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인재양성으로 독립 토대 만든 이 사람, 송기식을 기억하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60)

‘독립운동의 성지(聖地)’ 경북 안동에는 해창(海窓) 송기식(宋基植‧1878∼1949)이란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조현재)은 10월 29일 안동시의 지원으로 ‘송기식의 학문과 사상’이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를 열었다.

이은영 성균관대 한문학과 초빙교수는 이날 “유학자 해창이 안동의 근대식 학교 봉양의숙(鳳陽義塾)을 운영하면서 일본의 억압으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1911년 국채보상운동의 일환으로 금연을 실천하던 단연회 기금을 빌려다 썼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소문이 나자 일본 경찰의 감시는 더 엄해졌다. 학생들은 울면서도 학교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경북 안동시 송천동에 송기식이 운영한 봉양서숙 자리에 세워진 하락정. [사진 공정식]

경북 안동시 송천동에 송기식이 운영한 봉양서숙 자리에 세워진 하락정. [사진 공정식]

해창은 학교 운영을 위해 하는 수없이 사채를 쓰다가 다시 천도교 자금을 끌어들였다. 그러자 유림의 비난이 쏟아졌다. 해창은 그래도 인재 양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날 학술발표장에는 이근필 퇴계(이황) 종손과 김종길 학봉(김성일) 종손 등 주요 종가와 유림, 해창의 후손인 진천 송씨 등 1000여 명이 참석해 관심을 반영했다.

해창은 1910년 경술국치 때 스승 이만도의 단식 자결을 보고 1911년 식음을 전폐한다. 그러자 조부가 나서 수치를 견디고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장부(丈夫)의 도리라며 만류했다. 해창은 광복을 위해서는 인재 배양이 급선무라며 가산을 털어 의숙을 증축한다. 그는 유교 경전만 공부한 게 아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다윈의 진화론, 벤자민 플랭클린의 전기에 관한 학설 등 서양 학문까지 두루 섭렵했다.

10월 29일 한국국학진흥원이 주관한 송기식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 송의호]

10월 29일 한국국학진흥원이 주관한 송기식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 송의호]

1914년 해창은 만주로 망명해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의 연락을 받는다. 두 사람은 서산 김흥락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선후배 사이였다. 그는 만주로 향하던 중 어른의 병환 기별을 듣고 발길을 돌린다. 1919년 3‧1만세운동은 안동까지 퍼졌다. 해창은 김형칠 등과 함께 봉양의숙과 협동학교, 동화학교, 보문학교 등 4개 학교가 같이 행동할 것을 도모한다.

3월 18일 안동장터에서 해창은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 쓴 깃발을 흔들며 군중을 이끌고 시위에 나선다. 시위가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일본 군경은 총검으로 군중을 탄압하고 해창 등 주동자 14명을 체포했다. 해창은 안동과 대구를 거쳐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는 옥중에서 "이천만의 만세 소리 우레 치듯 울려 퍼지니(二千萬口發雷聲)/형체 없는 철옹성을 만들어 냈다네(團得無形鐵瓮城)…"라는 한시를 읊으며 3‧1운동이 막을 수 없는 독립의 거대한 물결임을 확신한다.

혁신유학자 송기식의 대표 저술인 『유교유신론』. [사진 공정식]

혁신유학자 송기식의 대표 저술인 『유교유신론』. [사진 공정식]

송기식이 초심자의 한문 교육을 위해 만들었던 『속수한문훈몽』의 목판.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송기식이 초심자의 한문 교육을 위해 만들었던 『속수한문훈몽』의 목판.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1920년 해창은 출옥한다.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된다. 그러자 넷째 동생 봉산(鳳山) 송연식(宋淵植)이 봉양의숙을 맡아 인재 양성을 이어간다.

이은영 교수와 함께 이날 이승용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이규필 경북대 한문학과 교수, 김순석‧박경환 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등도 ‘송기식의 가풍’ 등 논문을 발표했다.

안동 출신 독립유공자는 240명이 넘는다. 시‧군 단위에서 200명이 넘는 경우는 전국에서 안동이 유일하다.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순절지사(殉節志士)도 이만도 등 8명이다. 또 안동은 1894년 갑오의병으로 한국에서 독립운동이 최초로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안동이 독립운동의 성지로 불리는 배경이다. 그 중 송기식은 안동의 3‧1운동을 이끈 주역이었다.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