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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패션 시장 살리는, 요즘 가장 '핫'한 한국 디자이너 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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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파리에 왔나. 지금 한국 패션이 ‘핫’한데.”
국내 패션 대기업에 근무하는 한 바이어가 지난달 파리 패션위크 행사장에서 들은 이야기다. 최근 세계 패션 시장에서 한국 패션의 위상이 높아졌다. 주역은 독자 브랜드를 전개 중인 젊은 디자이너들이다. 이들은 지금 양쪽 어깨에 ‘온라인 유통’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란 날개를 달고, 해외 시장은 물론 디자이너 브랜드의 설 자리가 좁았던 국내 시장에서도 비상하고 있다.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의 제품들. 왼쪽부터 앤더슨벨, 제이청, 잉크, 고엔제이.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의 제품들. 왼쪽부터 앤더슨벨, 제이청, 잉크, 고엔제이.

지금 세계는 K-패션에 주목 중
지난 9월 28일 프랑스 파리 브롱니아르 궁에선 한국 디자이너들의 합동 패션쇼 ‘K컬렉션 인 파리’가 열렸다. ‘제이청’ ‘분더캄머’ ‘비뮈에트’ 등의 옷을 입은 모델들이 기둥 사이로 걸어 나오자 현장에 모인 300여 명의 관객이 박수 갈채를 보냈다. 맨 앞줄에서 쇼를 관람한 유명 편집숍 ‘레클뢰르’의 창립자 아르망 하디다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디자이너의 감성과 창의성은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앞서 6월엔 럭셔리 브랜드 ‘지방시’의 디자이너 클레어 웨이트 켈러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2020년 봄·여름 컬렉션 쇼를 발표하면서 “한국의 거리 패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지난 9월 28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브롱니아르궁에서 열린 비뮈에트·제이청·분더캄머의 합동 패션쇼 ‘케이컬렉션 인 파리'. [사진 한국패션산업협회]

지난 9월 28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브롱니아르궁에서 열린 비뮈에트·제이청·분더캄머의 합동 패션쇼 ‘케이컬렉션 인 파리'. [사진 한국패션산업협회]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10월 15일 세계 최대 패션 온라인 쇼핑몰 ‘네타포르테’는 김도훈(앤더슨벨)·구지혜(구드)·박승건(푸시버튼)·신은혜(르917) 등 한국 디자이너 5명과 협업한 ‘코리안 콜렉티브’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미 사이트에서 판매 중인 브랜드들이지만 스페셜 프로젝트로 옷·가방·주얼리 등을 따로 만들어 소개한 것. 네타포르테 관계자는 “콜렉티브 프로젝트는 올해 시작한 신규 사업으로 세계에서 한국이 두 번째 대상 국가”라고 말했다. 1000개가 넘는 브랜드가 입점한 글로벌 온라인 쇼핑몰이 한국 디자이너들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는 의미다.

네타포르테 코리안 콜렉티브 캠페인 이미지.

네타포르테 코리안 콜렉티브 캠페인 이미지.

개성·가성비 담은 '내가 입고 싶은 옷'
최근 국내외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인 한국 디자이너들은 자신만의 개성은 물론이고, 비즈니스 마인드까지 두루 갖췄다. 예술적 가치만을 쫓기보다 스스로 소비자의 입장이 돼서 ‘입고 싶은 옷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대중성을 우선한다. 온라인과 SNS를 활용한 유통 간소화로 가격대까지 낮추니 대중의 호응이 좋다.
대표적 인물로 브랜드 ‘제이청’ ‘테이즈’를 전개하고 있는 정재선 디자이너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삼성물산의 신진 디자이너 육성 프로그램인 ‘sfdf’를 수상하고, SPA브랜드 에잇세컨즈와 협업 라인을 출시하는 등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디자이너다. 대학 강사 출신으로 G마켓에서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해본 이력의 그가 잡은 컨셉트는 명확했다. “가격이 너무 비싸지 않으면서 물빨래를 할 수 있고, 신축성 있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 힐을 신지 않아도 멋있고, 컬러가 너무 흔치 않으면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우아한 옷”을 만들겠다는 것. 그는 “30대 일반 여성인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찾기 힘들어 직접 만들게 됐다”고 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상품을 출시하는 족족 빠른 속도로 품절이 됐고, 11차 리오더를 진행할 정도로 인기를 얻는 히트 상품도 생겼다. 대표적인 히트 상품인 머메이드 스커트는 지난해 가을 출시 이후 지금까지 4000여 장이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제이청과 테이즈의 이끄는 정재선 디자이너

제이청과 테이즈의 이끄는 정재선 디자이너

제이청의 2019 FW 컬렉션과 히트상품인 머메이드 스커트.

