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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술자리에 온 공수부대원···문대통령·원혜영 43년 인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달 29일 국회 의원회관 816호.
 원혜영(68)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들어서니 대형 사진, 병풍, 액자 세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은 원혜영 의원이 툇마루에 한 촌로와 앉아 있는 장면을 담았고, 병풍에는 산수화 대신 만화가 빼곡했으며, 액자에는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세 개에 얽힌 사연 하나하나가 ‘원혜영’을 말해주는 키워드를 담고 있었다.

 원 의원실을 찾은 이유는 인터뷰를 위해서였다. 이철희ㆍ표창원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꼽은 공통 이유가 여야의 험한 대결 문화다. 원 의원은 과거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 온건파 의원들과 법안의 날치기 처리나 몸싸움 같은 악습을 사라지게 할 목적으로 일명 ‘선진화법’(국회법)을 만들어낸 주역. 그에게 정치의 무엇이 문제인지 들어보려는 게 첫 번째 목적이었다.

 원 의원의 총선 출마 여부도 궁금했다. 지금까지 그의 거취와 관련해선 ‘불출마로 알려졌다’는 식의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 상태. 원 의원이 직접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 원 의원이 밝힌 결론부터 전하면 ““불출마 선언을 한 것처럼 보도는 나오는데 그런 적 없고, 오래전부터 그동안 나로서는 열심히 일해왔다고 생각하고 내 정치활동을 정리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을 하는데…원로들을 비롯한 동료들이 21대 국회의 중요성을 얘기하면서 (내게) 역할을 해야 되지 않느냐는 당부들도 있고 해서…. 계속 고민 중이다. 연말이면 선거국면이 시작되니까 그때는 결정을 하고 공식적으로 알리겠다"였다.

원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인터뷰가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임현동 기자/20191029

원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인터뷰가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임현동 기자/20191029



①풀무원농장과 풀무원식품, 그리고 20억 기부

 대형사진 속 원 의원 옆의 촌로가 누군지 물어봤다. 선친인 고 원경선 풀무원 농장 원장이었다. 2013년 꼭 100세의 나이로 별세한 원경선 원장. 초ㆍ중등 교과서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평안남도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월남해 경기도 부천에 정착하면서 땅을 개간, ‘풀무원농장’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유기농(땅의 힘과 거름만 사용하는 친환경 농법)을 시작했고, 농장에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받아들여 빈곤 타파를 위한 공동체를 열었다. 사진은 충북 괴산의 자택에서 찍은 것이다. 사진엔 툇마루만 나오지만, 자택은 건축가 승효상 씨 작품.
풀무원을 떼놓고 ‘원혜영’을 생각할 순 없다. 원 의원은 30세(1981년)에 ‘풀무원 식품’을 창업했다. 아버지 농장에서 나오는 채소를 판매하는 회사였다. 연 매출 2조 2700억원(2018년)의 글로벌 식품회사 풀무원의 출발은 '원혜영'이었다.

어떻게 풀무원을 창업하게 됐나요.

"20대(1970년대)에 유신반대 운동을 하다 보니 제적과 강제징집을 번갈아 당했지요. 그러니 대학 졸업장이 없었고, 취직도 어렵고,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게 풀무원 식품이었죠."

생명이라든지, 환경이라든지 하는 번듯한 명분이 나올 줄 알았는데, ‘호구지책’이었다고 했다. 꾸미지 않은 건지, 꾸밀 줄을 모르는 건지, 인터뷰 내내 그는 이런 기조였다. 그는 6년간 풀무원식품을 키워 경복고-서울대 동창인 친구 남승우에게 넘기곤 정계에 뛰어들었다.

회사를 어느 정도까지 키웠는지.

”매출 100억 할 때죠.”

잘 나가는 회사 경영을 왜 접었습니까.

“회사를 넘겨주고 나올 때가 87년 6월항쟁이 있었을 때입니다. 이제 합법적 정치 공간의 길도 열렸고, 김근태 선배 등의 (운동권) 복귀 권유가 있었고.”

30년 전 매출 100억 회사를 정리하는 게 아깝진 않았습니까?   

“아깝긴요. 잘 돼서 친구한테 다 넘기고 손을 뗄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지요. (웃음)”

회사 지분인 20억 원대 주식은 왜 기부를 했습니까?

