 바라지만 일단 현상유지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늘어났다. 반면 통일을 찬성하며 현상유지를 바라는 의견은 줄어들었다. 이는 일국양제를 앞세워 통일을 밀어붙이는 중국에 대한 반감과 대만인으로서 정체성이 높아지면서 ‘하나의 중국’에 대한 인식과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약화되면서 일어난 현상으로 풀이된다.

“베이징 또는 항저우에서 오는 중국인들은 타이베이를 상하이나 선전 같은 자국의 대도시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는 모양이지만 우리 대만인들은 베이징이 서울이나 도쿄, 자카르타 같은 국제 도시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달 27일 대만 타이베이의 대형 서점에서 만난 30대 직장인 주전카이(朱真楷)씨는 도시로서 베이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거침 없이 이렇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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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인(內省人)·외성인(外省人) 구분이 희미해진 탓일까. 중국에 대한 접근법과 통일문제를 놓고 1949년 국민당의 대륙 철수와 함께 대만으로 건너온 사람들(외성인)과 기존 대만에 살고 있던 사람들(내성인)의 시각은 대척점에 있었다. 친중 성향의 외성인과 독립 성향의 내성인은 정치적 선택도 달라 국민당과 민진당은 대중 문제를 놓고 항상 엇갈린 정책을 내놓았다.

70년 동안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들이 사망하면서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있는 반면 대만에서 태어난 내성인들은 3대에 걸쳐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구도다. 대만인에 대한 정체성이 높아지면서 나타난 현상이 또 있다. 중국에 대한 공식 명칭이다.

10여년 전만 해도 대만 정부나 언론,학계에선 중화민국이라고 부르는 대만과 구별해 중국을 중국대륙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요즘은 정부 공식 자료나 총통 연설문, 미디어에서 일률적으로 중국이란 국호를 쓰고 있다.
중국과 대만은 별개의 국가라는 여론 기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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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대륙위 천밍치(陳明祺) 부주임(차관격)은 “여론조사에선 중국과의 교류와 개방 속도가 느리다는 의견은 줄어든 반면 현재 속도가 적정하다는 목소리는 높아졌다”며 “대만 경제의 중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대안으로 동남아·호주·인도와 연계하는 신남향정책을 비중 있게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만 대륙위 천밍치(陳明祺) 부주임(차관격). [사진 정용환 기자]

대만 대륙위 천밍치(陳明祺) 부주임(차관격). [사진 정용환 기자]

이런 기류 변화에 중국은 예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중국은 군사, 외교,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대만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최고 수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중국은 지난 8월부터 본토 주민의 대만 개인 여행을 중단시킨 데 이어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푸젠성(福建)등 대만 관광 수요가 많은 8개 지역의 단체 관광을 금지시키는 등 잇따라 족쇄를 채우고 있다.

대만 관광업계를 노린 조치다.  

지난달 27일 대만 타이베이(臺北)의 유명 관광 명소인 타이베이101 빌딩. 1층 매표소를 비롯해 89층 전망대가 눈에 띄게 한산했다. 비수기인 한여름에도 밀려드는 관광객 때문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30분씩 기다려야 했는데 정작 성수기에 접어들자 줄을 설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장사진을 이뤘던 중국 관광객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장개석기념관 광장(현 자유광장)이 중국인 관광객 급감으로 한산한 모습 [사진 정용환 기자]

장개석기념관 광장(현 자유광장)이 중국인 관광객 급감으로 한산한 모습 [사진 정용환 기자]

실제로 고궁박물관이나 장개석기념관·단수이·국립전통예술센터 등 중국인들이 많이 찾는 관광명소나 시먼딩(西門町) 등 쇼핑가는 깃발을 앞세운 중국 관광객들이 빠지면서 한적한 분위기였다. 관광지마다 택시를 대절해 타고 다니던 중국 여행객이 크게 줄자 ‘큰손’이 끊긴 택시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대만 관광업계는 잔뜩 긴장하고 있다. 2015년 415만 명에 달했던 대륙 관광객은 지난해 260만명까지 줄었다. 올 상반기 167만명을 기록해 회복세를 보였으나 이번 조치로 찬물을 뒤집어 쓰게 됐다.

대만 타이베이의 유명 쇼핑가 시먼딩. 중국 관광객이 빠져 거리가 한산하다. [사진 정용환 기자]

대만 타이베이의 유명 쇼핑가 시먼딩. 중국 관광객이 빠져 거리가 한산하다. [사진 정용환 기자]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체계 배치를 둘러싼 갈등을 빌미로 한국을 찾는 중국 관광객들의 발목을 잡았듯이 중국 당국의 이번 조치도 대만의 적극적인 군사적 행보에 대한 응징적 성격이 강하다. 지난 7월 대만이 미국으로부터 F-16V·신형 M1A2 에이브럼스 전차와 스팅어 휴대용 방공 미사일 250기 등 모두 22억 달러(약 2조6000억원) 상당의 최신 무기로 방어력을 높이자 대만 여행금지 카드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중국은 대만 독립 성향의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총통이 집권한 2016년 이래 군사·외교·경제적 압력을 가하며 대만 정국을 흔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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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대만 총통선거를 1년 앞둔 올해 들어선 정치적·군사적 압박 강도가 현저하게 높아졌다. 대만인들은 바짝 긴장했다. 대만 내국인이 많이 이용하는 쑹산(松山)공항에는 ‘한 치의 국토도 양보하지 않고 민주·자유를 수호한다’는 구호와 함께 육·해·공군의 훈련 장면을 담은 대만 국방부의 3분 짜리 영상 광고가 대형 스크린을 통해 방송되고 있다.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양안관계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국양제에 반대하는 대만 여론은 홍콩에서 벌어진 범죄인 인도법안 반대 시위로 더 악화됐다.  

