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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 모던' 백남준 회고전…조카 "첫 로봇 내 장난감으로 제작"

중앙일보

입력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26년 만에 재현한 백남준의 '시스틴 채플'.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에 선보여 최고상을 수상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26년 만에 재현한 백남준의 '시스틴 채플'.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에 선보여 최고상을 수상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유명한 로봇 K-456 작품을 삼촌은 일본 도쿄의 제 방에서 만들었는데, 제 장난감을 재료로 많이 썼어요. 나중에 뉴욕으로 가져가 트럭에 들이받히게 하셨죠. (웃음) 여기 전시된 깡통으로 만든 차도 제 방에서 장난감으로 만든 겁니다.”

로봇 K-456

로봇 K-456

15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현대미술의 중심으로 꼽히는 이 미술관이 세계적 전위예술가 백남준(1932~2006)의 회고전을 마련했다. 독일과 미국 등 전 세계 미술관에서 어렵게 대여한 작품 225점을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다. 백남준은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망명한 뒤 독일로 유학했고 미국에서도 활동했다.

英 방문객 1위 현대미술 본산서 225점 전시 #백건씨 인터뷰 "한국 사랑해 몽골에도 관심" #시스티나성당 영상 구현 작품에 "와~" 탄성 #이숙경 기획자 "그의 탈국가주의 되새겨야" #

도쿄와 뉴욕에서 그와 함께 생활한 조카 백건(69ㆍ일본명 하쿠타 켄)씨가 전시장을 찾았다. 자녀가 없던 백남준의 작업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피붙이인 그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혁신적이면서도 해학을 담은 백남준의 작품 탄생 과정을 소개했다.

 백남준과 도쿄, 뉴욕에서 함께 생활하며 작품 제작을 지켜본 조카 백건씨가 회고전이 열린 테이트 모던에서 자신의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깡통 차'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백남준과 도쿄, 뉴욕에서 함께 생활하며 작품 제작을 지켜본 조카 백건씨가 회고전이 열린 테이트 모던에서 자신의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깡통 차'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전시장을 들어서자마자 파격적인 작품이 눈에 띈다. 어두운 방에 푸른 식물과 텔레비전 수십 대가 섞여 있다. 클래식에서부터 자연음 등을 배경으로 TV 화면에 다양한 영상이 펼쳐지는 ‘TV 정원’(1974~77) 작품이다. 테이트 모던은 “기술이 자연과 별개가 아니라는 미래의 풍경을 형상화했다. 사물이 연결돼 있다는 불교 철학도 반영됐다"는 해설을 달았다. 백건씨는 “TV 정원에서 들리는 노래 중 미국 팝송 ‘데블 위드 더 블루 드레스 온’이 있는데, 삼촌은 1970년 당시 미국 노래를 거의 몰랐다"며 “내가 헤드폰을 끼고 듣고 있는데 가져가더니 마음에 들었는지 작품에 넣었다"고 전했다.

백남준의 작품 'TV 정원'. 기술과 자연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평을 받는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백남준의 작품 'TV 정원'. 기술과 자연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평을 받는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이번 전시는 이숙경 테이트 모던 국제미술 수석 큐레이터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의 루돌프 프릴링 미디어아트 큐레이터와 공동 기획했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전시됐던 작품 ‘몽골 텐트'를 이 큐레이터는 보기 힘든 작품으로 꼽았다. 백남준은 1980년대 몽고족이 쓰는 텐트를 구매해 집처럼 꾸몄는데, 내부에 자신의 얼굴을 본뜬 브론즈 가면을 놓았다. 몽골 텐트 옆에는 서울 종로의 과거와 현대 풍경을 담은 작품이 자리를 잡았다.

 백건씨는 “삼촌은 한국을 정말 사랑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더 그랬다"며 “월드컵을 할 때면 늘 한국팀만 열심히 응원했다"고 귀띔했다. 이어 “이 전시에서도 한국적 요소를 많이 볼 수 있는데, 몽골텐트도 그 중 하나"라며 “오래 전 한국인이 몽골에서 왔다고 하는데, 삼촌은 몽고에 가본 적이 없지만 몽고에 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백남준의 '몽골 텐트'(오른쪽) 작품이 전시된 방에서 미술 담당 언론인들이 전시를 기획한 이숙경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고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백남준의 '몽골 텐트'(오른쪽) 작품이 전시된 방에서 미술 담당 언론인들이 전시를 기획한 이숙경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고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백남준은 TV를 미술의 도구로 활용한 첫 예술가로 꼽힌다. 서구에서도 TV가 막 보급되던 1974년 그는 ‘일렉트로닉 슈퍼 하이웨이(전자 초고속도로)'라는 개념을 처음 만들어 냈다. 이 큐레이터는 “인터넷은 고사하고 세계 통신망이 가능하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시절에 백남준은 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라고 예언했다"며 “예술 작업에 그 개념을 사용한 것이야 말로 독창적”이라고 평했다.