제이청의 2019 FW 컬렉션과 히트상품인 머메이드 스커트.

‘앤더슨벨’의 김도훈 총괄 디렉터 역시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든 게 신의 한 수였다”고 강조했다. 그는 “흔치 않으면서 잘 만든 25만원대 가성비 좋은 울코트”를 예로 들며 “독특함과 가격,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직접 체크 원단을 개발해 옷을 내놨더니 시장에서 반응이 왔다”고 말했다. 상품을 선보이는 방식에도 변화를 줬다. 1년을 두 시즌으로 나눠 한 번씩 컬렉션을 선보이던 기존 디자이너 브랜드의 상품 출시 방식에서 벗어났다. 시장 반응에 따라 새로운 컬렉션을 한 시즌에 두 번 혹은 두 달에 한 번꼴로 선보인다. 그는 “브랜드를 론칭한 2014년부터 해온 방법인데 지금은 대부분의 국내 브랜드가 이 방법을 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 디자이너 역시 자사몰과 온라인·오프라인 편집숍 판매처별로 출시 상품을 달리 하는 등 차별화된 유통 전략을 짰다. 테이즈의 경우 리오더 출시 상품 소식을 기존 고객에게 매일 오전 10시 휴대폰 메시지로 알리고, 오는 25일까지 인기상품인 트랙팬츠 100벌을 할인가에 판매하는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하는 등 공격적인 디지털 마케팅을 펼친다.

앤더슨벨 김도훈 총괄 디렉터.

앤더슨벨 김도훈 총괄 디렉터.

앤더슨벨의 2019 FW 컬렉션.

앤더슨벨의 2019 FW 컬렉션.

모든 활동은 온라인, 만남은 쇼룸에서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면서 브랜드 운영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패션쇼 대신 W컨셉·29cm·무신사 같은 유명 온라인 편집숍에 입점하는 것으로 시장에 ‘데뷔’한다.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점차 자사몰의 판매 비중을 늘리고, 해외 시장에도 진출한다. ‘분더캄머’를 이끄는 신혜영 디자이너는 “백화점·두타·직영매장 등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해봤지만, 지금은 온라인을 통해 구매하는 고객이 많다. 온라인몰에 신규 컬렉션을 선보이면 아우터와 드레스는 바로 품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2017년부터는 해외 시장에도 뛰어들었는데, 미국 소호 지역의 쇼룸에 입점한지 두 시즌만에 '어반 아웃피터스' '니드 서플라이' 등 유명 편집샵의 러브콜을 받았다.

분더캄머 신혜영 대표.

분더캄머 신혜영 대표.

분더캄머의 2019 FW 컬렉션.

분더캄머의 2019 FW 컬렉션.

홍보는 평소 친분 있는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를 섭외해 자신의 옷을 SNS에 노출시키는 방법을 많이 쓰는데, 반대로 연예인들이 먼저 찾는 경우도 많다. 분더캄머는 가수 겸 배우인 최수지와 아이돌 제니(블랙핑크)·현아 등 여성 연예인이 즐겨 입는 옷으로 유명하다. 패션기자 출신인 김경민 실장과 국내 브랜드 디자이너 출신 이은주 실장이 함께 만든 브랜드 ‘대중소’는 지난 겨울 가수 설현이 입었던 앞뒤가 다른 반반코트, 가수 제시카·유빈이 입은 버블재킷이 인기를 끌면서 이름을 알렸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옷은 희소성이 있고 특색 있는 옷을 찾는 연예인의 평상복으로 활용도가 높다”고 귀띔했다. 촬영장·방송국 출근 복장 등 평상시 입을 수 있는 옷이 필요한데, 이 조건을 한국 디자이너 옷이 충족시켜준다는 얘기다. 연예인이 입으니 자연스레 관심을 받게 되고, 해당 브랜드의 다른 옷들까지도 인기를 얻는 게 순서다. 패션 홍보 전문가 김민정 KN컴퍼니 이사는 “요즘 젊은 세대는 브랜드와 상관없이 옷이 좋으면 지갑을 연다”며 “이런 성향 때문에 특정 아이템이 먼저 히트친 후 브랜드가 부각되는 게 최근 패션업계의 추세”라고 분석했다.

대중소의 디자이너 이은주 실장(왼쪽)과 김경민 실장.

대중소의 디자이너 이은주 실장(왼쪽)과 김경민 실장.

대중소의 버블 재킷과 앞뒤의 컬러가 다른 반반코트.

대중소의 버블 재킷과 앞뒤의 컬러가 다른 반반코트.

