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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민의 시선

자유한국당이 잘한 건 하나라도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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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논설위원

이정민 논설위원

조국 사태로 달궈졌던 저녁자리 풍경이 요즘 달라졌다. 조국 일가를 향하던 비판의 화살이 이제 자유한국당을 향한다.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패스트트랙 의원’ 가산점 논란에 #하루새 입당 보류 ‘박찬주 해프닝’ #정권 비난만 말고 대안·비전을 …

투톱이라는 대표와 원내대표가 주거니 받거니 터뜨리는 ‘자책골’이 한 손으로 꼽기에 부족할 정도다. 조국 법무장관 사퇴에 공을 세웠다며 청문회에 관여한 전·현직 의원들을 불러 표창장과 50만원이 든 봉투를 건네는 퍼포먼스를 연출한 게 며칠 전이다. 그것도 언론이 버젓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말이다. ‘패스트트랙’ 저지에 가담한 의원들에 대한 검찰의 소환조사 압박이 조여오자 나경원 원내대표는 느닷없이 이들에게 총선 공천 때 가산점을 줘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을 들고나와 빈축을 샀다. 어제는 ‘공관병 갑질’ 논란의 주역인 박찬주 예비역 육군대장을 황교안 대표의 ‘영입 인사 1호’로 내세우려다가 당내에서조차 비판이 일자 입당 보류를 발표했다. 황 대표의 인식이 국민의 눈높이와 얼마나 괴리돼 있는지 보여준 단면이다. 홈페이지에서 내려진 ‘벌거벗은 임금님’ 애니메이션 논란은 품격 없음을 드러냈다.

이게 113석의 의석을 가진 제1야당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굳이 여론조사 결과를 들이댈 것도 없이, 국민들이 왜 한국당을 대안 정당으로 신뢰하지 못하는지 보여준다.

문재인 정부에 실망해 이탈한 보수·중도층이 한국당 지지로 옮아가지 않고 있다. 한국당의 철학 부재와 시대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상상력의 빈곤 때문이다. 한국당은 당 존립의 근거를 자유민주주의의 이념과 시장경제의 가치에 두고 있다. 당헌에 그렇게 못박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 다른 행동을 해왔다.

반공과 박정희 정신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인 양 포장해왔고, 그 적자(嫡子) 행세를 해왔다. 박정희 정신과 반공이 대한민국의 번영을 가져온 토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압축 성장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존중과 창의성·다양성 같은 본질적 가치가 무시되고 국가 중심 사고와 획일주의·전체주의를 불러오는 부작용을 낳았다. 입으로는 시장경제를 말하면서도 실제론 자유로운 시장 작동을 막는 규제를 양산했다. ‘유사(類似) 자유민주주의’ 였고 ‘유사 시장경제’였다. 보수적 가치 지키기에 대한 불철저함은 얼치기 좌파가 싹트고 뿌리내린 토대가 됐다. 비극적이지만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은 역설적으로, 보수 정당이 환골탈태할 절호의 기회였다. 박정희 유산과 결별하고,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튼튼한 골조 위에 소외세력을 위한 사회 안전망(복지)의 덮개를 씌우는 ‘리셋 전략’을 세울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한국당은 시간을 허비했다. 친박-비박으로 갈려 탄핵 책임 싸움으로 금쪽같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조국 사태에서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과 진보 진영의 균열에 눈이 팔려 정권 공격에만 몰두할 뿐 시대의 화두가 된 공정과 정의의 실현을 위한 고민과 비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공정에 목말라하는 젊은층과 공감하지 못하고, 정의 실현을 중시하는 중년의 중도층을 흡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공영방송이 정권의 입맛에만 맞는 편파 보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도, 자신들이 집권했을 때 공영방송 정상화를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지 고민하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야당이어서 할 수 없다? 소수여서 힘이 없다고? 이것은 반만 맞는 얘기다. 한국당은 여야 4당 합의로 추진하려던 ‘패스트트랙’ 지정 법안 처리를 몸싸움까지 해가며 무산시키는 위력을 발휘하지 않았는가. 결국 의지와 신념의 문제다. 요즘 경제계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들의 이해가 걸린 선거법 처리는 몸을 던져가며 막은 한국당이, 개인정보보호법과 같이 AI(인공지능) 시대의 뉴 비즈니스를 위한 ‘데이터 3법’ 처리에 앞장서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곤 한다. 여야 간 특별한 쟁점이 없는 법안이 벌써 1년 가까이 국회에 발이 묶여 있는데도 말이다.

나 원내대표는 국회 연설에서 광화문 집회를 언급하며 “평범한 국민의 위대한 저항” “10월 항쟁”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권 2년 반, 무엇하나 잘한 것이 없는 완전한 실패의 국정 운영이었다”고 목청을 높였다. 맞는 말이다.

동시에 국민들이 지금 이렇게 묻고 있는 것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럼 한국당이 잘한 건 하나라도 있는가”라고.

이정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