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종덕의 북극비사]농구장ㆍ병원ㆍ사우나…작은 마을 같은 북극 원자력쇄빙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북극바다를 달리는 러시아 원자력 쇄빙선 승리50주년기념호. 북위 70도의 북극바다 여름은 해가 지지 않는다. 낮동안 하늘 위로 제법 올라갔던 해는 저녁이 되면 수평선 가까이 걸렸다가 다시 올라온다.[ TASS=연합]

북극바다를 달리는 러시아 원자력 쇄빙선 승리50주년기념호. 북위 70도의 북극바다 여름은 해가 지지 않는다. 낮동안 하늘 위로 제법 올라갔던 해는 저녁이 되면 수평선 가까이 걸렸다가 다시 올라온다.[ TASS=연합]

 ④세계 최대 원자력쇄빙선의 기억, 두번째 편  

강렬한 추억이었다. 북위 70도를 넘는 검푸른 북극바다를 가르는 붉은 원자력쇄빙선. 약 20노트(36㎞)에 가까운 속도로 바다를 가르고 있었지만, 진동도 소음도 거의 없이 고요했다. 들리는 건 매섭게 귓전을 때리는 북극의 바람소리와, 거대한 쇄빙선의 날카로운 선체가 파도를 가르는 내는 파열음 뿐. 해는 24시간 지지않고 오르락 내리락하며 원반같은 수평선을 따라 돌기만 했다. 마치 태양이 북극을 우주의 중심에 세워두고 빙빙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3년전 8월 러시아 초청으로 참석한 국제북극회의의 기억이다.

24시간의 우여곡절 끝에 올라탄 러시아의 원자력쇄빙선 승리50주년기념호는 27시간 만에 미국과 러시아의 가장 가까운 경계인 베링해협을 통과해 북극바다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원유운반 쇄빙선인 슈투르만 알바노프호와 북극항로를 나란히 항행하는 순간도 맞았다. 우리나라 삼성중공업에서 건조된 배였다. 러시아측에서 회의를 보다 극적으로 연출하려는 의도였을까. 한국인인 필자는 북극바다를 더욱 가까이 느끼는 순간이었다. 약 66시간 동안 약 2000㎞의 북극항로를 항행하면서 개최되었던 선상회의는 원자력쇄빙선이 북극항로 상의 동쪽 끝 항만인 추코트카의 페벡항에 도착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북극항로 상의 동쪽 끝 항만인 추코트카의 페벡항에서 추코트카 원주민의 환영을 받았다. 쇄빙선이 무사히 항행을 마친 것을 축하하는 전통무용을 보여줬다. [사진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북극항로 상의 동쪽 끝 항만인 추코트카의 페벡항에서 추코트카 원주민의 환영을 받았다. 쇄빙선이 무사히 항행을 마친 것을 축하하는 전통무용을 보여줬다. [사진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몸은 시베리아 동쪽 바다, 시계는 모스크바

페벡항에서는 추코트카 원주민의 환영을 다시 받았다. 그들은 외국 손님들을 태운 쇄빙선이 무사히 항행을 마친 것을 축하하고 우리에게 나머지 여정이 안전하기를 기원한다고 했다. 초라해 보이는 항구 하역장에서 환대를 받았지만, 항행이 끝난 후라서 그런지 환영의식이 내심 무척 반가웠다. 항행하는 동안 대부분은 해가 지지않는 백야가 계속됐다. 날씨는 시시각각으로 변화무쌍했다. 매서운 북극바람이 괴롭히기는 했고 짙은 안개로 방향조차 알 수 없었던 경우도 있었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일까. 북극바다라 기대했던 해빙(海氷)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대신 때때로 평화로이 헤엄치는 혹등고래 무리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바다새가 8월의 북극바다 여행을 외롭지 않게 했줬다.

선상에서 제일 힘들었던 점은 해가 지지 않는 일조환경과 배의 위치가 시베리아 동쪽해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 위의 시계는 모스크바 시간에 맞춰져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몸은 한국에 있지만 시간은 모스크바에 맞춰 사는 생활과 같아서 정상적인 신체리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마도 선상에서 오래 지나다 보면 익숙해질 일이겠지만, 짧은 기간에 적응하는 것은 회의를 위해 탑승한 사람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다.

