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산다는 것, 한 발 떨어져 보면 눈물나게 아름다운…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46)

가까이서 보면 불편하지만,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눈. [연합뉴스]

가까이서 보면 불편하지만,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눈. [연합뉴스]

품에 안고 누리는 것보다, 한 발자국 떨어져 그리워할 때 더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우선, 눈(雪)이 그렇다.

눈에 관한 나의 기억은 대개 불편함에 관한 것이다. 꽁꽁 언 손을 녹여가며 하루종일 제설작업을 했던 날도 있고, 갑자기 폭설이 쏟아지는데 스노체인이 없어 노심초사하며 차를 몰았던 기억도 있다. 그뿐이랴, 길에서 넘어진 일, 바짓단이 더러워진 일…다양한 일은 겪었지만 대개는 불편한 일들뿐이었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 눈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탁탁 두드리다가 “어, 눈 온다”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창문을 봤을 때, 조용히 흩날리는 싸락눈, 그 풍경이 왜 그렇게 평온하고 아름답던지.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 또한 그렇다. 삶은 그 한복판에 있어 보면 괴로운 일투성이지만, 한 발자국 떨어져 관찰하면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겨울밤에 눈 내리는 풍경 보며 이런 얘기를 했던 시인이 있다.

싸락눈 싸락눈 쌀밥 같은 흰 싸락눈
깊은 그믐밤 화롯불에 둘러앉아
군밤을 까먹던 그 새까맣던 밤

선잠을 깨어 옛날에 젖는다
한세월 새하얗게 잊었던 일들이
오는가 오기는 오는가
밤거미처럼 내려와서 아른댄다
산다는 일이라니
이렇게 살아 있는 일이라니
-박남준, 「겨울밤」 전문. 시집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문학동네, 2000)』에 수록.

이 시는 후반부까지 이렇다 할 매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시어는 평이하고 서사는 모호하다. 하지만 마지막 두 행이 이 시를 좋은 시로 만든다. ‘산다는 일이라니/이렇게 살아 있는 일이라니’라니. 삶에 관한 기쁨과 연민이 고루 느껴지는 조용한 감탄문이다. 거리를 두고 삶을 바라봤으므로 떠오른 감상인지도 모른다.

시인 박남준. [중앙포토]

시인 박남준. [중앙포토]

시를 쓴 박남준은 1957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1984년부터 시를 발표했고, 1991년부터 산에 살았다. 이 산 저 산 다녔는데, 지금은 ‘지리산 시인’으로 불리고 있다. 그의 지인들이 말하는 박 시인은 음주가무의 귀재다. 잘 마시고 잘 놀고,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도 좋단다. 그 자신도 워낙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데도 그는 산속에 혼자 산다. 품에 안고 누리는 것보다, 한 발짝 떨어져 그리워하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거리 두기’의 달인이라 불러도 좋을 시인, 평소 돈도 모으지 않는다. 자신이 ‘관 값’이라고 부르는 200만원 외에는 저축하지 않는단다. 남는 돈은 곧잘 기부한다. 그는 재물과 역시 거리를 두고 있다.

시인은 몇 해 전에 경상남도의 어느 무명 출판사를 통해 시집을 냈다. 주로 서울의 유명 출판사들과 손을 잡았던 그가 어쩐 일일까. 그는 말로는 지역 문화와 지역 예술가를 강조하면서 출판은 ‘중앙’의 출판사들과 해온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다시 한번 변방을 고집한다. 중앙에 속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는 나는, 그래서 삶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 나는, 겨울밤이면 이런 박남준을 읽으며 ‘적당한 거리’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