“ 주식을 그대로 갖고 있어도 법적문제는 없어요. 그런데 내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일선에 나서려는 건데, 원혜영이 대주주로 있는 회사를 전두환정권이 가만히 둘 리 없을 것 같았어요. 세무사찰 한 번 하면 회사가 완전히 정리되는 거 아니었어요? 회사와의 탯줄을 끊어야 했지.”

그걸 기부한 계기는?

“풀무원이 매출 100억의 중소기업이었지만 전망은 밝다고 그 때도 누구나 평가해줬어요. 나중에 세상이 좋아지면 내 몫을 되돌려 받긴 해야잖습니까? 주식은 정권 탄압이 걱정되니 넘겨도 ‘상표권’은 내가 갖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때도 몇백억 넘는 상표권이 있었어요. (회사로 돌아올 경우) 상표권을 팔아서 원래 내 몫인 주식을 사면 되니까. 그건 불법도 아니고.  예상대로 회사가 성장해서, 96년에 그동안 묻어둔 상표권을 처분하고 회사지분을 다시 매입하려 했는데 문제가 생겼어요. 국세청에서 상표권 가격을….”

얼마로 쳐주던가요.

“11만6000원.”

풀무원 상표권이 …11만원?

“상표권 등록 인지대 (11만 6000원) 외에는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거예요. ‘아, 내 개인재산으로 하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에 넘긴 제 지분 21억을 돌려받는 길은, 남승우 사장에게 증여를 받는 방식밖에는 없었는데 증여세가 50% 예요. 10억 이상을 민자당 정권에 바쳐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사회에 환원하자, 이렇게 된 거죠. 그래서 팔자에 없는 장학재단(부천육영재단)을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지급한 장학금이 21억원이 넘죠. 3700명 이상이 수혜를 받았고요. 상표권 11만6000원 덕분에 호기롭게 사회환원을 했다고 할까?  ‘원조 기부 정치인’, 이런 허명(虛名)도 생기고. 11만6000원이 아니면 사회환원 안 했을지 몰라요. (웃음)”

기부를 계속했으니 허명은 아니지요.

“허명이 사람을 구속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

풀무원까지 포기하면서 정치를 시작했는데, 이철희 의원은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기 버겁다’면서 불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아주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선배 역할을 못 했구나 하는 미안함도 있고요. 처음 정치를 할 때의 좌절이 기억나더라고요. 풀무원을 정리하고, 88년 총선에 ‘새 정치, 새 세력’을 표방하면서 제정구ㆍ유인태 ㆍ김부겸 등과 한겨레민주당을 만들어 부천에서 출마했죠. 그런데 첫 도전에 민정당ㆍ평민당ㆍ통일민주당ㆍ공화당·무소속 후보 다음 6등을 했어요. 저뿐 아니라 제정구부터 다 똑같이 6등이에요. 정치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생각했죠.”

88년 6등을 했으나, 90년 3당합당(민정ㆍ민주ㆍ공화)의 반작용으로 야권통합 운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통합민주당으로 소속이 바뀐 다음 (92년 14대)엔 1등이었다. 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통합민주당을 깨고 탈당해 국민회의를 만들자 민주당에 남았다. 그때 잔류멤버가 노무현ㆍ김원기ㆍ유인태 등. 96년 총선 땐 DJ의 국민회의 후보에게 부천에서 390표 차로 패해 2등이었다.

좌절이 한번만은 아니었겠죠?

“96년 총선에서 DJ의 국민회의 후보에게 져서 떨어졌을 때도 ‘소신정치를 하는 게 이렇게 어렵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손을 떼려 했어요. 그러나 막스 베버는 ‘정치는 열정과 균형감각, 둘을 가지고 딱딱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공을 들여서 뚫어가는 작업’이라 했어요. 널빤지를 한 번에 깨는 건 쉽지만, 구멍을 뚫는 건 힘들고, 성과도 안 보이고, 짜증 나는 일이에요. 좌절하고 절망하더라도 정치하려면 딛고 일어서야죠. 두 의원의 생각은 존중할 수밖에 없지만.”

이철희ㆍ표창원 의원의 불출마 선언이 ‘쇄신론’에 불은 붙였습니다.