러시아 원자력쇄빙선 안에는 농구장도 갖춰져 있다. [사진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러시아 원자력쇄빙선 안에는 농구장도 갖춰져 있다. [사진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방사능 농도 알 수 없는 원자력 쇄빙선 내부

필자가 당시 배 위에서 묵었던 방은 외부인을 위해 만든 64개 객실 중의 하나였다. 크기는 면적은 12㎡(3.6평) 정도였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개별 화장실과 샤워시설도 설치되어 있었다. 선내에는 병원과 체육시설도 있어 작은 마을과 같은 기반이 조성되어 있었다.  아날로그 감성이 잔뜩 묻어나는 열쇠는 무척 인상적이었고 이 배의 진짜 나이를 추정하게 만들었다. 시간 흐름이 신체리듬과 맞지 않아 지내는 동안 잠을 제대로 잘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배의 이곳저곳을 시도 때도 없이 다닐 수 있었다. 원자로가 설치된 선박이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내부를 제한없이 공개했다. 브리지는 물론이고 기관실과 추진설비, 담수처리시설, 심지어는 선원숙소도 자유롭게 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

방사능구역 표시는 여기저기 있었지만 선내의 방사능농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계기판이 없어 솔직히 안전도를 확인할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장난스러운 마음이 생겨 러시아 원자력쇄빙선에 탑승한 최초의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러시아 쇄빙선의 농구코트에서 최초의 득점을 올린 한국인이 되어 보기로 하고 야심한 밤에 같이 간 동료에게 부탁하여 어설픈 슛으로 작은 욕심을 채웠다.

.러시아 원자력쇄빙선의 레스토랑에서 나온 생선요리. [사진 해양수산개발원]

.러시아 원자력쇄빙선의 레스토랑에서 나온 생선요리. [사진 해양수산개발원]

겉모습은 무시무시하지만,  내부는 화기애애

붉은 상체에 검은 하체를 가진 듯, 무시무시하게 느꼈던 원자력쇄빙선의 겉모습과는 달리 선상회의는 순조로웠다. 회의를 주최한 러시아는 북극에서의 평화유지를 위한 협력을 강조하면서 북동항로(베링해협에서 노바야젬랴)의 활성화를 위한 정책 추진의사를 명확히 하였다. 항행안전에 필요한 수색구조체계 조기 마련, 쇄빙선단 확대, 통신 및 예보시스템 강화, 기존 에너지자원개발 사업의 중단없는 추진 의지와 크루즈 등 북극관광시장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비북극권 국가들의 항로이용자들도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장기적으로는 아시아에서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 간의 해운 물동량의 6% 정도를 북동항로가 수용하는 것을 목표로 정하고 있으며, 원유의 해상운송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환경 위험요소들은 바렌디와 프리라쯔롬노에 유전에서 확보한 700회가 넘는 성공적인 운항경험을 바탕으로 자신감을 피력했다. 대부분의 국가와 참석자들은 이러한 러시아 계획에 참여 또는 협조의사를 밝혔다. 원자력쇄빙선에서 조리된 특별한 음식 덕분일까. 회의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혹등고래는 차가운 북극바다에서도 종종 출몰한다. [AP=연합]

혹등고래는 차가운 북극바다에서도 종종 출몰한다. [AP=연합]

열강들의 쇄빙선 주도권 경쟁

3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러시아의 의지는 중국과의 협력으로 차츰 현실화되고는 있으나, 세일가스 혁명으로 세계 에너지시장의 패권을 손에 넣은 미국으로부터 새로운 견제를 받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로써 북극문제가 세계안보와 엮어지고, 더워지고 있지만 여전히 차가운 북극을 둘러싸고 또 다시 강대국 간에 날카로운 경쟁의 불꽃을 튀기 시작한 것이다.

쇄빙선 주도권은 북극진출의 핵심 북위 66.5도를 북극권 기준으로 한다면, 북극권은 70% 이상이 바다이며, 이 중 약 20%는 인류의 공동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공해(公海)이다. 달리 말하면 북극바다를 항행할 수 있는 배를 갖지 않고서는 북극에 대한 도전은 ‘탁상에 펼쳐진 지도 위에서의 도전’에 머물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러시아와 각을 세우는 미국과 캐나다뿐만 아니라, 노르웨이ㆍ중국ㆍ일본 등이 최근 북극해를 운항할 쇄빙선 건조 경쟁에 나서는 이유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북극해에서의 새로운 갈등요인이 될지도 모르지만, 과학연구와 안전하고 투명한 북극 경제활동을 위해서는 쇄빙선 갈증이 더 강해질 것이다. 3일간의 짧은 항행이었지만 러시아의 원자력쇄빙선에 대한 기억은 강렬했고 여전히 그 기억은 유효하다.

 ⑤회에서 계속

관련기사

배너_김종덕의 북극비사

배너_김종덕의 북극비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