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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간 A4 60장 써야하는데…답안지도 못쓰는 변시생들 사연

중앙일보

입력

로스쿨 학생 C씨가 오른손에 손목보호대를 한 모습. 변호사시험과 모의고사, 로스쿨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모두 손으로 적어야 하기 때문에 상당수 로스쿨 학생들이 손목 통증을 참지 못하고 손목보호대를 한다. 박지영 인턴기자

로스쿨 학생 C씨가 오른손에 손목보호대를 한 모습. 변호사시험과 모의고사, 로스쿨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모두 손으로 적어야 하기 때문에 상당수 로스쿨 학생들이 손목 통증을 참지 못하고 손목보호대를 한다. 박지영 인턴기자

지방 소재 로스쿨 3학년 A(28)씨는 지난 주 치른 모의 변호사시험에서 '실력 발휘'를 못 했다. 극심한 손목 통증으로 답안지에 적어야 했던 내용 일부를 쓸 수 없었다.

로스쿨 학생들 "변시 컴퓨터 사용 허용하라" #교수들도 "글씨 알아보기 힘들어, 개선해야" #미국은 응시생이 손글씨와 컴퓨터 중 선택 #법무부는 "공간, 예산, 형평성 고려해야"

내년 1월 변호사시험을 앞두고 치렀던 모의 시험은 시험일만 나흘이다. 첫날·이튿날은 각각 4시간, 사흘째는 3시간 30분, 나흘째는 5시간 30분 동안 손으로 답안을 써야 한다.

A씨는 “논술형 시험의 답안지를 써야할 양이 다 합치면 A4용지로 따져 60~70쪽에 이른다. 하루 시험을 치면 손과 어깨가 아파 한동안 휴대전화 메시지도 못 보낸다”고 말했다.

3년 간의 로스쿨 재학 중 학기마다 치르는 중간·기말고사도 비슷한 방식이다. A씨는 “로스쿨에서 3년을 보내면 손가락 끝부터 손목, 어깨까지 망가진다는 말까지 돈다"며 "변호사가 되면 업무는 컴퓨터로 거의 다 할 것 같은데 단지 시험을 위해 몸을 혹사하는 게 이해 안 된다”고 말했다.

로스쿨 학생 의견은.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로스쿨 학생 의견은.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손으로 답안을 적는 현행 변호사시험을 컴퓨터 기반 고사(CBT)로 바꾸자는 로스쿨 학생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7월 전국 25개 로스쿨 학생회장단으로 구성된 법학전문대학원 학생협의회(법학협)가 재학생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77.2%(1759명)가 ‘컴퓨터 고사 도입’에 찬성했다.

정상윤 의장(32)은 “조만간 설문 조사와 함께 법무부에 의견서를 전달할 예정”이라며 “수년간 제기됐던 사안인 만큼 실효성 있는 개선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스쿨 학생들에 따르면 워낙 많은 손글씨를 쓰는 통에 이들 사이에선 손목 보호대와 파스가 '필수품'이 됐다. 서울 소재 로스쿨 3학년 B(29)씨는 "대부분의 학생이 '동전 파스'를 쓰고 있다. 여학생의 절반 정도는 손목보호대를 쓴다"고 전했다.

인터넷을 통해 손목보호대를 구매해 쓰고 있다는 그는 "손목이 너무 아파 한의원에 다닌 적도 있다. 사실 보호대를 하면 글씨 쓰기엔 오히려 불편하지만 손목을 보호하려면 참는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변호사 시험을 참관했던 법무부 관계자도 언론에 "워낙 많은 글을 쓰니 펜 하나로 부족하다. 안타깝게도 중간 휴식일에 병원 치료를 받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는 글을 기고했다.

 변호사 시험 모의고사의 3교시 답안지를 책상에 늘어놓은 모습. 박지영 인턴기자

변호사 시험 모의고사의 3교시 답안지를 책상에 늘어놓은 모습. 박지영 인턴기자

변호사시험이 변호사의 실무 역량이란 시험의 목적과 거리가 멀다는 지적도 나온다. 같은 로스쿨에 재학 중인 C(30)씨는 “법령·판례·논문 같은 자료를 검색하고 사건에 녹여내는 게 중요할텐데, 지금 시험은 판례를 원론적인 수준에서 암기하고 기계적으로 많이 쓰는 훈련만 한다”고 꼬집었다.

교수들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명순구 고려대 법전원 교수는 “학생들은 글씨체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하고, 채점위원들도 일부 학생의 글씨를 알아보는데 오래 걸려 결과 발표까지 늦어진다”고 지적했다.

명 교수는 미국 사례를 참조하자고 제안했다. 미국의 변시는 지필고사와 컴퓨터 고사 중 수험자가 원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사전 신청자에 한해 개인이 지참한 노트북에 보안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컴퓨터 답안 작성을 허락한다.

로스쿨 학생이 손목보호대를 하고 공부하는 모습. 박지영 인턴기자

로스쿨 학생이 손목보호대를 하고 공부하는 모습. 박지영 인턴기자

변시를 주관하는 법무부는 컴퓨터 고사를 당장 도입하는 건 어렵다는 입장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선진국 사례를 점검하고 관련 기관들의 의견을 수집하고 있지만 부정행위 방지, 타자 속도, 컴퓨터 활용 능력 등 학생 간 형평성을 고려해야 하는 까다로운 문제라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변호사 시험은 전국 5개 권역(내년 6개 권역)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예산과 공간 확보가 쉽지 않다는 점도 밝혔다. 그는 “행정고시, 입법고시도 지필고사로 이뤄진다. 3000명이 한 번에 응시하는 변호사 시험에 컴퓨터 고사를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라고 전했다.

정상윤 법학협 의장은 “로스쿨생 뿐 아니라 다른 국가시험 응시자도 이용하는 전용 시설을 마련하는 것도 대안”이라며 “변호사 시험의 합격률, 한글 법전 사용 등에 대한 문제도 있는 만큼 수험생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법무부와 소통 창구가 생겼으면 한다”고 말했다.

변시생이 공부중인 책상. 박지영 인턴기자

변시생이 공부중인 책상. 박지영 인턴기자

천인성 기자, 박지영 인턴기자(고려대 한국사)
guch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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