“조국장관 사태가 불러온 여러 가지 충격이나 반성이 있지 않습니까? 당연히 쇄신이 있어야죠.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일성이 ‘이 정부는 민주당 정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인으로서 역할을 했느냐 반성해보면, 그렇지 못했다는 평가일 거예요.”

'민주당 정부'가 아니라 '청와대 정부'라고도 하죠.

“그저 객석에 앉아있는 위치 아니었나 싶어요. 대통령과 정부, 지도부가 잘하는지 지켜보는. (2004년)열린우리당 때 우리가 호호탕탕하게 시작했는데, 내부에서 (당·청이)적대적 대립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트라우마로 정부가 좀 기대에 못 미치거나 다른 일을 하더라도, 일단 옹호하고 지지해줘야 한다는 분위기가 많이 있어요.”

그럼 앞으로 어떻게 쇄신해야겠습니까.

“우리 당 뿐 아니라 300명의 국회의원이 존재감 없는 하나의 밥풀, 한 덩어리의 모래알, 당의 방침을 표방한 여야 대표 또는 원내대표의 전략 재료로 쓰이는 게 만악의 근원이죠. 결정이 당에 의해 이뤄지고, 당도 상시적이고 다층적 논의에 의해 당론이 나오는 게 아니라, 소위 '당의 방침'이라고 해서 당 대표, 원내대표의 판단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것, 그래서 여야 정당의 대립구도가 300명 모두의 대립구도로 전환되는 걸 깨는 게 쇄신이라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일하는 정치, 국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국민의 비판에 제대로 응답하는 길이라고 봅니다.”

보통 쇄신하면 인적 쇄신을 뜻하는 것 아닙니까.

“인기가수의 히트곡이 다시 들어도 질리지 않는 것처럼, 물갈이는 총선 때 나오는 인기가수 히트곡 같은 거죠. 하지만 나는 두 의원의 사퇴결심이 물갈이론하고 맞물리는 거에 대해선 근본적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오히려 물갈이론을 깨지 않으면 우리 정치의 희망이 없다고 봐요. 우리 국회처럼 평균 40%, 어떨 땐 반수 이상 싹 바뀌는 문화가 민주주의를 채택한 나라 중엔 없어요. 그렇게 바꾼다고 당과 국회가 젊어지고, 책임 있고, 수준이 높아졌느냐, 그건 아니잖아요. ”

이현세의 '까치'부터 박수동 '고인돌'까지 만화캐릭터로 가득한 원혜영 의원실 병풍. 임현동 기자

이현세의 '까치'부터 박수동 '고인돌'까지 만화캐릭터로 가득한 원혜영 의원실 병풍. 임현동 기자

②고우영, 이현세, 박수동, 만화 병풍과 원혜영 부천시장  

원 의원실엔 고 고우영 화백에서부터 '까치' 이현세, '고인돌' 박수동, '둘리' 김수정 화백까지, 웬만한 유명 만화 캐릭터와 화백의 사인이 들어간 병풍이 있다.

만화에 관심이 많나요.

 "부천시장(1998~2004년)을 할 때 도로 닦고 건물 짓는 것을 넘어서서 ‘문화도시 만들기’를 시정목표로 삼았어요. 만화박물관을 만들고, 부천만화정보센터를 세웠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한국만화진흥원으로 바뀌었어요. 기초지방 정부가 문화 분야 사업을 총괄 계획하고 진행하고, 중앙정부가 지원만 하는 건 부천시가 유일하고, 만화진흥원이 처음입니다."

원래부터 만화와 인연이 있었는지. 

"“(고개 저으며)난 뭐 철저하게 장사꾼 출신이니까.마케팅 전략의 관점에서, ‘시티마케팅’을 뭐로 할 거냐, 문화로 하자, 문화 중에서도 대중성 있으면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게 뭐냐. 만화다, 이렇게 된 거죠. 예전엔 싸구려라고 대접을 못 받았지만, 저는 만화를 중요 대중문화로 인정한 거죠. 만화가들이 내가 부천시장을 퇴임할 때 대표 캐릭터를 모아서 병풍을 만들어주더군요. 최근에는 동상을 세워준다고 그러길래 사양했지요. ”

그는 “내가 제일 재밌고 보람있게 일한 것이 부천시장”이라고 했다. 부천시정은 정치라기보단 행정의 영역이다. 마침 이낙연 국무총리가 내년 총선을 위해 당에 컴백하면 후임으로 원혜영 의원을 미는 기류가 있다. 총선을 앞두고 인사청문회 정국의 수렁에 빠지지 않으려면 원 의원이 가장 안전하다는 점에서다.

