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여의도에 궁예 나타나면 좋을텐데" 국회서 사라진 연예인, 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KBS1 '태조 왕건'에서 궁예를 연기했던 김영철 [중앙포토]

KBS1 '태조 왕건'에서 궁예를 연기했던 김영철 [중앙포토]

“여의도에 궁예가 나타나는가 했는데 아쉽네요. 그만큼 정치랑 이미지가 잘 맞는 배우도 이제는 흔치 않은데….”

야심차게 추진했던 ‘4딸라’(4달러) 김영철씨의 영입이 무산되자 자유한국당의 관계자가 아쉬워하며 한 말이다.

KBS ‘태조 왕건’, ‘아이리스’, SBS ‘야인시대’ 등을 통해 선 굵은 연기를 선보인 중견 탤런트 김씨는 최근 한 CF에서 20년 전 드라마 ‘야인시대’의 대사 ‘4딸라’가 사용되면서 재조명받고 있다. 특히 그는 20년 전 방영된 ‘태조 왕건’에서 후삼국의 군주였던 궁예의 카리스마적 캐릭터를 개성 있게 연기해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국당 측에선 김씨의 이런 이미지가 내년 총선에서 유용할 거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연예인의 정치권 진출이 이례적인 건 아니다. 1992년 14대 국회에서는 탤런트 이순재씨가 민주자유당으로, 탤런트 최불암(본명 최영한)·강부자씨와 코미디언 이주일씨(본명 정주일)가 통일국민당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이들 모두 높은 인기를 누리던 중견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았다.

1992년 총선 당시 선거 포스터 [중앙포토]

1992년 총선 당시 선거 포스터 [중앙포토]

1992년 총선 당시 선거 포스터 [중앙포토]

1992년 총선 당시 선거 포스터 [중앙포토]

이어 15대 국회에선 배우 신영균씨(신한국당)와 정한용씨(새정치국민회의)가, 16대 국회에선 배우 강신성일씨(한나라당)가 각각 여의도에 입성했다. 18~19대 국회에선 ‘장군의 손녀’ 김을동씨(새누리당)가 연예인으론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배우 최종원씨도 2010년 이광재(태백-영월-평창-정선) 의원이 강원도지사에 출마하자 재·보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나서 당선됐다.

이들 중 일부는 강한 의욕을 보였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강신성일씨다. 1981년 서울 마포에서 11대 총선에 출마해 고배를 마신 뒤 19년 만에 대구 동갑에서 배지를 달았다. 당시 그는 강신영이라는 본명으로 나선 것이 낙선 이유 중 하나라고 보고 15대부터는 강신성일로 개명해 대구에서 출마했지만 또 낙선했다.

1981년 11대 총선에 나선 강신성일씨 포스터

1981년 11대 총선에 나선 강신성일씨 포스터

2000년 당선됐을 때는 눈물을 쏟은 것으로 알려졌다. 동료 배우이자 부인인 엄앵란씨가 남편과 함께 대구를 누비며 “내 남편 밀어주세요”라고 눈물로 호소했다고 한다. 그는 17대 때엔 낙천했고 무소속 출마하려다 뜻을 접었다.

이순재씨의 경우 1988년 13대 국회 때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서울 중랑갑에 나섰다가 낙선했지만 4년 뒤 재도전해 뜻을 이뤘다. 14대 총선에서 이순재씨의 득표율은 48.71%로 서울에 나선 민주자유당 후보 중 가장 높았다. 당시 서울에서 상대적으로 인기가 낮았던 민주자유당 후보들의 평균 득표율은 35.03%였다.

김을동씨는 1991년 광역의회 선거 때 서울 동대문갑에 출마한 뒤 꾸준히 국회 문을 두드렸다. 배우 최무룡씨도 1988년 경기 파주에서 당선됐다. 반면 배우 이덕화씨는 1996년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뜻을 접었다.

1996년 14대 총선에서 광명갑에 출마한 이덕화씨.

1996년 14대 총선에서 광명갑에 출마한 이덕화씨.

1988년 신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한 최무룡씨

1988년 신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한 최무룡씨

정치권에서도 연예인들의 출마를 반기는 기류가 있었다. 무엇보다 당장 승리가 급한 상황에서 연예인들의 대중적 인지도와 인기를 선거에 이용할 수 있어서다.

“드라마를 통해 정주영 대표와 인연을 맺어 전국구 후보로 나선 최불암·강부자씨는 총선 전날인 23일 하루만 해도 전남·대구·경북지역의 6곳을 돌며 지역구 후보들을 얼굴로 지원, 최불암씨가 정 대표와 함께 안양갑 유세장에 나타났을 땐 청중들이 최씨 주변에만 몰려 정 대표는 뒷전으로 밀려나기도…처음엔 국민당을 ‘연예인 정당’이라며 비난하던 민자당도 대중스타들의 청중 동원 효력이 입증되자 각종 친분을 이용해 대중스타 동원에 열을 올렸다.” (경향신문 1992년 3월 28일자)

