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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설영의 일본속으로] 혐한단체 '재특회'사라졌나 했더니…정당으로 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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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지난 3월 29일 가나가와(神奈川)현 사가미하라(相模原)시의 한 광장. 전국 지방선거에 출마한 ‘일본제일당(日本第一党)’의 후보자가 손을 흔들며 등장했다. 잠시 뒤 당 대표라고 소개받은 남성이 작은 사다리 위에 올라섰다. 수년 전 도쿄의 코리아타운 신오쿠보(新大久保)에서 혐한 집회를 주도했던 사쿠라이 마코토(桜井誠)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의 전 대표였다.

헤이트스피치 집회, 예전 10% 수준 #선거운동 등으로 수법 교묘해져 #정체 숨기고 전화거는 '덴토쓰' 공격 #"차별·증오 조장하는 건 똑같아"

“저기 보이는 파친코는 80~90%가 재일한국인, 조선인 이른바 외국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쓰는 1000엔, 2000엔이 북한으로 흘러 들어가 핵을 만들고 납치 공작을 벌이고 테러를 계속하는 데 쓰이는 겁니다”

사쿠라이 마코토 일본제일당 대표가 지난 3월 2일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사쿠라이는 '헤이트스피치'를 주도한 '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의 전 대표였다. [유튜브 캡처]

사쿠라이 마코토 일본제일당 대표가 지난 3월 2일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사쿠라이는 '헤이트스피치'를 주도한 '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의 전 대표였다. [유튜브 캡처]

그는 “죽어라”, “바퀴벌레” 같은 말을 쓰진 않았지만, 당시 신오쿠보에서 재일교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증오 섞인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정책공약이나 후보 소개 같은 일반적인 정당의 선거 연설에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오로지 외국인에 대한 증오를 조장하는 발언이 쏟아졌다. 그는 다른 연설에선 “일본을 비판하려면 조선반도로 돌아가라. 자이니치(재일교포)도 돌아가라”, “한·일 단교는 외교정책이다”라고 주장했다.

2016년 6월 일본 국회에선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정식 명칭: 외국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의 해소를 위한 조직 추진에 관한 법률)’이 통과됐다. 일본 경시청에 따르면 법이 제정되기 전인 2013년엔 헤이트 스피치 집회 건수가 120건에 달했지만, 2016년 법이 마련된 이후 급격하게 줄기 시작했다. 지난해엔 30건, 올해는 9월 말 현재 10건으로 집계됐다. 6년 사이에 10분의 1 이하 수준으로 크게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재특회처럼 정식 정당으로 등록해 활동 방식을 바꾸거나 전화나 인터넷을 이용해 타깃을 공격하는 등 헤이트 스피치 수법은 더욱 교묘해지고 있다.

헤이트스피치 데모 건수.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헤이트스피치 데모 건수.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일본 지자체

일본 지자체

헤이트 스피치 피해자를 돕는 간바라 하지메(神原元) 변호사는 “요즘 ‘헤이트 스피치’는 직접적인 표현을 쓰지 않지만 차별이나 증오를 조장하는 건 이전과 똑같다. 헤이트 스피치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 ‘일본제일당’의 연설 내용은 명백한 헤이트 스피치지만 오히려 ‘정치 발언의 자유’라는 명분으로 더욱 당당해졌다. 선거유세 현장에 있는 경찰들도 대응하지 못하고, 법무부도 “사전에 헤이트 스피치 여부를 예측하기는 어렵다”는 이유로 선거 후로 단속을 미루는 등 사실상 손을 놓은 실정이다.

헤이트 스피치 집회가 공공장소에서 특정 다수를 향해 이뤄졌다면, 최근엔 타깃을 정해 놓고 집중 공격하는 덴토쓰(電凸·불만이 있는 기관이나 기업에 전화를 걸어 끝까지 따지는 것) 활동이 많아진 것도 특징이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일반 시민들의 참여도 늘었다.