 전시장 안쪽 방을 가득 채운 ‘시스틴 채플(성당)'은 백남준의 이런 작품 세계를 여실히 보여줬다. 테이트 모던은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에서 선보여 최고상을 받은 작품을 26년 만에 처음으로 재현했다. 작업에만 1년 가량이 걸렸다. 가운데 구조물에 달린 36개 프로젝터에서 나오는 자연 풍경과 몽골족의 모습 등 역동적인 영상이 음악과 함께 변하며 천정과 벽면을 가득 채웠다. 해당 전시실을 들어서자마자 “와~”하고 탄성을 내뱉는 이들이 많았다. 이 큐레이터는 “미켈란젤로가 15년 간 벽화 ‘천지창조'를 완성한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을 비디오 아트로 구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50년 이상 진행된 백남준의 작업 세계를 한 자리에서 보여주는 회고전이다. 음악에 바탕을 둔 초기 작업부터 TV를 사용한 개인전 작업, 70년대 그가 선보인 기술적 실험에 이어 80년대 세 차례나 진행한 위성을 사용한 작품까지 갖췄다. 전위 첼리스트 샬롯 무어맨이나 작곡가 존 케이지, 안무가 머스 커닝햄, 예술가 요셉 보이스 등과 협업한 작품도 다수 소개되고 있다.

백남준 회고전을 공동 기획한 이숙경 테이트 모던 국제미술 수석 큐레이터. 오른쪽은 전위 첼리스트 샬롯 무어맨과 백남준의 협업 작품. 런던=김성탁 특파원

백남준 회고전을 공동 기획한 이숙경 테이트 모던 국제미술 수석 큐레이터. 오른쪽은 전위 첼리스트 샬롯 무어맨과 백남준의 협업 작품. 런던=김성탁 특파원

 백남준은 런던에서는 예술 활동을 많이 하지 않았다. 독일과 미국 등에서 그에 대한 전시가 활발했던 것과 달리 런던에서 본격적인 전시가 열리는 것은 40여 년 만이라고 백건씨는 전했다. 테이트 모던은 지난해 방문객 590만명을 기록해, 11년간 1위를 한 대영박물관을 제치고 영국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들른 곳으로 꼽혔다. 그만큼 세계인이 찾는 현대미술의 본산이다.

 이런 테이트 모던이 4년을 준비해 내놓은 백남준의 예술 세계가 현대인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뭘까. 이 큐레이터는 “백남준은 일상에서 분리된 예술, 고귀한 것으로 여겨지는 미술의 개념에 도전했다"며 “동시에 동양 출신으로서 선불교의 영향을 받아 선문답처럼 작품을 던져놓고 관객이 생각해보도록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이 살았던 네 국가의 작가들을 연결하려 애쓴 백남준은 국가 중심적이지 않은 미술이 미래의 미술이라는 것도 보여줬다"며 “탈국가주의를 내세우면서도 국가주의가 곳곳에서 발호하는 요즘 세계에서 백남준의 정신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대영박물관을 누르고 영국 방문객 1위를 기록한 테이트 모던 미술관. 런던=김성탁 특파원

지난해 대영박물관을 누르고 영국 방문객 1위를 기록한 테이트 모던 미술관. 런던=김성탁 특파원

 백건씨는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글로벌 아티스트가 된 게 백남준"이라며 “그는 한국을 사랑하면서도 늘 세계적으로 생각하라고 했다"고 전했다. 협업을 중시한 결과 그의 예술은 음악과 회화, 행위 예술과 비디오, 기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백건씨는 “삼촌은 미래에 모두가 각자의 TV를 갖게 될 거라고 했었는데, 요즘 유튜브가 그런 게 아니냐"며 “많은 세계인이 테이트 모던에서 그를 접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15일 언론 사전 공개를 시작으로 회고전은 17일 개막해 내년 2월까지 열린다. 이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테델릭미술관, 미국 시카고 현대미술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싱가포르 내셔널갤러리 등을 돌 예정이다.

백남준 회고전에서 작곡가 존 케이지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 피아노 작품을 살펴보고 있는 사람들. 런던=김성탁 특파원

백남준 회고전에서 작곡가 존 케이지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 피아노 작품을 살펴보고 있는 사람들. 런던=김성탁 특파원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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