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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 친구, 제자…쇼팽보다 먼저 떠난 어린 생명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47) 

프레데릭 쇼팽. Franz Xaver Winterhalter 그림. 1847.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프레데릭 쇼팽. Franz Xaver Winterhalter 그림. 1847.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쇼팽의 생은 가족이나 친구, 폴란드 교포 그리고 음악 애호가들이 보기에 짧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병을 고려하면 39년은 아주 짧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결핵으로 쇼팽보다 짧게 삶을 마감한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여럿 있었다. 그 병은 전염병이다. 하지만 쇼팽과 그들 사이에 누군가가 다른 누구에게 병을 옮겼는지는 불확실하다.

쇼팽의 막냇동생 에밀리아는 14세에 세상을 떠났다. 밝은 아이였고 문학에도 재능을 보여서 가족의 사랑을 받았지만 심한 기침과 고통 끝에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막내를 보내고 쇼팽의 가족은 아픈 기억을 잊기 위해 카지미에르 궁에서 크라신스키 궁으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 쇼팽의 가장 가까운 친구는 얀 비아워붜츠키였다. 그는 바르샤바 리세움에서 공부할 때 쇼팽의 집에서 하숙했었다. 쇼팽은 그에게 편지를 자주 썼었다. 1828년 들어 그들 사이에 편지왕래가 갑자기 줄어드는데, 얀은 심하게 앓다가 고향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병도 결핵이었다. 그 후로 티투스가 쇼팽의 주요한 편지 친구가 된다.

쇼팽의 오랜 친구 얀 마투진스키의 죽음은 쇼팽을 탈진 상태로 몰았다. 의사 집안 출신인 그는 바르샤바 리세움 시절 쇼팽과 가까웠다. 그는 바르샤바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재학 중에 일어난 1830년 11월 봉기 때는 러시아에 대항해서 싸우는 군대에 의무관으로 들어갔다. 1834년 파리로 와서는 쇼셰 당탱 거리의 아파트에 쇼팽과 같이 살면서 친구의 건강을 세심하게 챙겼다.

얀 마투진스키. 바르샤바 리세움 재학시절부터 쇼팽과 친구 사이였으며 파리에서 의학 공부할 때는 같은 아파트에서 거주하기도 했다. 1840. 작가 미상.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얀 마투진스키. 바르샤바 리세움 재학시절부터 쇼팽과 친구 사이였으며 파리에서 의학 공부할 때는 같은 아파트에서 거주하기도 했다. 1840. 작가 미상.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 아파트는 그가 공부하던 학교에서 멀었지만, 쇼팽과 같이 지내기 위해 그곳을 선택했다. 파리에서 학위도 받았고 프랑스 여인과 결혼도 했다. 그런 그가 1842년 4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쇼팽과 상드는 은근한 그렇지만 심한 고통을 받던 그를 보살폈다. 쇼팽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약한 육신에서 상상할 수 없는 용기와 힘을 친구에게 불어넣었다.

하지만 자기 팔에 안겨 세상을 떠나는 친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장례를 끝까지 챙긴 쇼팽은 집으로 돌아와 부서지듯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고는 한동안 그 자신도 심하게 앓았다. 절친을 잃은 충격을 회복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몇 년 뒤 쇼팽이 아꼈던 제자 칼 필치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5세에 요절했다. 지금의 루마니아 출신으로 어린 시절 피아노 천재로 불리던 그는 11살에 쇼팽을 찾아왔다. 어린이를 제자로 받지 않던 쇼팽이었지만 그의 재능에 반한 그는 필치를 문하에 받아들였고 예외적으로 1주일에 3번씩이나 레슨을 해 주었다. 그는 쇼팽의 제자 중에서 가장 재능이 있었다고 여겨졌었다.

쇼팽은 ‘이 아이처럼 내 음악을 이해 한 사람은 없었다’고 칭찬했다. 그는 필치를 여러 연주회에 동반하여 같이 공연도 하는 등 아꼈었다. 리스트도 어린 필치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며 말했었다. “언젠가 그가 연주 여행을 시작하면 나는 그만둬야 할 거야.” 필치는 13살에 벌써 파리, 런던, 빈에서 성공적인 순회 연주를 했지만 베네치아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제자의 비극적 종말에 쇼팽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들 외에도 결핵에 희생된 사람들은 많았다. 병을 고려했을 때 쇼팽의 생이 그나마 이어진 것은 상드의 세심한 보살핌 덕분인지도 모른다. 쇼팽의 아버지(73세)와 어머니(79세)는 당시로는 장수했다고 할 수 있다. 1844년 봄, 결핵 탓은 아니었지만, 부친의 사망 소식은 아들을 큰 슬픔에 몰아넣었다.

