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희한한 평양 남북축구, 결국 중계도 관중도 골도 없이 끝났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한국과 북한 축구대표팀이 15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3차전 경기를 하고 있다. 29년 만의 대결은 무관중으로 진행됐다. [사진 축구협회]

한국과 북한 축구대표팀이 15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3차전 경기를 하고 있다. 29년 만의 대결은 무관중으로 진행됐다. [사진 축구협회]

다단계 문자중계, 셀프 무관중 경기, 무승부. 29년 만에 평양에서 열린 남자 축구대표팀 남북대결은 두고두고 뒷말을 남기게 됐다.

‘깜깜이’ 월드컵 예선 0 대 0 #옐로카드 4장, 감정싸움도 한차례 #말레이시아 거쳐 다단계 문자중계 #기자회견장엔 북한 기자 5명뿐 #휴대폰 놓고간 선수들 자명종 챙겨

실제로 BBC는 15일 “북한 vs 한국. 세계에서 가장 이상한 더비에 초대합니다”라고 경기를 예고했다. 말 그대로 희한한 경기를 치렀다. “21세기에 축구를 문자로 봤다” "웃지못할 세기의 코미디”란 반응들이 쏟아졌다.

한국은 15일 북한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H조 3차전에서 0-0으로 비겼다. 북측의 비협조로 이날 경기는 남측 취재진과 응원단은 물론 TV 생중계도 없이 진행됐다. 국내 축구 팬들은 아시아축구연맹(AFC) 홈페이지를 통한 문자중계에 주목했다. 교체·경고 등을 포함해 딱 9줄이었다.

관련기사

국내 언론사는 대한축구협회(KFA)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아 실시간 보도했다. 그야말로 ‘다단계 통신’이었다. 경기장 인터넷 사정이 열악해 현지에 파견된 축구협회 직원과 연락이 두절됐다. 결국 경기장에 있던 AFC 경기감독관→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AFC 본부→대한축구협회로 연락이 릴레이 됐다.

“평창 때 환대해줬는데 우린 찬밥신세”

킥오프 30분 전 전해진 소식은 더 충격적이었다. 전날 사전미팅에선 4만 북한 관중이 올 것으로 예상했지만, 무관중 경기로 진행됐다. 관중은커녕 평양 주재 AP통신·신화통신 기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까지 경기장을 찾았지만 이날 경기는 시종일관 ‘깜깜이’였다.

전날 기자회견을 하는 파울루 벤투 한국팀 감독. 이 자리에는 북한 기자라고 밝힌 5명만 참석했다. [사진 축구협회]

전날 기자회견을 하는 파울루 벤투 한국팀 감독. 이 자리에는 북한 기자라고 밝힌 5명만 참석했다. [사진 축구협회]

축구협회가 전해온 문자중계에 따르면 한국은 손흥민(토트넘), 황의조(보르도)를 투톱으로 세웠다. 북한도 ‘인민 호날두’ 한광성(유벤투스)을 선발 출전시켰다. 이날 경기에서 4장의 옐로카드가 나왔고, 감정싸움도 한 차례 벌어졌다. AFC 경기감독관이 안전요원까지 배치했다. 90분간의 대결은 득점 없는 무승부로 끝났다. 한국과 북한은 나란히 2승1무가 됐지만 한국이 골 득실에서 앞서 조 선두를 유지했다.

파울루 벤투(포르투갈) 감독은 경기를 마친 직후 “주심이 경기를 너무 자주 끊었다”면서 “중단된 시간이 많아 평상시 경기와 다른 흐름으로 전개됐다”고 말했다.

15일 북한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2022년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한국과 북한의 경기에서 손흥민이 볼다툼을 하고 있다. [사진 대한축구협회]

15일 북한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2022년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한국과 북한의 경기에서 손흥민이 볼다툼을 하고 있다. [사진 대한축구협회]

북한은 2005년 평양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 이란전에서 관중 소요 사태를 겪었다. 이에 따라 다음 경기(일본전)를 무관중으로 치렀다. 하지만 이번과 같은 ‘자발적’ 무관중 경기는 이례적이다.

