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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국경 즉시 개방”…더 이상 탈출할 필요가 없어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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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9호 10면

한스 자이델 재단과 함께하는 독일 통일 30돌 <2>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다음날인 1989년 11월 10일 동서 베를린 시민들이 브란덴부르크문 앞의 장벽 위에 함께 올라가 기뻐하고 있다. [사진 독일연방문서청]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다음날인 1989년 11월 10일 동서 베를린 시민들이 브란덴부르크문 앞의 장벽 위에 함께 올라가 기뻐하고 있다. [사진 독일연방문서청]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한 측근이 어느 날 갑자기 남쪽을 향한 경계를 개방하고 북한 주민들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을 상상한다면 이는 엄청난 센세이션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일이 독일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정치국 대변인인 귄터 샤보브스키가 동독 주민들에 대한 여행 자유화 사실을 알렸다. 그 당시 이미 몇 주 전부터 여행과 집회 그리고 사상의 자유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으며 시민들에 대한 감시 그리고  SED와 국가보위부인 슈타지의 통제 종식을 촉구하고 있었다.

여행 자유 불허 등 주민 불만 쌓여 #호네커 물러나자 대규모 시위 계속 #동독 정부 대변인, 저녁 긴급 회견 #서독 뉴스 본 주민들 검문소 몰려 #보른홀머 장벽이 가장 먼저 열려 #동서독 시민들 얼싸안고 축제의 밤

호네커, 인민들 순종 거부하자 당황

1989년 11월 21일 포츠담광장 부근의 베를린장벽이 부분적으로 허물어진 모습.[사진 프리츠 비라르다, 폰 노이어, 베른하르트 젤리거, 독일연방문서청]

1989년 11월 21일 포츠담광장 부근의 베를린장벽이 부분적으로 허물어진 모습.[사진 프리츠 비라르다, 폰 노이어, 베른하르트 젤리거, 독일연방문서청]

동독 정부는 89년 10월 초에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주재 서독대사관과 폴란드 바르샤바 주재 서독대사관에 머무르고 있던 동독 주민들의 서독행을 처음으로 허가했는데 불과 며칠이 지나자 또다시 수천 명의 동독 주민들이 이곳에 몰려들었다. 동독 지도부 전체를 비롯하여 권력 수반인 에리히 호네커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호네커는 그해 여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시위가 격화되면서 매우 경직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시위대가 외쳤던 “우리는 시민이다”는 구호를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평생 신봉하며 살았던 공산주의 이념에 따르면 ‘당을 지키는 칼과 방패’인 강력한 슈타지의 호위 속에서 당 지도부는 공산주의의 근간인 인민들과 혼연일체를 이루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당 지도부를 향한 압박이 더욱 거세지자 SED 중앙위원회의 다른 위원들은 비상 대책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호네커와 두 명의 최측근인 귄터 미탁 경제담당위원, 그리고 요아힘 헤르만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당 기관지(북한의 노동신문에 해당) 대표를 사태의 책임자로 지목하고 당 정치국 회의를 통해 해임했다. 이 과정에서 사전에 슈타지와 인민군에게 동의를 구했으며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도 알렸다고 한다. 그후 에곤 크렌츠가 새로 당 서기장 직을 넘겨받게 된다. 그러나 호네커와 같이 권력의 오랜 핵심 인물이며 슈타지의 수장이었던 에리히 밀케는 유임됐다. 당시 동독이 처한 상황을 세 명의 해임된 인사들의 책임으로 돌리고 자신들이 나서서 사회주의 체제의 새로운 시작을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은 바로 시민들의 커다란 반대에 부딪혔다. 오히려 동독 주민들은 소위 건강상의 이유로 호네커가 권좌에서 물러나자 이때부터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맹렬하게 개혁을 요구했다.

고층 건물들이 들어선 현재의 베를린 포츠담광장. 예전에는 장벽이 지나던 곳이었다.[사진 프리츠 비라르다, 폰 노이어, 베른하르트 젤리거, 독일연방문서청]

고층 건물들이 들어선 현재의 베를린 포츠담광장. 예전에는 장벽이 지나던 곳이었다.[사진 프리츠 비라르다, 폰 노이어, 베른하르트 젤리거, 독일연방문서청]

여행의 자유를 불허하는 것은 언제나 동독 주민들이 가지는 주요 불만 사항들 중 하나였다. 기괴하게 서 있는 장벽은 어디에서나 눈에 띄었으며 서베를린으로 가는 길도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크렌츠가 책임을 맡게된 새로운 정치국은 동독 주민들의 상시 출국과 서독으로의 개인 여행을 허가하는 방안을 결정했다.

