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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푸인지 화장품인지…시각장애인에게 ‘구별’을 허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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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8호 10면

“기술이 발전하면 이전보다 장애인에게 더 편리한 세상이 찾아올 것 같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제품이 작동되는 가전제품이 홍수를 이루지만 시각장애인에게는 넘어야 할 또 다른 장애물이다.”

대부분 제품 점자 표기 안 돼 있어 #첨단기술품 나와도 장애인은 소외 #무인단말기·인공지능 등 무용지물 #병원·은행서 대기 순서 놓치기 일쑤 #독일은 생활용품 85%에 점자 표기 #장애인 배려 ‘인클루시브 디자인’을

이병돈 한국장애인소비자연합 대표의 말이다. 이 대표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터치 제품이 많이 나온 뒤로 바보가 돼 가는 느낌”이라며 “가령 최신 OO 압력밥솥의 경우 버튼 하나로 18가지 기능을 조작할 수 있다는데 자동세척을 하려면 16번의 조작이 필요하다. 우리 같은 시각장애인에게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인공지능 가전제품도 음성으로 작동돼 편리할 것 같지만, 음성지원이 시작 단계에만 실시되고 다음 단계부터는 터치해야 해서 중간에 포기하기 일쑤다.

‘장애인이 편하면 일반인은 더 좋다’ 인식

시각장애인들은 샴푸를 화장품으로 착각해 바르는 등 생활에 불편을 겪고 있다. 이들을 위해 점자를 표기한 제품들. 사진은 편의점 전자레인지. [중앙포토]

시각장애인들은 샴푸를 화장품으로 착각해 바르는 등 생활에 불편을 겪고 있다. 이들을 위해 점자를 표기한 제품들. 사진은 편의점 전자레인지. [중앙포토]

시각장애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례는 전자제품을 사용할 때 외에도 다양하다. 이 대표는 “한 시각장애인이 호텔에 투숙했는데 샴푸를 화장품으로 착각해 바르고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씁쓸했다”며 “점자 표기가 돼 있는 제품이 드물다 보니 낯선 장소에서 촉각에만 의존해서 사물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편의점에서 물건을 살 때 등 매일 먹고, 쓰는 데 있어 이들은 번번이 난관에 부딪힌다. 장애인도 엄연한 소비자인데 제품을 생산하면서 이를 살피는 기업은 드물다. 최근 무인정보 단말기(키오스크·Kiosk)를 이용해 간편식을 주문할 수 있는 매장이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도우미가 없으면 시각장애인에게는 무용지물이다. 병원이나 은행에서 대기 번호표를 받고 기다리다가도 자신의 번호가 전광판에 뜬 사실을 몰라 순서를 놓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편의점이나 대형마트 등에서 물건을 고를 때도 마찬가지다. 이 대표는 맥주 얘기를 사례로 들었다.

“맥주 한 캔을 고르는 것에도 제약이 많다. 보통 맥주 캔 뚜껑 쪽에 점자 표기가 돼 있지만, 그냥 ‘맥주’로만 표기돼 있다. 카스인지, 하이트인지 또는 수입 브랜드 맥주인지 구별할 수 없다. 마실 거리는 음료·맥주·탄산, 이렇게 세 종류로 구분해 놓을 뿐이다.”

커피 자판기. [중앙포토]

커피 자판기. [중앙포토]

시각장애인에게 제품에 대한 정보의 접근권이 잘 보장돼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는 지적이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인클루시브 디자인(Inclusive Design)’이다. 장애인, 노약자 등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디자인을 말한다. 북유럽에서는 ‘모두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 미국·일본 등에서는 ‘보편적인 디자인(Universal Design)’, 영국에서는 인클루시브 디자인으로 불리는데, 조금씩 차이가 있다. 가령, 인클루시브 디자인의 관점은 유니버설 디자인 관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장애인까지 포함해 ‘누구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공통점은 상품, 시설, 서비스를 이용하는 누구나 성별, 나이, 장애, 언어 등으로 인해 제약을 받지 않도록 다양한 이용자의 관점에서 고안했다는 점이다. 특히 인클루시브 디자인은 ‘장애인이 편하면 비장애인은 더 편하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계단을 없애고 차체를 낮춘 저상버스나 제품의 구체적인 정보를 점자로 표기해 제품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도 이런 디자인의 대표적 사례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시각장애인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점자 표기가 필요하다는 문제는 오래전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우리나라는 2017년 5월부터 점자법이 시행되고 있다. 공직선거법, 약사법, 여권법, 저작권법, 주민소환법, 자전거법, 화장품법, 우편법 등 점자 관련 법률만 14가지에 달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법령이 의무조항이나 처벌규정, 관리·감독기관 지정 등의 강제절차 없이 포괄적으로 선언하거나 가능하도록 권고하는 수준에 그친다는 점이다.

의약품 등 점자 의무화 법안 처리 안 돼

젤타입 치약(左), 코카콜라(右). [중앙포토]

젤타입 치약(左), 코카콜라(右). [중앙포토]

2015년 당시 새누리당 박명재 의원이 의약품, 의약외품, 건강기능식품, 화장품 등에 점자표기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약사법, 건강기능식품법, 화장품법 개정안을 대표발의 했다. 또 2017년에도 윤소하 정의당 의원이 비슷한 내용의 관련 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이들 법안은 여전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묻혀 있다. 당시 윤 의원은 “시각장애인의 기본적인 안전과 생활을 위해 법안 개정을 추진했으나 속도가 더뎌 안타깝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개별 기업 제품에 점자 표기를 넣도록 강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반면 독일의 경우 일반 약 85%에 점자 표기가 돼 있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부터 사회적 인식이 조금씩 바뀌면서 개별 기업과 지자체 등의 자발적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24일 충남 공주시는 ‘복약 안내 점자 식별 스티커’를 보급하기로 했다. 점자 휴대용 알약 통, 복약시간을 구별할 수 있도록 표시한 휴대용 점자 알약통과 약의 부작용이나 금지사항을 표기한 점자 스티커 등이다. 주변의 도움이 없어도 시각장애인 혼자서 약을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생활필수품인 화장품 업계의 노력도 주목할 만하다. 아모레퍼시픽, LG생활건강 등이 일부 자사 제품에 점자 표기를 시도한 데 이어, 올 4월에는 닥터디퍼런트가 자사 전 제품(18종)의 외부 포장과 상품 자체에 점자 표기를 시작했다. 이병돈 대표는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 차원 정도에 머물러 있다”며 “비장애인과 똑같은 소비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성표 기자 muze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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