인스타그램은 이들의 주요한 소통 창구이자 홍보 수단이다. 옷을 만들면 가장 먼저 공들여 룩북(옷을 보여주는 사진)을 촬영한다. 이전처럼 옷만 보여주는 상품 카탈로그 형식이 아니라, 분위기 위주의 멋진 일상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네타포르테의 신진 디자이너 지원 프로젝트 '뱅가드'의 수혜자로 선정된 바 있는 가방 디자이너 구지혜 대표(구드)와 여성복 디자이너 신은혜 대표(르917)는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으로 모든 게 이루어졌다”고 입을 모았다. 독특한 제품 디자인을 감각적으로 촬영한 사진 덕분에 별다른 홍보 활동 없이 명성을 얻었고, 네타포르테 글로벌 바이어의 눈에도 띄어 해외 진출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르917_ 신은혜 디자이너.  [사진 마리끌레르]

르917_ 신은혜 디자이너. [사진 마리끌레르]

르917

르917

오프라인 매장의 대표 격이었던 백화점과 플래그십스토어 대신, 디자이너의 철학과 브랜드의 분위기를 보여줄 수 있는 ‘쇼룸’을 베이스캠프로 운영하는 것도 이전과는 달라진 점이다. 이혜미 대표가 이끄는 잉크(EENK)의 서울 청담동 쇼룸(후암동에서 11월 중 이전), 신은혜 대표가 운영하는 르917의 신사동 가로수길 쇼룸은 고객과의 접점이다. 쇼룸은 디자이너가 추구하는 브랜드의 분위기에 맞춰 꾸미는데, 옷을 파는 게 목적인 일반 매장과 달리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만든다.
매 시즌 알파벳 A부터 Z까지 알파벳을 키워드로 아이템을 출시하는 독특한 방식의 프로젝트를 전개하고 있는 잉크의 쇼룸엔 온라인에서 본 옷을 직접 보고 싶어하는 고객이 많이 찾아온다. 이 대표는 “쇼룸에 온 고객은 온라인에서 봤던 옷의 실물을 보고 어떤 취지로 만들었는지, 장점은 무엇인지 등의 설명을 듣고 또 자신의 의견을 내기도 하면서 소통한다”고 말했다.

잉크(eenk) 디자이너 이혜미 대표.

잉크(eenk) 디자이너 이혜미 대표.

잉크 EENK

잉크 EENK

르917은 쇼룸에서 온라인 사이트와 SNS에 올린 옷의 실물을 보여주고, 준비된 옷을 소량씩 판매하거나 선주문을 받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모든 제품을 한꺼번에 볼 수도 없다. 디자이너가 정한 시기에 조금씩 옷을 공개하는데, 이마저도 수량이 적어 금방 동나기 때문에 이 브랜드의 옷을 입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애를 태운다.

[강남인류]해외와 국내 시장 모두 잡은 한국 디자이너들

대기업의 디자이너 모시기도 한 몫
디자이너 브랜드가 국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배경엔 대기업 온라인쇼핑몰의 ‘디자이너 모시기’도 작용했다. SI빌리지(신세계인터내서널)·코오롱몰·LF몰 등이 다채로운 상품 구성과 차별화를 위해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를 앞다퉈 자사몰에 입점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LF몰의 홍이화 차장(e영업 BPU 팀장)은 “특색 있고 좋은 품질의 옷을 찾는 젊은 소비자들이 국내 디자이너 옷에 관심을 갖고 지갑을 열기 시작한 것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10개월간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100개를 확보한 SI빌리지의 디자이너 편집숍(셀렉트449) 담당 이영준 부장은 “트렌드에 민감하고 가격 저항은 덜 받는 30~40대 소비자를 사이트로 유입시키는 효과가 있다”며 “브랜드 정체성이 명확하고 우리와 감성이 맞는 브랜드가 입점 1순위"라고 말했다.

고엔제이 정고운 디자이너.

고엔제이 정고운 디자이너.

고엔제이의 2019 FW 컬렉션.

고엔제이의 2019 FW 컬렉션.

반응도 좋은 편이다. 이방카 트럼프 미 대통령 보좌관이 지난 6월 말 내한했을 때 입었던 정고운 디자이너의 브랜드 ‘고엔제이’는 SI빌리지의 페이백 이벤트 첫날 매출 1위를 차지했다. 이 부장은 “고엔제이는 가격대가 높은 편인데도 인기가 높다”며 “여세를 몰아 내년 1월엔 브랜드 잉크와 SI빌리지 PB브랜드 텐먼스가 협업한 상품을 론칭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글=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사진=각 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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