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성과를 체감하기에 부족하다.", "재벌개혁을 크게 하지는 않았다."
대한상의 세미나서, 강도높은 정책 예고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은 22일 현 정부의 ‘공정경제’ 추진 성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강조하는 '공정경제' 운동장 위에서 공정위가 성과를 내기 위해 '재벌' 대기업집단에 대한 감시자 역할을 더 강화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조성욱 위원장은 22일 오전 8시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CEO 조찬세미나’에 참석해 공정경제 정책의 구현 성과에 대해 "객관적으로 아직 (성과를) 체감하기에 부족하다는 얘기를 듣는다”고 말했다. 또 ‘재벌’로 불리는 대기업집단 개혁 정책에 대해서도 “재벌개혁을 위한 공정위의 노력을 보면 실제로 (재벌을) 많이 제재하지는 않았다”고 평가했다.
대한상의가 마련한 이날 세미나는 지난달 10일 취임한 조 위원장의 첫 대외 강연이었다. 공정위 2기의 정책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자리로 재계의 관심이 컸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윤부근 삼성전자 부회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공영운 현대차 사장, 금춘수 한화 부회장 등 대ㆍ중소기업 임원 300여 명이 참석했다.
조 위원장은 이날 50분간의 강연에서 ^갑을관계 개선 정책 ^대기업집단 정책의 성과와 향후 방향을 설명했다. 조 위원장은 “‘도대체 공정경제가 뭐냐’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 것“이라며 “일부 사업자가 보기에 경쟁 구도가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이 기울어졌던 운동장을 조금은 평평하게 하는 것이 공정경제가 추구하는바”라고 말했다.
좌고우면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조 위원장은 이날 발표자료에서 '경기 상황에 관계없이 일관되게 원칙에 따라 공정경제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국내외 경제의 불확실성이 심화돼 대기업도 어렵다"면서도 "이런 상황에서 성과를 내겠다는 생각으로 불공정한 관행을 요구할 수 있는데 이건 시장환경을 훼손할 수 있으니 이런 일은 안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기상황 무관하게 공정경제 추진"
조성욱 위원장은 그동안 공정위의 재벌개혁 정책에 대해 “재벌개혁을 크게 하지는 않았다. 저희가 많이 제재하지는 않았다”고 평가했다. “2017년 9월 기업집단국이 신설되면서 사익편취ㆍ부당지원 등에 대해 (제재한 것은)23건이 있었다"고 말했다. 건수가 많지 않았다는 취지다. 그러면서 “대기업이 (공정위에) 협조하는 문화가 생겼고, 재계와 지속적 소통을 통해 자발적으로 소유ㆍ지배구조 개선 노력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재벌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기업 총수 일가가 소수 지분으로 그룹을 지배하는 문제를 집중 비판했다. 조 위원장은 “(1990년엔 10대 대기업집단 총수가) 지분 5.1%를 갖고서 전체 그룹의 지배력을 행사했는데, 이제는 0.9%(2019년) 밖에 되지 않는 데도 지분율을 행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이런 경우에도 공정위가 직접 개입하지는 않는다”며 “편법적 경영승계를 하거나 대주주 지분이 높은 기업을 도와주기 위해 하는 일감 몰아주기, 사익편취를 규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 위원장은 “편법적 경영승계를 위해서 특정한 대주주가 가진 개인 지분율이 높은 계열사에 일감 몰아주기를 하는 경우, 일반 소액 주주들이 손해를 보게 된다”며 “(이럴 때)혁신적 중소기업의 경쟁 기회가 박탈당한다”고 말했다. 조 위원장은 자산규모 5조원 미만이어서 공시 대상이 아닌 기업의 편법 일감몰아주기에도 “과거보다 많은 자료를 통해 모니터링할 것이고 부당한 내부지원이 있으면 법 집행을 하겠다”고 못박았다. 관련 유인책도 제시했다. 그는 "대기업이 다른 사업자에 일감을 나눠주면 동반성장지수나 공정거래위가 하는 기업 평가에 (일감 나눠주기를)반영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조 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재계에선 “공정위의 재벌개혁 기조가 결코 약해질 것 같지 않다”는 반응이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10대 그룹 임원은 “기업과 공정위의 온도차가 큰 것 같다”며 “대기업을 갑질과 편법승계로 묶어보는 정부의 시각이 사회 전반에 녹아든 것만으로도 기업은 큰 제재로 느낀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기업 임원은 “대기업이 공정경제 원칙과 취지에 적극 부응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오늘 위원장 말은 '아직도 부족하니 앞으로 더 고삐를 죄겠다'는 뜻으로 들린다”고 말했다.
"과징금 약하니 공정위 제재에 무관심"…대기업 타깃
조성욱 위원장은 공정위의 처벌 수위가 약해 정책 효과가 약하다는 평가도 내놨다. 그는 “국내 기업이 공정위 제재에 별 관심 없다"며 "왜냐면 (해외와 달리 국내는 공정거래 관련)과징금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 위원장은 "해외에 나가면 과징금이 아주 크다"며 "제가 어제 찾아보니, 한국 기업이 지난해까지 미국ㆍEU 경쟁당국으로부터 가격담합 등 경쟁법 위반으로 제재된 건수는 25건이었는데 이들에 부과된 과징금은 총 3조6000억원이었다"고 밝혔다.
조 위원장은 서울대 교수 재직 중이던 2012년 발표한 논문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논문에 따르면 "재벌의 불법 행위는 신고 건수보다 실제 적발돼 처벌받는 경우가 적을 뿐만 아니라, 적발되더라도 과징금이 낮아 불법행위를 방지하지 못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며 "대기업의 입찰담합, 가격담합, 경쟁제한 또는 불공정한 행위에 대한 엄정한 법 집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서도 타깃은 재벌이다.
공정위 내부 "조 위원장, 예상보다 더 강경"
이날 조 위원장의 발언은 단순한 ‘엄포’에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도 국회 시정연설에서 “공정경제는 ‘혁신적 포용 국가’의 핵심 기반”이라며 “그동안 갑을 문제 해소로 거래 관행이 개선되고,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골목상권 보호 등 상생 협력을 이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며 조 위원장과 같은 취지로 언급했다.
공정위 내부에서도 정권 실세인 김상조 전 위원장에 비해 존재감이 떨어질 것이란 우려에도 불구하고 조 위원장이 강경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조 위원장은 업무 보고를 받으면서 “대기업의 사익 편취를 봐줘선 안 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취임 전부터 강조한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가 기업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의결권 행사 지침)'도 도입은 했지만 하는 곳이 적으니 활성화 방안에 대해서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최근엔 하도급 업체의 기술 자료를 유용한 한화에 시정 명령과 함께 과징금 3억 8200만 원을 부과하고 법인과 담당 임직원 3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대기업이 하도급 업체 기술을 유용한 데 대한 첫 제재였다. 지난 1일엔 가맹점주의 권리를 강화하는 내용의 ‘가맹사업법 시행령 개정안’도 입법 예고했다. 이는 조 위원장이 인사청문회 시절부터 강조한 내용이다. 공정위 안팎에서 조 위원장을 두고 “말을 아끼되, 한 번 뱉은 말은 지킨다”는 평이 나오는 이유다.
박수련, 세종=김기환 기자 park.sury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