중국은 1997년 ‘50년간 중국이 외교와 국방에 대한 주권은 갖되, 홍콩에 고도의 자치와 사법 독립, 언론 자유를 보장한다’는 일국양제 원칙을 약속하면서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돌려받았다. 홍콩의 시위는1997년 홍콩 반환 당시 중국이 약속한 일국양제가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홍콩인들이 누렸던 자유와 인권이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 의식에서 출발했다.

시위대는 중국공산당의 압박으로 홍콩 행정장관과 입법의원들이 친중국 인사들로 채워지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현격히 침해당했다고 주장했다. 대만인들은 이에 공감하며 대만 도처에서 지지 시위를 열고 있다. 홍콩 시민이 구속영장 없이 중국 공안에 체포돼 중국 대륙 모처에서 몇 달씩 구금되는 등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게 이들의 비판이다.

홍콩 사태, 일국양제의 불편한 진실 드러내 

대만 정부 산하 예술기관의 한 관계자는 “공기처럼 당연하게 생각하던 자유와 인권, 법치가 새삼 귀중하게 느껴졌다”며 “우리의 민주주의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절감했다”고 말했다. 일국양제의 목표는 중국 주도의 통일이다. 사회주의 중국으로 통일될 경우 대만인들이 누리고 있는 정치적 자유, 법치 뿐 아니라 토지 소유권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사회주의 중국은 개인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용권만 인정해 50~70년마다 갱신하도록 하고 있다.

대만의 우자룽(吳嘉隆) AIA캐피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27일 홍콩 시위의 원인에 대해 “홍콩인들은 대지 지분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토지 국유제의 사회주의 중국으로 통합된다는 것에 실존적 두려움을 표출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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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폭등으로 집 한 채 사기 어려운 게 현재 홍콩 실정이다. 30년 주택 모기지로 간신히 집을 구했다 해도 28년 뒤 일국양제가 끝나면 재산권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홍콩인들을 엄습했다. 이런 와중에 범죄인 인도법이 개정돼 중국 당국의 입김이 커지면 홍콩의 사법 자율성마저 사라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홍콩 사태에 불을 당겼다는 얘기다.

[대만 애플데일리 캡처]

[대만 애플데일리 캡처]

일국양제에 대한 부정 여론이 높아지면서 차이잉원 정부의 경제 실정 프레임도 소멸되는 양상이다.

대만 독립 성향의 민진당 차이잉원 정부는 탈중국 정책을 펼치다 경제보복을 받았다.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대만 경제는 휘청거리며 차이 정부는 지난해 11월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당했다. 올 상반기까지 차이 총통은 국민당 한궈위 (韓國瑜) 후보에게 약세를 면치 못했다.

반전은 홍콩 사태가 격화됐던 지난 7월부터였다. 반중 기류가 거세지면서 친중 성향의 국민당 후보의 입지가 좁아졌다. 게다가 중국의 군사적 위협과 미국의 최신 무기 판매 승인이 맞물리면서 외교적 실적을 거둔 차이 총통의 지지율이 급상승했다.

대만 민영방송 TVBS가 지난달 25일 내놓은 총통선거 여론조사에선 차이잉원 총통 지지율이 52%로 한궈위 후보의 39%를 크게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년 1월 대만 대선이 대미·대중 관계가 핵심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트럼프의 대만 카드와 시진핑의 일국양제 카드가 맞부딛치는 형국이다.

대만 대선 레이스, 이제부터 시작 

물론 2개월 이상 남은 대만 대선 레이스에서 ‘안심은 금물’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지금은 트럼프의 대만 카드가 앞서가는 국면이지만 시진핑도 경제 교류 확대 등 유화 제스처로 반격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만 정가의 정부 소식통은 “역대 선거에서 대외 변수가 한 쪽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지면 반발 표심이 결집해 효과를 상쇄시키곤 했다”며 “하지만 이번 대선은 어느 때보다 외부 변수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대선을 앞둔 미묘한 시점에 당근책을 쏟아냈다. 왕양(汪洋)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이 지난 4일 양안관계 활성화를 위한 26개 조치를 발표했다. 대만인은 해외에서 자연재해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중국 대사관이나 영사관에 영사 보호와 협조를 요청할 수 있고 중국 거류증이 있는 대만인은 중국에서 주택을 살 때 중국 본토인과 동등한 대우를 보장하는 내용이다.

또 대만 기업이 주요 기술 장비 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중국의 5세대 이동통신(5G) 기술 개발과 표준 제정, 네트워크 건설 등에도 참여할 수 있다. 대만의 표심을 노린 지원책 성격이 강하다. 대만 총통 선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타이베이=정용환 기자 narrativ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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