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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억명 시장 무기화 하는 중국의 민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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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지영 기자 중앙일보
최지영 산업2팀장

최지영 산업2팀장

한해 40억 달러(약 4조7000억원)를 벌어다 주는 중국에 굴복한 미국프로농구(NBA) 때문에 미국인들이 자존심을 구겼다. 중국 선전에선 지난 주말 NBA 시범 경기가 예정대로 열렸다. 인터넷 생중계도 재개됐다. NBA는 정식으로 사과하진 않았지만, 유감을 표했다. 여기에 중국 정부가 통제를 벗어나는 정도까지 사태가 악화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정도로 그친 거란 분석이다.

하지만 홍콩 지지 발언을 트위터에 띄워 사태를 촉발한 대릴 모레이 단장의 휴스턴 로키츠 경기는 여전히 방송 스케줄서 제외됐다. 중국 정부의 비난 성명에 이어 공중파 방송 중단을 선언한 CCTV와 인터넷 생중계 계약 파기 엄포를 놓은 게임업체 텐센트, 네티즌의 보이콧과 입장 티켓 찢기 인증샷, 25개 중 12개 중국 기업의 후원 취소 등 중국 정부·기업·시민들의 일사불란한 실력 행사를 지켜본 글로벌 기업들은 공포를 느꼈을 거다.

애플·블리자드·구글 등도 중국에 잇따라 굴복했다. 홍콩 경찰 위치를 알려주는 앱과 홍콩 시위를 적극적으로 보도한 미디어 ‘쿼츠’ 앱을 앱스토어에서 지웠는가 하면(애플), 홍콩 지지 구호를 외친 프로게이머를 게임 리그에서 퇴출했고(블리자드), 홍콩 시위를 소재로 한 게임을 구글플레이에서 삭제(구글)했다. 이들 기업은 중국 시장을 잃지 않기 위해 떠밀려 한 선택 때문에 미국 등 다른 나라 소비자에겐 “상업적 이익을 위해 인권에 눈감았다”는 비난을 받으며 또 다른 불매 운동의 위기에 처했다.

홍콩의 일간지 사우스 차이나 모닝포스트는 “중국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이 3T(티베트, 타이완, 톈안먼 사태)에 관한 언급만 피하면 괜찮았던 시절은 옛날얘기”라고 전했다. 중국 정부의 심해진 통제, 노골화되는 중화 민족주의, 이를 부추기는 소셜 미디어에 최근의 홍콩 사태가 불을 질렀다.

미국인들은 이 사태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청바지, 재즈, 로큰롤 같은 ‘소프트 파워’로 소련의 공산주의도 녹였던 미국이 애플, 디즈니, 레이디 가가, 그리고 NBA 등 ‘미국 문화의 상징’들까지 중국의 눈치를 보게 된 상황”이라고 개탄했다.

중국 시장과 깊이 연관된 한국 기업들에도 이런 상황은 두렵다. 앞서 더 뜨겁게 덴 일부 한국 기업들은 불행하게도 스스로 상황을 선택하는 사치도 누리지 못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 방어체제) 배치에 따른 여파로 불매운동을 경험했던 현대자동차나, 3조원의 손해를 보고 중국 시장에서 발을 뺀 롯데마트가 당한 보복은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결과가 아니었다.

일본 수출 규제와 미·중 무역 분쟁에 더해 홍콩 리스크까지 짊어지게 된 한국 기업들은 중국 사업 원칙을 다잡느라 비상이 걸렸다. ①‘하나의 중국’ 원칙과 관련된 표현은 홈페이지 등에서 최대한 조심한다 ②대표성이 있는 직원이나 임원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홍콩 사태에 대한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지 않는다 ③중국 지인들과 홍콩 사태 등을 대화의 주재로 삼지 않는다 같은 매뉴얼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롯데나 현대차처럼 한국 기업이란 이유만으로 중국 시장의 보복에 직면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NBA 사태나 애플·구글·블리자드의 굴복은 불행하게도 방법이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한국 정부도 기업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건 경험으로 이미 터득했다. 기업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준비라곤 시장 다변화, 그리고 상황이 닥쳤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는 엑시트 플랜이다. 말이 쉽지 실행에 옮기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실로 두려운 14억명 시장의 힘이다.

최지영 산업2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