당 일각에서 총리설이 나오는 데.

“그거야 뭐, 설이란 건 항상 나오는 거 아니겠어요? 총리 문제 같은 거는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니까 얘기할 일이 아닌 거 같아요.”

그는 짤막하게 답변하곤 함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오래 전부터 정치를 같이했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았지요. 우린 학생운동 동료예요. 1975년 11월, 서울대와 경희대가 동시에 유신반대 시위를 벌이려다 하루 전 관련자들이 대거 구속된  ‘서울대-경희대 연합데모 미수사건’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어요, (76년에)같이 감옥 갔다 온 서울대ㆍ경희대 친구들끼리 소주를 한잔하는데, 웬 공수부대 복장의 사람이 있는 거예요. 공수 휘장이 달린 모자를 쓴.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모임에 왜 왔나’ 했는데, 알고 보니 문재인 대통령이었어요. 문 대통령은 시위사건 전(75년 8월)에 강제징집됐죠. 휴가를 나와서 학생운동 동료들이 모인 자리에 온 거죠. 같이 소주 먹으면서 내가 ‘공수부대 가서 고생 많다’고 위로하고 그랬죠. 그 자리에 김정숙 여사도 같이 왔어요. 그 이후로도 몇 번 휴가 나올 때 보곤 했어요. 김정숙 여사가 나중에 ‘예전에 원 의원님이 막걸리 많이 사주셨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원혜영 의원이 27년째 곁에 두고 있는 액자. '실사구시'란 글씨는 서예대가의 작품. 임현동 기자

원혜영 의원이 27년째 곁에 두고 있는 액자. '실사구시'란 글씨는 서예대가의 작품. 임현동 기자

③ 박석무, 창석 김창동의 ‘실사구시’, 그리고 ‘약팽소선’

원 의원실에 걸린 ‘실사구시’라는 액자는 그가 처음 등원했던 92년 박석무 전 의원이 선물했다고 한다. 박 전 의원은 '다산연구소 이사장'이다. 글씨는 서예대가 창석(菖石) 김창동 선생의 작품.
원 의원은 27년째 액자를 곁에 두고 있다. 부천시장으로 있을 땐 시장실에, 국회의원을 하는 동안엔 의원실에 '실사구시' 액자를 걸었다. 그에게 실사구시란 '좌우명'이자 '정치철학''행정철학'이라고 한다. 말 자체는 사실 평범하다. 하지만 요즘 더욱 절실한 가치 아닐까.

실사구시의 뜻은 ‘객관적 사실을 통해 정확한 판단과 해답을 얻는다’인데, 지금 공론(空論)이 더 많아 보입니다.

”관념이 과잉이죠. 관념만으로 부딪히면 해법도 잘 안 나오고, 실사구시적 태도로 부딪쳐야 문제 해결도 쉽고, 성과도 잘 나오는 건데요. 가령 최저임금인상, 당연히 필요하고 옳은 방향입니다. 그런데 당위로움만 보고 실제 노동현장, 영세자영업자, 알바생 생태계를 따지지 않은 채 옳은 일이니까 해야 된다고 갔던 거지요. 옳은 방향이니까 ‘성과 있게’ 가자는 게 실사구시적 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정치도 실사구시가 중요하겠지요.

”물론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선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같이 갖춰야 된다고 하셨죠. 저는 그게 정치에선 실사구시라고 이해를 해요. ‘약팽소선’(若烹小鮮)이란 말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을 굽는(삶는) 자세로 정치를 해야 된다’는 뜻인데, 작은 생선 굽는 것 처럼 하나하나 잘 살피고 거기에 맞춰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정치의 기본입니다."

약팽소선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작은 생선을 요리할 때 이리저리 뒤집으면, 연한 살이 부서지기 쉽다. 그러니 가만히 두고 지켜보라는, ‘무위’(無爲)를 강조한 말이다. 하지만, 손을 놓고만 있으란 뜻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간 생선이 타버리는데. 세심하게 살피면서, 타이밍 맞게, 조심조심 수를 두라는 뜻일 것이다.
심새롬 기자 saer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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