정주영 당시 통일국민당 대선 후보의 지지유세를 하는 최불암 씨. [중앙포토[

정주영 당시 통일국민당 대선 후보의 지지유세를 하는 최불암 씨. [중앙포토[

하지만 19대 국회 김을동 전 의원을 마지막으로 20대 국회에선 연예인이 여의도에서 자취를 감췄다. 요리연구가이자 사업가인 백종원씨와 배우 정준호씨 등 영입설은 있었지만 실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일단 김을동 전 의원을 제외하곤 당선된 이들 대부분 결국 불출마를 선언할 정도로 국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서울에서 지역구에 당선되며 많은 주목을 받았던 이순재 씨는 15대 국회를 앞두고 ”연예계 복귀하겠다“며 불출마 선언을 했다. ‘얼굴마담’ 역할 정도만 주어질 뿐 현실정치에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어려운 여건인 탓도 있다. 당시 이주일씨는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면서 “국회에는 나보다 더 코미디를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남겨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불암씨는 15대 총선에 서울 영등포을에 나섰으나 낙선했다.

1992년 4월 25일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여의도 중국 식당 세양원에서 열린 탈랜트 협회 모임에 참석해 이순재, 최불암의 의원 당선을 축하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2년 4월 25일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여의도 중국 식당 세양원에서 열린 탈랜트 협회 모임에 참석해 이순재, 최불암의 의원 당선을 축하하고 있다. [중앙포토]

2013년 5월 12일 새누리당 여성의원들이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사건 관련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신의진,문정린,류지영,김을동,강은희,김현숙 의원 [중앙포토]

2013년 5월 12일 새누리당 여성의원들이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사건 관련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신의진,문정린,류지영,김을동,강은희,김현숙 의원 [중앙포토]

무엇보다 정치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정치 활동이 연예계 활동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꼽히고 있다.

과거엔 국회의원을 마친 뒤에도 연예계 활동에 지장을 받지 않았다. 배우 강부자씨는 국회에서 돌아온 뒤 KBS 일일드라마 ‘정 때문에’에서, 이순재씨는 KBS 주말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 각각 출연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최불암씨도 잠시 쉬었던 MBC 장수 드라마 ‘전원일기’에 복귀했으며, 이주일씨는 SBS 토크쇼 ‘이주일의 투나잇쇼’로 컴백하는 등 전성기와 다름없는 활동을 보였다.

정치 활동 후 연예계로 복귀한 코미디언 이주일 [중앙포토]

정치 활동 후 연예계로 복귀한 코미디언 이주일 [중앙포토]

반면 최근엔 정치 참여는 물론이고 특정 정치인에 대한 비판이나 실망감을 SNS에 드러내도 해당 정치인의 지지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아 활동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다. 정치권과의 친분 여부에 따라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문재인 정부의 ‘화이트리스트’ 등의 논란에 거론되는 것도 부담이다.

5월 중견배우 노주현씨는 한 방송에서 “문재인 정부 들어서 한 편도 섭외가 안 됐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노씨는 2012년 총선에선 김학용 자유한국당 의원의 선거운동을 돕고 그해 대선에선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국민행복추진위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배우 출신인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는 “누구나 아는 유명 배우들이 한예종(한국예술종합대학) 동기이자 선후배들이지만, 괜한 피해를 볼까 봐 선거 유세에 잘 부르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당의 한 관계자는 “요즘엔 정치권에 오겠다는 인기 연예인도 없고, 우리가 ‘러브콜’을 보내도 ‘죄송하다’며 손사래를 친다. 공천 소문 자체도 꺼리는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외국의 경우=해외에서도 연예인 출신 정치인이 흔치는 않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80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서서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다. 할리우드 배우 출신인 레이건 대통령은 ‘레이거노믹스’로 불리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반공정책으로 소련과의 냉전에서 승리해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레이건의 경우엔 배우협회장을 거쳐 8년간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내며 공직 경험을 쌓았다. 배우 경험 덕분인지 대국민 소통에 능했던 이로 꼽힌다. 그래서 ‘위대한 소통자’(The Great Communicator)로 불리곤 한다.

한때 대통령을 연기했던 코미디언 출신의 40대 정치 신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1) 후보가 4월 21일(현지시간)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선 잠정 개표결과에서 73.17%를 얻은 것으로 나타나 사실상 당선이 확정됐다. [로이터]

한때 대통령을 연기했던 코미디언 출신의 40대 정치 신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1) 후보가 4월 21일(현지시간)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선 잠정 개표결과에서 73.17%를 얻은 것으로 나타나 사실상 당선이 확정됐다. [로이터]

최근 유럽에서 포퓰리즘 바람이 불면서 기존 정치인과 차별화된 대중정치인들이 부상하는데, 이들 중 연예인 출신들이 있다.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정치인으로 변신한 경우다. 이탈리아에서는 2009년 '오성운동'을 창당한 코미디언 출신 베페 그릴로가 일례다. 2010년 광역지방선거에서 한 자릿수 득표율에 그쳤던 이들은 2018년 총선에선 32.7%의 득표율로 227석을 얻어 원내 1당에 이어 연립 여당이 됐다. 또, 우크라이나에서는 5월 대선에서 코미디언 출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대통령 당선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수정: 2019년 11월3일
애초 기사에는 13대 총선을 1987년에 열렸다고 했지만 1988년이기 때문에 정정했습니다. 또 13대 총선에 출마한 배우 최무룡씨도 낙선이 아니라 당선이라는 독자 지적에 바로잡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