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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10월 수상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장원]

마중  
-설경미

요구르트 두 개가 마루 끝에 놓여 있다
빈 집을 살피다가 빨랫줄에 매달고 간
코숭이, 마당에 내려 걷어내는 저 고요

사람이 그리워서 대문에 귀를 걸고
십 분도 놓칠세라 꽃잎처럼 움켜쥔 채
이레 중 단 하루만은 기린목이 되는 여든

자세를 바꿔 앉자 삐걱 우는 대문 새로
호박 넝쿨손이 앞서 나가 반긴다
무더기 은방울꽃이 피고 있는 블라우스

[차상]

검은 달
-정두섭

은행도 참 별난 은행* 냉골에 불 들이면
골목은 짖어대고 망구는 악다구니
골백번 헤아렸지만, 딱 한 장! 모자라야

구들장 짊어지고 언덕배기 기어오른
구멍 숭숭 낮달이 꿍친 자리 메워준다
그깟 거 없어도 살지마는, 삭신이 쑤셔설랑

징하게 오래 사는 메리야 밥 묵자 밥
마냥 신난 혓바닥이 쭈그렁을 핥을 때
참말로 뜨신 눈총들, 분화구마다 활활

* 달동네 독거노인들에게 연탄을 무료로 나눠주는, 밥상공동체 연탄은행.

[차하]

치매
-윤종영

주인 잃고 정신 줄
놓아 버린 몽당 빗자루

헛간 앞에 웅크린 채
햇살만 쬐고 있다

지금은 어느 기억을
쓸어내고 있는 걸까

◆설경미

설경미

설경미

1968년 경주 출생. 경주문예대학 연구반 회원. 2018년 중앙시조백일장 5월 입상. 2018년 제21회 대구시조 전국공모전 입상

[이달의 심사평]

가을의 기운을 느껴서인지 투고 작품이 많았다. 많은 작품이 노인 또는 노령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주제는 급속하게 진행되는 우리 사회의 화두임이 틀림없다. 시조가 당면한 사회의 화두에 천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장원으로 뽑힌 설경미의 ‘마중’은 일주일에 하루 가족을 만나는 ‘기린목이 된’ 여든 노인을 그리고 있다. ‘코숭이가 걷어내’는 마당의 고요와 ‘대문에 귀를 거’는 노인의 정경이 시리고 아프지만, 마지막 수 중장과 종장에서 ‘호박 넝쿨손’과 ‘무더기 은방울꽃’의 만남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솜씨가 비범하다.

차상에 오른 정두섭의 ‘검은 달’은 가난한 노인이 살아가는 구체적 현장을 붙잡고 있다. 거칠고 투박한 시어들을 밀고 나가는 힘이 있다. ‘낮달이 꿍친 자리 메워주’는 짙은 서정성과 ‘혓바닥이 쭈구렁을 핥’는 힘든 현실성을 대비시키는 치열함이 엿보인다. 함께 투고한 ‘등용문’도 풍자와 해학이 뛰어났으나 직설적 토로가 다소 걸렸다.

차하로는 윤종영의 ‘치매’를 뽑는다.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의 삶과 닳아질 대로 닳아져 뭉툭해진 ‘몽당 빗자루’의 상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끝까지 남아서 논의됐던 작품 중에는 김미경, 김순영, 김재용 등이 있었다. 더욱 분발하여 좋은 결실을 맺기를 당부한다.

심사위원=김삼환·최영효(대표집필 김삼환)

[초대시조]   

다시 가을이 옵니다
-조명선

그러나 이 계절에 나직이 용서받자
눈빛을 끌어당겨 뒤적이고 뒤척이며
서러운 미열로 남아도 심장 소리 환했다고

그러나 첫마디를 이렇게 고백하자
내게로 번져오는 나뭇잎들의 몸 내
순결한 바람이 되어 네가 반짝인다고

◆조명선

조명선

조명선

1993년 월간문학신인상 당선 등단. 대구시조 부회장, 대구문협 시조분과위원장 등으로 활동. 시집으로 『하얀 몸살』 『3×4』, 대구시조시인협회상 수상.

일곱 개의 태풍들을 용케도 뚫고, 어느 날 난데없이 가을이 왔다. 엉겁결에 맞은 이 가을에, 조명선 시인의 ‘다시 가을이 옵니다’를 읽는다. 단연 주목되는 것은 첫째 수와 둘째 수의 첫머리에 아주 돌올하게 튀어나오는 ‘그러나’라는 역접 접속사다. 일반적으로 ‘그러나’는 앞에 서술한 내용을 확 뒤집어엎을 때 사용된다. 그런데 첫 번째 ‘그러나’ 앞에는 서술된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러나’ 앞의 그 광활한 여백에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투명 글씨로 단편소설 1편이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라는 세 글자가 단편소설 1편을 껴안고 있으니, 압축이라도 이만저만한 압축이 아니다.

그 단편소설의 주제는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하여 시적 모호성을 문학적 장치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째 수의 초장을 통해서 볼 때, 그것은 아마도 용서 받지 못한 일에 대한 것일 게다. 지난 계절에는 비록 용서를 받지 못했지만, 다시 돌아온 가을을 맞아 용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계절에는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늘 고뇌하고 사랑하면서, ‘뒤적이고 뒤척’였던 시간이었다. 비록 ‘서러운 미열로 남’았다는 후회와 반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심장소리 환’한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둘째 수의 ‘그러나’는 첫째 수에 대한 업어치기이고, 이어지는 중장과 종장은 첫째 수의 ‘고백’에 따른 결과다. 진솔하게 고백을 하고 나자 세계와의 교감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 더 성숙해지고 겸손할 수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종문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또는 e메일(won.minji@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02-751-5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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