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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연인산 자락에는 좀비농장이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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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7호 27면

안충기의 삽질일기 

좀비농장 주인장 손에 들려 사진을 찍으려고 눈앞에 보이는 꽃을 후다닥 꺾었다. 구절초·개쑥부쟁이·개망초·감국·큰금계국·루드베키아를 구별하는 분들은 꽃 박사. 찍고 난 뒤 풀숲으로 던지려했더니 붥덱이 가져다가 항아리뚜껑에 담아놓았다.

좀비농장 주인장 손에 들려 사진을 찍으려고 눈앞에 보이는 꽃을 후다닥 꺾었다. 구절초·개쑥부쟁이·개망초·감국·큰금계국·루드베키아를 구별하는 분들은 꽃 박사. 찍고 난 뒤 풀숲으로 던지려했더니 붥덱이 가져다가 항아리뚜껑에 담아놓았다.

손바닥만 해도 돼, 내 땅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흙을 만지다 보니 욕심이 생긴다. 마음만 그렇다. 형편도 형편이려니와 꿈은 멀고 밥벌이는 가깝기 때문이다. 의리 없게 시골에 먼저 진지를 구축한 친구를 보면 샘이 난다. 내 농사 동무인 번역가 조영학도 그중 하나다. 이 아재는 별명도 많다. 스스로 ‘재벌’이라고 뻥친다. 얼마나 번역을 많이 했기에 재벌이 됐냐고 물으니 ‘초벌’이 아니고 ‘재벌번역가’란 말이라고 둘러친다. 이 땅에서 번역으로 돈 벌기는 하늘에 별 따기다.

번째 별명은 ‘번역기계’다. 2003년부터 80여 편의 영문소설을 번역했다. 장르소설 마니아다. 좀비소설의 고전 『나는 전설이다』 스티븐 킹의 『스켈레톤 크루』『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고스트라이터』『히스토리언』『콘클라베』『앨런 튜링의 최후의 방정식』『어느 물리학자의 비행』 같은 작품이 그의 손을 거쳤다. 조영학의 번역은 말맛이 있다. 젠체하는 먹물언어를 쓰지 않는다. 때때로 비속어와 욕설이 툭툭 튀어나온다. 그래서 초보번역가 시절엔 세 번째 별명인 ‘욕쟁이’가 따라다녔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로렌즈는 노스이스트에서 꼬신 여자 집에 있었다. 로렌즈는 깔깔 웃으면서, 포터가 빚을 잊을 때까지 여자 집에 죽치고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디그스가 아는 한 포터는 절대 잊을 인간이 아니다. 어쨌든 로렌즈를 불지 않아 자랑스러웠다. ×도 모르는 놈들이 그보고 약해빠졌다고 아가리를 놀려대곤 했다.  (『지옥에서 온 심판자』 중에서)

주인장 조영학. 사진을 찍으려고 보니 얼굴 여기저기에 고추장 자국이 나있다. 식구들 저녁을 서둘러 만들어 놓고 온 흔적이다. 물로 씻고 변장을 한 다음 찍었다. 아재스러운 자세와 표정을 요구했더니 저런 다소곳한 모습이라니. 서있는 옆에 판자에 새긴 농장 이름이 있다. 잠잘 때도 결혼반지를 끼는지 궁금하다.

주인장 조영학. 사진을 찍으려고 보니 얼굴 여기저기에 고추장 자국이 나있다. 식구들 저녁을 서둘러 만들어 놓고 온 흔적이다. 물로 씻고 변장을 한 다음 찍었다. 아재스러운 자세와 표정을 요구했더니 저런 다소곳한 모습이라니. 서있는 옆에 판자에 새긴 농장 이름이 있다. 잠잘 때도 결혼반지를 끼는지 궁금하다.

×는 지면에서 쓸 수 없어 삐이이~처리했다. 우아한 언어를 숭상하는 고상한 이들은 이런 번역을 저질이라고 하겠지만 용맹하니 가능한 시도다. 이런 번역은 “what are you talking about?”을 상황과 필요와 맥락에 따라 “무슨 말씀이세요?”에서 “지랄하고 자빠졌네”까지 폭넓게 쓸 수 있는 자유가 보장돼야 가능하다. 겁을 상실한 그의 도발에 독자들이 열광했다. 명성이 쌓이며 ‘자식’ ‘놈’ 같은 건조한 표현만 남기던 출판사의 검열 칼날도 무뎌졌다.

감국을 보면 언 마음도 풀린다.

감국을 보면 언 마음도 풀린다.

사실 이 양반 품성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다. 욕은커녕 싫은 소리 한마디 않는다. 잘 알면서도 쓰지 않는다. 번역하며 구사하는 그의 언어에는 유년의 그늘이 배어있다. 미군기지촌 근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철도 들기 전에 부모가 헤어졌다. 가난에 발목 잡혀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17살 때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활판인쇄, 금은세공, 도금, 인쇄소… 몸으로 할 수 있는 노동은 다 했다. 디스코클럽 디제이도 해봤다. 폐결핵에 걸려 군대도 만기제대를 못했다. 허약한 몸으로 공장에 갈 수도 없었다.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이 검정고시를 봤으니 공문서 위조로 공직에 나가지 못할 거라며 낄낄 웃는다. 4년 장학생으로 영문과에 들어갔다. 동기들보다 6살 많은 나이였다. 대학서 강사를 하다가 마흔 초반에 때려치웠다.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97년에 번역에 도전해 세상 쓴맛을 봤다. 죽을까도 생각했으나 옆에 있는 가족을 두고 못할 짓이었다. 2003년 다시 번역을 시작했다.

