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컴거품이 막 부풀어 오른 1998년 디플레이션을 경고한 이코노미스트가 나타났다. 당시 그는 일본인도 아니었다. 미국 비주류 경제분석가도 아니다. ‘양키 금융의 상징’이었던 투자은행 메릴린치의 경제분석 책임자였다. 바로 게리 실링(사진) 현 게리실링(투자자문)의 대표다. 한국의 각종 물가지표가 고개를 떨구는 요즘 ‘경영자와 투자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란 의문을 품고 뉴저지 스프링필드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디플레이션』 등 관련 서적만 7권을 펴낸 디플레이션 최고 전문가다.
디플레이션 전문가 게리 실링 #‘IT 혁명’ 한국·미국 물가지표에 #실제 물가 상황 제대로 반영 안 돼 #Fed·WB 등 세계 경제 침체 경고 #CEO들 디플레 대비해 부채 갚고 #투자자는 달러·국채 등에 관심을
- 90년대 말부터 디플레이션을 경고했다. 놀랍다.
- “그때 이코노미스트 대부분은 인플레이션을 걱정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중앙은행가와 경제분석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만했다. 닷컴주 등 주가가 급등하기 시작했다. 인플레이션 파이터가 중앙은행가의 기본 자격으로 여겨질 때였다.”
- 역발상 투자자(contrarian)로 보인다.
- “(목소리를 높이며) 결코 나는 역발상 투자자가 아니다. 그들은 지속해서 다수의 반대편에 선다. 내가 다수설을 따를 때도 잦다.”
디플레이션 세계화의 그늘
- 요즘 한국에서는 물가 하락이 디플레이션 조짐인지를 두고 논쟁이 한창이다.
-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많은 경제분석가가 ‘아직 미국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는 아니다’며 ‘디플레이션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나는 미국·한국 등 산업화한 나라의 물가지표들이 실제 물가 상황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정보기술(IT) 혁명으로 발생한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물가지표에 제대로 반영되고 있지 않아서다.”
실링 대표가 90년대 후반부터 디플레이션을 경고할 때 주목한 요인은 세계화였다. 그는 "세계화는 값싼 노동으로 생산된 제품과 서비스의 공급 과잉”이라고 설명했다.
-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중국산에 보호관세를 매기는 요즘에도 세계화로 디플레이션을 설명할 수 있을까.
- "트럼프의 관세 폭탄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만큼 강력하지 않다. 여전히 값싼 공산품이 미국 시장에 넘쳐나고 있다. 또 세계화 시대 미국과 한국 등 산업화한 나라에서 질 좋고 노동조합을 통해 보호받는 일자리가 대거 사라졌다(decimated). 실질 임금이 정체 또는 하락한 이유다. 물론 세계화만이 디플레이션 원인은 아니다.”
- 다른 요인도 있다는 말인가.
- "세계 경제 침체도 물가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미 Fed뿐 아니라 세계은행(WB) 등이 내년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 나는 소비자물가지수(CPI)보다 나만의 지표를 주목하고 있다.”
- 그게 무엇인가.
- "우선 구리 등 원자재 가격을 주목한다. 원자재 가격은 생산 활동의 바로미터다. 생산자의 판매가격에도 영향을 준다. 또 나는 미국의 평균 약값도 살펴본다. 미국 국내총생산(GDP) 가운데 18%가 의료비이고, 이 가운데 소비자의 수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가 평균 약값이다. 나라마다 생산과 소비 흐름을 아주 빠르게 보여주는 지표는 다르다. 경영자와 투자자는 자기 나라에 맞는 몇 가지 지표를 발굴해 디플레이션 여부를 판단하면 좋다.”
게리 대표는 미국 등 주요 나라 중앙은행가들이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훈련돼 있다는 점을 지적하곤 한다. 그 바람에 디플레이션 파이터가 주요 중앙은행 내부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바람에 중앙은행이 디플레이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양적 완화(QE)와 기준금리 인하 외엔 뾰족한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기업 최고경영자(CEO)들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했다.
- 무슨 말인가.
- "요즘 기업인은 인플레이션을 당연하게 여기고 경영계획을 세우고 있다. 디플레이션 상황은 상상도 못 하고 있다. 이제는 CEO부터 생각을 바꿔야 한다.”
- 디플레이션 시대 기업 경영은 어떨까.
- "매출이 줄어든다. 물가상승이 아니라 물가하락 기대심리가 자리 잡는다. 사람들이 소비를 최대한 늦추려 한다. 또 개인은 일자리 불안과 가계부채 때문에 소비를 줄이며 가능한 한 현금을 움켜쥐려고 한다. 그 바람에 기업의 매출이 줄고, 이번에는 경영자도 만약을 대비해 현금을 비축한다. 경제 전체적으로 현금 수요가 증가한다. 디플레이션은 곧 현찰 선호다.”
- 빚은 어떻게 해야 하나.
- "디플레이션 시대 빚의 고통은 나날이 증가한다. 물가가 떨어지는 만큼 부채의 실질 가치가 늘어나서다. CEO 처지에서 보면 매출은 줄어드는데 이미 빌린 돈의 금리는 좀체 내려가지 않는다. 이중고다. 부채를 지금부터 줄여나가야 한다.”
- CEO가 주목해야 할 것은 또 없을까.
- "경쟁 기업들이 설비자동화를 더욱 강력하게 추진할 것이다. 매출이 주는 시대에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 노동 투입을 줄여 비용을 낮춰야 해서다. 이런 자동화가 낳은 실직 때문에 가계의 소비 긴축을 더 부채질한다.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이다.”
실링 대표가 쓴 디플레이션 책 가운데는 투자 노하우를 소개하는 것도 있다. 상아탑(대학)이 아니라 투자은행의 이코노미스트였기에 실전 투자에도 관심을 기울인 듯했다.
- 디플레이션을 대비해 어떤 자산에 투자해야 할까.
- "누가 뭐래도 현금과 국채다. 현금 가운데 안전자산의 대표 격인 미국 달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이다.”
각국 중앙은행 ‘디플레 파이터’ 없어
- 금은 어떨까. 인플레이션 시대엔 훌륭한 헤지 수단이었는데.
- "금 가격에는 전쟁과 사회 불안 등 비경제적인 요인이 작용한다. 디플레이션 시대라고 무조건 값이 내려간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안전자산이라도 말하기 더욱 어렵다.”
- 투자자가 사지 말아야 할 자산이 있을까.
- "디플레이션 시대에는 소비가 줄어든다고 말했다. 당연히 소비재를 주로 생산하는 기업의 주식은 피해야 한다. 식음료, 가구, 담배 등이 대표적인 예다. 나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들 종목을 공매도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게리 실링 미국 앰허스트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뒤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샌프란시스코연방준비은행 경제분석가로 일하다 투자은행 메릴린치의 리서치 부문을 창설했다. 그는 1973년 침체를 사전에 예측해 명성을 얻었다. 또 물가가 급등한 1980년대 초에는 인플레이션 시대의 종언을 주장했다. 그의 이름 앞에 ‘월가의 전설적인 이코노미스트’란 수식어가 자주 붙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