부친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쇼팽의 건강이 부쩍 나빠져 있을 때였다. 1843년 말부터 이듬해 봄까지 쇼팽은 독감으로 고생했다. 그의 병은 파리의 신문에 날 정도로 심했다. 그는 몰린 박사의 모르핀이 들어간 약물에 의존했다. 1844년 5월 초, 바르샤바에서 아버지에 대한 소식이 왔다. 상드는 몸이 완전하지 않은 쇼팽에게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할까 고민했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아버지는 쇼팽을 위해 온갖 희생을 감내했었다. 그는 자신도 넉넉지 않으면서 아들을 위해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었다. 만년의 아버지는 건강도 나빠졌고 경제적으로도 힘들었다. 쇼팽은 잘 나갈 때도 아버지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루드비카. 쇼팽의 누나. 2차대전 중 잃어버린 암브로지 미에로제프스키의 1829년 그림을 얀 자모이스키가 복원한 것. 1969년. 폴란드 국립 쇼팽협회 소장.

루드비카. 쇼팽의 누나. 2차대전 중 잃어버린 암브로지 미에로제프스키의 1829년 그림을 얀 자모이스키가 복원한 것. 1969년. 폴란드 국립 쇼팽협회 소장.

소식을 들은 쇼팽은 충격에 실성한 듯했다. 쇼팽은 어두운 방에 자신을 가두고 한동안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쇼팽이 오랫동안 가슴에 간직하고 그리워했던 따뜻하고 사랑 넘치는 가정의 붕괴를 의미했다. 언젠가는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던 집과 가족은 이제 그전의 모습대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가 러시아 당국의 압박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하려고만 했으면 바르샤바의 집을 방문하여 가족을 만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지 못한 그는 죄의식에 눌렸을 것이다. 리스트가 소식을 듣고 조문 차 방문했지만, 쇼팽은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상드는 어머니 유스티나에게 위로와 애정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그의 고통은 큽니다. 그러나 다행히 아프지는 않습니다. 귀하의 아들을 제가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습니다.” 유스티나는 상드에게 답장을 보냈다. “매우 감사드리며 당신의 모성적인 배려에 사랑하는 아들을 맡깁니다.” 바르샤바의 가족은 쇼팽을 돌보고 있다는, 말로만 듣던 여인과 처음으로 직접 소통했다.

쇼팽은 가족들에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 자세히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평화로운 임종을 맞이했다. 다만 산채로 묻히는 것을 두려워했었다고 전해왔다. 병약한 쇼팽은 아버지를 여의고 더욱 쇠약해 보였다. 상드는 연약한 육신에 마음마저 허물어진 그를 그냥 보고 있기 힘들었다.

그녀는 바르샤바에 있던 쇼팽의 누나 루드비카 부부를 초대했다. 7월 쇼팽은 파리로 가서 루드비카 부부를 맞았다. 쇼팽은 모처럼 밝아졌다. 힘이 난 그는 파리의 온갖 명소로 누나 부부를 데리고 다녔다. 칼스바드에서 부모와 시간을 보낸 이후 오랜만에 가족의 정과 옛 추억이 다시 살아났다. 파리에서 거의 한 달을 보낸 후 그들은 노앙으로 내려갔다.

상드는 고루하고 뚱한 북방의 여인을 생각했었는데 루드비카는 고상했고 다정했다. 둘은 마음이 통했다. 상드는 정성껏 누이를 대했다. 루드비카는 병약한 동생을 돌보아준 데 대해 감사를 표했다. 노앙의 집에 온기가 돌았다. 누나는 자신의 눈으로 동생을 돌보는 친절한 상드와 평화로운 시골 분위기를 확인했다. 그녀는 마음이 놓였다.

루드비카는 8월 말 노앙을 떠났다. 쇼팽은 파리까지 따라갔다가 돌아왔다. 누나를 보낼 때는 가슴이 아팠다. 노앙의 집은 다시 텅 빈 것 같았다. 쇼팽은 집에 남은 누나의 흔적을 찾고 또 찾았다. 루드비카는 바르샤바로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그들이 궁금해하던 쇼팽과 상드의 소식을 전했다.

늦가을, 조르주 상드의 노앙 저택. [사진, 송동섭]

늦가을, 조르주 상드의 노앙 저택. [사진, 송동섭]

그 해 노앙의 가을은 풍요로웠다. 햇볕은 따뜻했다. 상드는 자두 잼을 20kg이나 만들어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사실 마흔을 넘어선 상드는 그 전 가을부터 위장병을 앓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다. 엄마의 걱정거리였던 솔랑주는 밝은 얼굴로 힘든 엄마를 보살폈다. 상드는 사춘기를 지난 솔랑주의 성숙함을 모처럼 자애로운 엄마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쇼팽은 꿈속에 그리던 집의 일부를 잃었지만, 현실 속에서 가족의 정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노앙에서 쇼팽과 상드, 두 사람 모두 안락하고 행복한 가정을 느꼈다. 훗날 상드는 이때가 쇼팽과 함께한 시기 중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쇼팽이 파리로 돌아간 것은 11월 말이었다. 낙엽 진 노앙의 황혼은 아름다웠다. 해는 지기 직전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그해 여름, 쇼팽은 피아노 소나타 3번, 작품번호 58을 작곡했다. 이 곡은 스케일이 크고 활기차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어떤 문제로, 어떤 과정을 거쳐 헤어지게 되는가? 다음 편부터는 그 이야기가 이어진다.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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