이는 규정에 따라 경계검문소를 통해 출입하는 것으로 정해졌으며 그 시행 날짜는 11월 10일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11월 9일 저녁에 급하게 기자회견이 열렸으며 준비가 미비했던 정치국 대변인인 귄터 샤보브스키는 해당 규정이 언제 발효되느냐는 질문에 서류를 뒤적이더니 “제가 아는 바로는 지금 바로 시행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소식이 서독 저녁 8시 뉴스를 통해 방송이 되자 많은 동독 사람이 뉴스를 보았고 이 내용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많은 사람이 베를린 경계검문소들이 있는 장소로 몰려들었다.

86년 서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 구역의 베를린장벽. 동독 국경 수비대가 보인다.[사진 프리츠 비라르다, 폰 노이어, 베른하르트 젤리거, 독일연방문서청]

86년 서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 구역의 베를린장벽. 동독 국경 수비대가 보인다.[사진 프리츠 비라르다, 폰 노이어, 베른하르트 젤리거, 독일연방문서청]

모여든 수천 명의 주민들이 장벽을 열 것을 요구하자 놀란 검문소 병사들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경계병들은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유혈사태를 바라지는 않았다. 결국 경계병사들은 대중들의 압력에 경계업무를 포기했으며 장벽이 열렸다. 장벽이 가장 먼저 열린 곳은 오후 9시20분쯤 베를린의 가운데에 위치한 보른홀머슈트라세였다. 곧이어 베를린의 다른 검문소도 열렸으며 내독 간 경계선도 개방됐다. 입국 비자도 필요 없어졌다. 출입국 심사 없이 서독 방문이 가능해진 것이다.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이날 밤은 축제가 열렸다. 마찬가지로 분단의 피해자였던 수천 명의 서베를린 시민들도 장벽으로 몰려나와 기쁜 마음으로 동독 주민들을 환영했다. 사람들은 한데 어울려 노래부르고 기뻐했으며 서로 부둥켜안았다. 이제는 더 이상 탈출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새로운 만남의 순간이 시작된 것이다.

빌리 브란트 “뿌리 같으면 결국 함께 자라”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 대변인인 귄터 샤보브스키가 ’지금 바로, 즉시“ 여행 자유화를 허가한다고 밝혔던 89년 11월 9일 저녁의 기념비적인 기자회견. [사진 프리츠 비라르다, 폰 노이어, 베른하르트 젤리거, 독일연방문서청]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 대변인인 귄터 샤보브스키가 ’지금 바로, 즉시“ 여행 자유화를 허가한다고 밝혔던 89년 11월 9일 저녁의 기념비적인 기자회견. [사진 프리츠 비라르다, 폰 노이어, 베른하르트 젤리거, 독일연방문서청]

이렇게 동독의 종말이 다가왔다. 이날부터 며칠 동안 동서독 간의 경계에는 수㎞에 이르는 트라비나 라다 또는 바르트부르크와 같은 동독 자동차들의 행렬이 줄 지어 늘어섰다. 이들은 모두 서독을 방문하려는 사람들이었으며 동독 철도청인 라이히스반(Reichsbahn)은 서독으로 가는 특별열차편을 투입했다.

경계 인근에 있는 서독 도시의 가게들은 24시간 문을 열었다. 모든 동독 주민들은 100마르크의 ‘축하금’을 받았다. 서독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동독 주민들은 서독을 직접 한 번 보기 위해서 방문을 한 것이며 보고 나서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치적인 통합에 대한 요구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40년 동안 지속됐던 분단을 넘어서 우선은 서로 기쁘게 만나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이는 서베를린 시장과 서독 연방 총리를 지낸 빌리 브란트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뿌리가 같은 것은 결국 함께 자란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당시에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 중이었으며 바로 그 다음 날인 11월 10일에 독일로 돌아왔다. 베를린장벽 붕괴는 이제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굳어졌다.

동독의 사례와 같이 북한의 대표가 북한 경계의 개방을 알리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할까? 적어도 현재로는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북한의 입장에서 국경의 개방이란 자신들의 주민들 앞에서 항복을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1989년 11월 9일까지는 동독에게도 마찬가지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올해로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지 꼭 30년이 된다. 독일은 한국의 통일을 함께 축하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희망한다. <계속>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

※ 번역 : 김영수 한스 자이델 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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