개쑥부쟁이 뒤가 무와 배추밭이다.

개쑥부쟁이 뒤가 무와 배추밭이다.

조영학의 번역에 녹아있는 언어는 개발시대 한국사회의 바닥을 구르며 체득한 현장의 말들이다.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자란 이들은 쓸 수 없는 언어다. 하지만 그는 번역후배들에게 비속어와 욕설을 삼가라고 한다. 텍스트를 넘어서는 비속어 남용은 만용이며, 효과의 연출과 전달 목적 이상의 표현은 과욕이라고 말한다.

농막 바로 앞에 가평천이 흐른다. 계절이 익어간다.

농막 바로 앞에 가평천이 흐른다. 계절이 익어간다.

이 아저씨 하루 일정을 보자. 새벽에 일어나 두어 시간 번역을 한다. 아내가 출근준비를 하는 동안 아침밥을 짓고, 그 뒤 청소와 빨래 같은 집안일을 하고, 점심 먹고 다시 번역을 하다가 저녁 짓고 설거지를 한다. 전업주부의 모습인데, 계기가 있었다. 번역을 시작한지 얼마 안 돼 아내가 발을 헛디뎌 발 뼈에 금이 갔다. 운전을 못 하니 아내를 부축해 2주일 동안 병원에 다녔다. 문득 생각했다. 세상에서 큰일 할 그릇도 못 되는데 남은 인생 옆에 있는 여자 한번 행복하게 해주자. 그길로 부엌담당이 됐다. 아내와 아이들이 웃고 무엇보다 스스로가 달라졌다. 밥 차리며 겪은 일화를 모아 낸 책이 『상 차리는 남자? 상남자!』(공저)다. 네 번째 별명 ‘상남자’를 얻은 이유다. 스스로 만든 다섯 번째 별명 ‘붥덱’은 오자가 아니다. 부엌데기를 줄인 말인데 컴퓨터 자판에서 가장 요상하게 조합이 가능한 단어란다. 번역은 고되다. 끝없는 가사노동도 마찬가지다.

조영학의 위안은 텃밭과 꽃이다. 흙에서 평화를 만나고 야생화를 혼자 공부해 전문가가 됐다. 동네 뒷산을 오르내리며 만난 꽃을 모아 『천마산에는 꽃이 있다』를 펴냈다. 모르는 꽃이 있어 사진을 찍어 물어보면 금세 답이 온다. 여섯 번째 별명 ‘야생화자판기’는 내가 지어줬다.

삽질일기. 안충기 작

삽질일기. 안충기 작

그도 나처럼 집근처에서 텃밭을 오래 했다. 그러다가 큰맘 먹고 땅을 마련했다. 호구 아니랄까봐, 싸고 마음에 든다고 덜컥 도장을 찍었는데 알고 보니 맹지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철따라 피고 지는 꽃과 노는 재미에 푹 빠졌다. 세 사람 누우면 꽉 차는 조립식 농막을 지어놓고 ‘아방궁’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척박한 땅에서 자갈을 골라내며 밭을 일궈 이제 제법 튼실한 채소를 키워낸다. 밭은 가평에서 연인산 쪽으로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한다. 저물녘에 가평읍내에서 고기 몇 근 끊어 농막에 들어갔다. 농로를 따라 꼬불꼬불한 길 끝에서 황당한 팻말이 손님을 맞는다. ‘좀비농장’. 아무리 좀비 소설을 많이 번역했다고 해도 그렇지, 가관이다.

구절초·쑥부쟁이·감국·금계국 같은 꽃들이 농막 주변에 가득하다. 고구마를 캐낸 자리는 퇴비를 넣고 마늘이며 양파 심을 준비를 끝냈다. 무와 배추는 통통하게 살을 찌워가고 있다. 산골이라 툭하면 출몰하는 고라니며 멧돼지를 막느라 밭 주변에 철망을 둘렀다. 밭일은 시간 잡아먹는 귀신이다. 일주일에 한 번 가니 온종일 노동이다. 배추벌레 잡는데 한나절, 풀 뽑는데 한나절이다. 효험 좋다는 천연살충제도 배추에는 큰 소용이 없어 내년부터는 약을 좀 쳐야겠단다.

불을 피우고 야생달래 캐서 된장 찍어 씹었다. 두런두런 떠들다보니 해가 꼴깍 넘어가며 산골은 이내 암흑이 되었다. 달빛 아래 빛나는 구절초를 보니 숨넘어간다. 농막 안으로 자리를 옮겨 별의별 얘기를 다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니 뼈마디들이 우두두둑 아우성이다. 전기장판 스위치를 켜지 않고 잔 죄다. 1박2일 동안, 아재들 단골 안주인 정치 얘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군대며 축구 얘기도 하지 않았다. 비속어와 욕설도 하지 않았다. 그럴 새가 없었다.

그나저나 붥덱네 좀비농장 보니, 아이고 배야.

그림·사진·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 newnew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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