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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문화난장

흙으로 끓인 국, 종이로 빚은 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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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지난 26~27일자 중앙선데이 16면 전면에 실린 ‘감귤나라 서귀포’ 사진에 눈길이 갔다. 서귀포 강정동 일대를 찍은 위성사진이다. 모자이크처럼 곳곳에 펼쳐진 귤밭이 제법 장관을 이룬다. 지금이야 비닐하우스 덕분에 언제 어디서든 맛볼 수 있는, 너무 흔해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귤이지만 예전에는 사정이 달랐다. 겨울철 부족한 비타민C를 채워주는 귀한 과일이었다. 말린 귤껍질을 달여서 차로도 즐겨 마셨다.

이념에 빠진 사대부의 말 #먹지도 못할 음식 같은 것 #200년 전 서유구의 질타 #실용·일상의 가치 깨우쳐

조선시대 귤껍질은 고급 식재료였다. 일반 백성은 쉽게 접할 수 없었다. 사대부 집안에선 먹고 남은 귤껍질을 갈무리해 두었다가 음식 향미를 돋우는 데 썼다. 실학자 서유구(1764~1845)는 상세한 레시피를 남겼다. 예컨대 흑두초(黑豆炒·검은콩자반)를 보자. ‘귤껍질채·생강채 각각 약간, 간장 1사발, 참기름 1사발, 벌꿀 1 작은 잔을 서리태와 함께 넣고 고루 휘저어 중간 불로 졸인다’고 적었다.

지난주 토요일 점심때 흑두초를 시식했다. 상큼한 귤향이 입안 가득 번졌다. 서리태를 푹 삶은 까닭에 씹기 딱딱한 요즘 콩자반과 달리 이가 튼튼하지 않은 사람도 큰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 처음 맛본 생소한 음식이지만 요즘 밥상에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또 장만초(醬蠻椒)는 밑반찬으로 훌륭했다. 붉은 고추(만초)의 씨를 제거하고, 그 안에 두부·파·고기를 저며 넣은 다음 졸인 간장에 담가놓은 요리다.

이날 자리엔 옛 조상들 식탁에 오른 음식 10여 가지가 선보였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 먹었던 메주 14종류도 재현됐다. 행사의 주제는 ‘우리 장(醬)의 오래된 미래, 정조지(鼎俎志)’. ‘정조지’는 솥(정)과 도마(조)를 뜻하는 음식백과로, 서유구가 40년에 걸쳐 정리한 조선시대 최대 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여덟 번째 항목이다. 무려 1200여 가지에 달하는 음식이 나오고, 조리법은 그보다 더 방대하다.

행사의 주인공은 ‘장’이었다. 한국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장문화의 계승·확산·발전 방향을 얘기했다. 200여 년 전 고문헌에 갇힌 장과 관련 음식을 21세기 식탁으로 끌어오려는 시도다. 무엇보다 다양한 장 종류가 놀라웠다. 메주콩은 물론 고구마·밀가루·보릿가루·팥가루·메밀가루 등 여러 재료를 빚어 만들었다. 서유구 자신도 “장은 성질과 맛이 각각 다르고 효능과 쓰임새도 다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누런 메주콩으로 만든 장만을 쓴다”며 당대 협소한 음식문화를 아쉬워했다.

조선 후기 음식백과사전 ‘정조지’에 나오는 음식 10여 가지를 재현했다. 슬로푸드문화원·간장포럼·임원경제연구소·식생활교육국민네트워크가 함께했다. 박정호 기자

조선 후기 음식백과사전 ‘정조지’에 나오는 음식 10여 가지를 재현했다. 슬로푸드문화원·간장포럼·임원경제연구소·식생활교육국민네트워크가 함께했다. 박정호 기자

조선 최고 명가 출신인 서유구는 유별난 학자였다. 예부터 내려온 문헌을 샅샅이 뒤지고, 그 또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19세기판 음식대사전을 완성했다. 조리법도 구체적이다. 각종 재료와 비율, 요리 방법과 시간 등을 명시해 요즘 음식책으로도 손색이 없다. 서유구는 고매한 성현의 말씀을 달고 살았던 많은 사대부와 달리 백성들 삶의 현장에서 학문의 뿌리를 찾았다. 여성 전용 공간인 부엌·밥상도 주목한 게 대표적 사례다. 농사·채소·과일·옷감·가축·물고기·한옥·건강·천문 등 먹고 입고 잠자는 일상을 살찌우는 방안을 찾아 나섰다.

『임원경제지』를 간추린 창작 판소리를 부르고 있는 박애란 명창.

『임원경제지』를 간추린 창작 판소리를 부르고 있는 박애란 명창.

서유구의 개혁성·진취성은 유교 이념사회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됐다. “사대부가 고담(高談)만을 논하면서 오곡조차 구별할 줄 모른다. 어찌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농민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나는 예전에 경학(철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말할 만한 것은 옛사람들이 모두 말했으니, 내가 거기다 두 번 세 번 말해 봐야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처사들이 이리저리 생각하여 한 말은 ‘흙으로 끓인 국’(土羹)이었고, ‘종이로 빚은 떡’(紙餠)이었다”고 비판했다. 좌파니, 우파니 케케묵은 이념에 사로잡힌 이 시대 위정자들에 던지는 ‘레드 카드’처럼 다가왔다.

세상이 달라졌다. 200여 년의 장과 음식을 재현한다고 옛 맛을 되살릴 수 없다. 무엇보다 재료가 바뀌었고, 사람들 입맛도 변했다. 조상들이 전혀 몰랐던 지구촌 산해진미가 24시간 배달되는 시대다. 이날 행사도 복고 취향에 머무르지 않았다. 미래를 열어갈 과거의 잠재력을 캐물었다. 사람 섬김의 가치도 다짐했다. “정조지는 21세기에 던져진 전통음식의 타임캡슐”(정정기 임원경제연구소 번역팀장) “장맛은 우리 음식의 근본이다. 오래된 미래를 지켜나가자”(한복려 궁중음식문화재단 이사장) “음식은 나와 남의 생명을 키우는 것”(한식진흥원 이사장 선재 스님) 등이 맛깔나게 어울렸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