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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5개월 준비···록가수·운전기사 출신 늦깎이 공무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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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응시연령 폐지 10년 <상> 

황인택(40) 주무관 가족이 셋째 딸의 백일을 기념해 찍은 사진. [사진 황인택씨]

황인택(40) 주무관 가족이 셋째 딸의 백일을 기념해 찍은 사진. [사진 황인택씨]

서울 성동구 행당1동 주민센터에 근무하는 황인택(40) 주무관은 지난 5월 세 딸의 아빠가 됐다. 맞벌이하는 아내가 “아이는 많을수록 좋다”고 권유해 용기를 냈다. 요즘은 퇴근 후 막내딸의 웃음을 보는 게 그의 가장 큰 행복이다.

록가수·사장 이색 경력 4050 공무원 #정시 출퇴근, 정년보장 최대 매력 #“퇴직금으로 생활…배수진 치고 준비”

황 주무관은 30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둥이 아빠가 된 것은 순전히 직업이 바뀌어서”라며 “3년 전까지 방송사 PD로 일했는데 가끔 대상포진이 걸릴 만큼 격무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잦은 야근에다 두 딸을 키우다 보니 체력이 바닥났다. 고민 끝에 사표를 냈고 1년8개월간 공무원 9급 시험을 준비했다.

최종 합격까지 평균 2년5개월 준비
서울 도봉구에서 운전직 9급으로 일하는 강성민(40) 주무관은 10년 가까이 외국계 기업 임원의 자동차를 운전했다. 날마다 오전 7시에 출근해 하루 15~17시간씩 대기하거나 운전을 해야 했다. 강 주무관은 “한 달에 하루만 쉰 적도 있다. 대형버스 운전 경력을 쌓는 등 2년간 준비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고 전했다.

국가직 40·50 공시 합격생 200명 시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국가직 40·50 공시 합격생 200명 시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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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직원부터 자영업자, 전업주부, 록가수, 운전기사, 번역가, 간호사, 심지어 공무원까지-. 중앙일보 취재팀은 최근 3년 새 공채로 임용된 40대 이상 공무원 21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이들의 전직(前職)이 매우 다양했다. 2009년 공무원 응시연령 제한이 풀린 지 10년이 지나자 공무원 세계는 이제 ‘직업 백화점’이 됐다.

이들이 늦은 나이에 공무원에 도전한 가장 큰 이유는 비교적 여유 있게 근무하면서 정년(만 60세)을 보장받고 싶어서다. 공무원 조직은 정시 출퇴근이나 육아휴직, 안정적인 휴가 사용 문화가 정착돼 있다.

올 초 중앙선거관리위원회 7급에 임용된 이종원(48) 주무관은 공무원 시험을 두 번 치렀다. 그는 2012년 9급으로 임용된 적이 있다. 하지만 2년여 다니다가 사표를 냈다. 이 주무관은 “이왕이면 7급으로 시작해 보고 싶었다. 승진이나 보수 등을 고려하면 (공무원 시험 준비에) 2년은 더 투자해도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가족과 인연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게 하는 주요한 배경이다. 지난 8월 서울시 ‘최고령 신입’으로 임용된 장윤수(60) 주무관은 “평생 교편을 잡았던 아버지가 정년퇴임하는 걸 보면서 나도 공무원으로 정년을 맞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구청에 근무하는 최영수(41·가명·9급) 주무관은 젊어서 건초사료 유통사업을 하다 2010년 구제역 파동 때 부도를 냈다. 어릴 적 할머니 손에서 자란 그는 “(부도 후에)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했는데 할머니 생각을 하면서 ‘복지 공무원은 어떨까’ 생각하다 공무원이 됐다”고 했다.

이영훈 서울시 공개채용팀장은 “신규 임용되는 고령 공무원 중에는 매출 수십억원대 기업을 운영하다 부도 낸 기업인이나 록가수, 간호사 등 이색 경력자들이 꽤 있다”며 “왜 공무원에 도전하는지 소신이 분명해 나이와 관계없이 무난히 적응하고 있다”고 전했다.

늦깎이 공시생에게 공무원증을 목에 거는 일은 ‘더 좁은 바늘구멍’이다. 최근 3년간 40대 이상의 국가직 합격률 평균은 1.35%로, 경쟁률로는 74.1대 1이었다. 전체 경쟁률 46.1대 1보다 높았다.

개인별로 사연이 다르다 보니 시험 준비 기간도 차이가 난다. 최근 농림축산식품부 9급에 합격한 박영선(50·여)씨는 불과 50여 일 만에 합격했다. 영어 강사로 25년간 일해 수험생들이 가장 까다로워하는 영어 과목이 가장 쉬웠다고 한다. 직장 생활과 시험 준비를 병행해 8년이 걸린 사례도 있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 답한 신규 공무원들은 최종 합격까지 평균 2년5개월(14명 응답)이 걸렸다.

늦깎이 공시생을 유혹하는 주요한 이유가 안정적인 근무 여건과 정년 보장이라면, 현실적인 준비 수단은 ‘인강(인터넷 강의)’이었다. 서울 노량진 같은 학원가에서 오프라인 강의를 듣기보다는 주로 인터넷 수업과 수험 교재를 활용했다. 하루 평균 공부시간은 8.2시간이었다.

노량진 학원 대신 인터넷 강의로 공부
전북 전주에 살면서 중앙부처 9급에 합격한 권성찬(가명·51) 주무관은 “우연히 무료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서 공무원에 흥미를 가졌다. 인강이 없었다면 시도조차 못 했을 것 같다”고 했다. 장윤수(60) 주무관은 “스마트폰의 메모 기능을 활용해 암기한 내용을 직접 필기하면서 틈틈이 공부했다”며 자신이 적은 메모를 보여줬다.

늦은 나이에 준비하는 만큼 감수해야 할 것도 많다. 그중에 경제적인 부담이 가장 컸다. 이들의 변이다.

“퇴직금으로 생활비를 대면서 1년간 배수진을 쳤다.”(강성민 주무관) “애경사 다녀올 때마다 핀잔을 들었다.”(장윤수 주무관) “독서실 아르바이트로 6개월 용돈을 벌고 다시 공부했다. 시험에만 집중하기 어려웠다.”(김우성·가명·서울시 9급)

특별취재팀=이상재·박해리·윤상언 기자 lee.sangja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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