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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도 못 구해” 칠레 노인·아이까지 냄비 치며 “대통령 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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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 1일 칠레 산티아고의 이탈리아 광장에서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물대포와 최루가스를 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일 칠레 산티아고의 이탈리아 광장에서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물대포와 최루가스를 쏘고 있다. [연합뉴스]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으로 민심이 폭발한 칠레 수도 산티아고. 칠레 정부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개최를 포기한 뒤 맞은 첫 주말인 2일 오후(현지시간) 이곳의 이탈리아 광장에선 매캐한 최루가스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간 15일째 이 광장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는 라 모네다(la Moneda) 대통령궁까지는 900m 거리다. 이곳의 산티아고 바케다노 지하철역 입구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불에 탄 입구는 마치 포탄을 맞은 듯 무너진 돌무더기로 막혀 있었다.

‘APEC 취소’ 칠레 산티아고 르포 #“지하철 50원 인상이 문제 아니다 #30년 누적 문제, 의료·복지 개혁을” #“서민들 100년 벌어야 5억인데 #의원 1년에 8억 써 정부가 도적질” #무정부주의자·원주민 시위대 가세 #단일 지도부 없어 방화 등 통제불능

지난달 10월 25일 120만 명 참가로 정점을 찍은 시위는 매일 오후 5시 이곳 이탈리아 광장에서 시작된다. 대통령궁 등 시내 다른 곳으로 시위대가 행진한다. 광장 인근 버스정류장은 천장이 부서졌다. 버스 안내 전광판은 불에 타 뼈대만 남았다. 신호등도 곳곳에서 파손돼 흉물처럼 매달려 있다.

“가난한 사람 교육, 부자들이 두려워해”

델리아 시푸엔테 할머니는 ’사회가 너무 불평등하다“며 시위에 나선 이유를 말했다. 이광조 JTBC 기자

델리아 시푸엔테 할머니는 ’사회가 너무 불평등하다“며 시위에 나선 이유를 말했다. 이광조 JTBC 기자

시위 시작 1시간 전. 한산하던 광장을 시위대가 메우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칠레 국기와 이곳 원주민 마푸체(Mapuche)족의 깃발, 칠레 유명 프로축구단 깃발을 흔들며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의 하야를 외쳤다. 요란한 소리의 부부젤라를 불고 냄비를 두드리며 연금·의료·교육 개혁도 요구했다. 지나는 차량들은 경적을 울리며 동조했다. 쇠 냄비를 들고나와 두드리던 델리아 시푸엔테(78)는 “약조차 제대로 살 수가 없다. 재고가 있어도 부자들에게 먼저 돌아간다. 사회가 너무 불평등하다”며 시위에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아이들도 시위에 동참했다. 아이들이 든 손팻말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교육을 받으면 부자들이 두려워한다” “피녜라 탄핵, 더 좋은 교육을 위해 우리가 칠레의 미래” “교육의 품질, 적절한 월급, 피녜라가 탄핵당해야 내 꿈이 이뤄진다”고 적혀 있었다.

그사이 광장 주변에 경찰 진압차가 속속 배치됐다. 경찰들이 광장 중심을 에워쌌다. 경찰이 경고방송을 한 뒤 곧바로 강제 해산이 시작됐다. 경찰은 최루가스와 최루액을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분사했다. 터지는 최루가스에 놀란 시위 참여자가 연기를 피해 도망쳤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위대는 돌을 집어들어 경찰 차량을 공격했다. 이렇게 곳곳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했다.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으로 촉발된 칠레의 대규모 시위는 16일째인 이날도 계속됐다.

칠레는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세계 41위권, 중남미 국가로는 멕시코와 함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다. 남미에선 상대적으로 부국에 속한다. 하지만 소득 불평등 수준은 남아프리카공화국·코스타리카에 이어 OECD 내 세 번째로 높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정권을 종식하고 민주정부가 수립된 지 30년이 됐는데도 빈부 격차와 사회적·경제적 불균형은 오히려 확대됐다.

억만장자 피녜라 대통령 지지율 14%

아이들도 시위에 함께 참석했다. 이광조 JTBC 기자

아이들도 시위에 함께 참석했다. 이광조 JTBC 기자

법정 최저임금은 월 27만6000페소(2018년 기준, 약 43만원)인데, 지하철 요금이 출퇴근 시간의 경우 편도 800페소(약 1250원)이다 보니 서민 부부는 하루 지하철 출퇴근에만 3200페소가 들어 최저임금의 4분의 1가량을 교통비로 써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30페소(약 50원) 인상안은 그동안 쌓여 있던 시민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시위 초기 “30페소가 아니라 30년이 문제다”는 구호가 등장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우파 성향의 억만장자인 피녜라 대통령이 요금인상을 백지화하고 전기요금 인상 철회와 기초연금 인상 등의 대책을 내놨지만 불붙은 민심은 쉽게 꺼지지 않고 있다. 그사이 대통령 지지율은 14%로 추락했다.

이탈리아 광장에서 만난 시위대 아리아스 세불베다(32·엔지니어)는 “정부가 도적질하고 있다”고 분노했다.

누가 시위를 주도하나.
“따로 없다. 시위를 주도하는 것은 우리 시민들이다.”
무엇에 분노하나.
“일반 서민은 100년을 벌어 봤자 3억1000만 페소(4억8000여만원) 정도인데 일부 상원의원, 공무원들이 1년에 쓰는 돈이 4억8600만 페소(7억6000여만원)다. 서민이 평생 모은 돈보다 의원들이 1년에 쓰는 돈이 월등히 많다는 거다.”
해결 방법이 뭔가.
“불평등한 삶을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교통비는 세계 제일로 비싸고 세금은 매순간 인상되고 있다. 정부가 시민을 악용하고 도둑질하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칠레 싱크탱크인 아테나 랩에 따르면 시위대는 크게 세 개 그룹으로 나뉜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소규모로 움직이며 동시다발적으로 지하철역을 공격하는 ‘급진적 무정부주의자’, 혼란을 틈타 상점을 약탈하는 ‘기회주의자’, 또 피켓을 흔들고 구호를 외치거나 냄비 두드리기 등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그룹이다. 아테나 랩은 그러면서 현재까지 3개 그룹 중 어느 그룹에도 눈에 띄는 리더가 없다고 분석했다. 그러다 보니 시위대의 요구가 연금·의료 개혁에서 개헌, 대통령 하야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현지 외교 소식통은 “지도부나 대변하는 세력이 없으니 시위대의 목소리를 모아 하나로 전달하는 기능이 전혀 없다. 시위대가 원하는 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정부가 누구하고 어떻게 협상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야당은 ‘근본적인 대수술’을 요구하고 있지만 시위대의 목소리를 제도권 안으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칠레 사태가 언제까지 갈지 현재로선 누구도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산티아고(칠레)=임종주 특파원 lim.jongju@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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