남측 응원단을 막은 채 홈 관중의 일방적 응원을 받는다는 비난을 피하려고 그랬다는 분석이 있다. 요컨대 북한이 동등한 환경에서 맞붙길 원했다는 것이다. 한쪽에선 북한이 홈에서 망신당하는 모습을 주민들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해 그랬다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은 이날 무승부를 포함, 한국을 상대로 1승9무7패의 열세다.

무관중이 징계 사유는 아니다. 축구협회는 “(무관중 경기가) AFC와 사전에 조율된 사항이 아니다. 홈 경기 입장권 판매는 주최국 축구협회가 갖고 있어 AFC가 문제 삼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는 북한은 상징성이 있는 김일성경기장에서 14년 무패 기록을 이어갔다.

벤투 “주심이 경기 너무 자주 끊어”

휴대폰을 주중 한국대사관에 맡긴 선수들을 위해 축구협회가 준비한 자명종. [사진 축구협회]

휴대폰을 주중 한국대사관에 맡긴 선수들을 위해 축구협회가 준비한 자명종. [사진 축구협회]

남측 입장에선 황당하기 짝이 없는 평양 원정경기였다. 한국 축구대표팀은 평양에서 1박2일간 외부세계와 단절된 채 지냈다. 심지어 축구협회 측은 휴대전화를 주중 한국 대사관에 맡기고 방북한 우리 선수들을 위해 아침 알람용 자명종 32개를 사서 나눠줬다고 한다.

벤투 감독의 14일 기자회견은 15일 오전 8시에야 남측에 전달됐다. 기자회견장에 북한 기자 5명만 참석했는데, 그들이 기자인지 정부관계자인지 알 수 없다. 평양 주재 외신 기자도 보이지 않았다. 김일성경기장 인터넷으로는 메신저(카카오톡·왓츠앱)가 연결되지 않아 숙소(고려호텔)에 와서야 이메일을 통해 전할 수 있었다. 축구협회 측은 평양 현지 직원과 15일 0시30분 이메일로 연락이 닿았다. 대표팀이 평양에 도착한 지 8시간 만이다.

이날 경기 영상은 대표팀 귀국 이후에야 녹화중계 형식으로 방송할 수 있을 전망이다. 북측은 영상 DVD를 한국 대표팀 출발 전에 주겠다고 약속했다.

15일 북한 평양 김일성 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북한과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H조 3차전 경기에서 황의찬이 슛을 시도하고 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축구 대표팀은 원정에서 접전 끝에 0-0 무승부를 거뒀다.[사진 대한축구협회 제공]

15일 북한 평양 김일성 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북한과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H조 3차전 경기에서 황의찬이 슛을 시도하고 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축구 대표팀은 원정에서 접전 끝에 0-0 무승부를 거뒀다.[사진 대한축구협회 제공]

한국은 지난달 10일 투르크메니스탄 수도 아시가바트에서 투르크메니스탄과 월드컵 2차 예선 1차전(2-0 승)을 치렀다. ‘중앙아시아의 북한’ 투르크메니스탄은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61) 대통령의 사실상 ‘독재’ 체제다. 하지만 경기의 TV 생중계와 응원은 수용했다. 이번 일로 북한은 또 한 번 자신들의 폐쇄성을 세계에 알렸다.

BBC는 “지난해 남북한은 스포츠를 통해 냉각관계를 깨고 진전을 이뤘지만, 현재는 예전에 못 미친다”고 전했다. 지난해 2월 평창 겨울올림픽 당시 남북은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을 구성했고, 북한은 응원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불과 1년8개월 남북 스포츠 교류는 평창올림픽 이전으로 돌아갔다. 일부 네티즌은 “평창 때 환대해 주면 뭐하나, 정작 우리는 찬밥신세인데” “축구 한 경기로도 이러는데, 2032년 올림픽은 어떻게 공동개최를 추진하겠냐”고 비판했다.

정용수·박린·피주영 기자 rpark7@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