지난해 12월 8일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침묵-일어서는 위안부'(이하 '침묵')의 상영회가 열린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웰시티시민플라자 앞에서 일본 시민들이 우익들의 혐한시위를 막기 위해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8일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침묵-일어서는 위안부'(이하 '침묵')의 상영회가 열린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웰시티시민플라자 앞에서 일본 시민들이 우익들의 혐한시위를 막기 위해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연합뉴스]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침묵’은 지난해 10월 가나가와현 지가사키(茅ヶ崎)시에서 상영을 계획했다가 우익들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은 영화 상영관을 대여해준 지가사키시를 향해 하루에도 수십통씩 전화 공격을 퍼부었다. 행정기관을 압박해 상영을 취소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이들은 시청 직원에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일본어로는 위안부이지만 사실상 매춘부다. 일방적이고 정치적 의미가 있는 영화를 행정기관이 후원하면 어떡하느냐”고 따진 뒤, 30분이나 되는 전화통화 내용을 유튜브에 올렸다. 인터넷상의 헤이트 스피치였지만 전화를 건 사람이나 동영상을 올린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나고야 트리엔날레에 출품된 ‘평화의 소녀상’의 전시 중단을 요구한 사례도 비슷하다. 전시가 시작된 8월 1일부터 약 2달 동안 “불을 지르겠다”,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등의 협박 이메일과 전화, 팩스가 약 1만통에 달했지만, 전시장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팩스나 인터넷 전화로 신분을 숨겨 누구인지 특정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거리집회는 크게 줄었지만 온라인에서의 활동은 훨씬 광범위하며 대범해졌다.

한·일 관계가 악화하면서 헤이트 스피치가 더욱 활발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화 ‘침묵’의 제작자 박마의씨는 “일본 정부가 한국에 수출규제라는 명확한 보복 조치를 취한 뒤로는 일반인들도 한국에 대해 ‘뭐든지 해도 된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숨겨져 있던 차별의식의 제동이 풀린 것 같다”고 말했다. LAZAK(재일코리안변호사협회) 소속인 교 후미에(姜文江) 변호사는 “일본 정부가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의욕이 없기 때문에 헤이트 스피치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 제정 이후 도쿄도 등 지자체들이 차별을 금지하는 조례를 만드는 등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헤이트 행위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보복이 두려워 피해신고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 변호사는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으로는 헤이트 집회나 발언을 막는 데 한계가 있다. 차별 금지를 제대로 명기한 법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도쿄특파원

日여당의원 "한일관계 악화됐다고 정치적 이유로 차별해선 안돼"

야구라 가쓰오(矢倉克夫) 참의원 의원은 2016년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 입법을 주도했다. 연립 여당인 공명당 소속으로 자민당 의원을 끌어들여 여야가 모두 합의하는 법안을 만드는 데 역할을 했다. 지난 3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일본제일당’이 헤이트 스피치를 하자, 총리관저에 직접 정부 차원의 근절 대책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한·일 관계가 악화하면서 한국에 대한 논조가 엄격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적 주장과 뒤섞어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있어선 안 된다”면서 “이를 위해서라도 양국 관계가 좋아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 제정에 앞장 선 야구라 가쓰오(矢倉克夫) 참의원 (공명당) 의원이 10일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윤설영 특파원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 제정에 앞장 선 야구라 가쓰오(矢倉克夫) 참의원 (공명당) 의원이 10일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윤설영 특파원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을 제정하게 된 계기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재일교포 3, 4세들의 목소리를 듣게 됐다. 헤이트 스피치로 인해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누군가한테 살해당할까봐 무서워서 엘리베이터 조차 못 탈 정도로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나라에서 왔다거나 혹은 출신이라고 해서 상대를 벌레 취급하는 인간의 비열함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법에 처벌 조항이 없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된다.
처벌 조항 여부에 대해 상당히 고민했지만, 연구하면 할수록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형사처벌이 있다고 해서 갑자기 헤이트 스피치가 근절되는 것도 아니다. 형사처벌 조항을 넣을 경우 표현의 자유가 국가권력에 의해 위협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해 최종적으로 넣지 않았다. 
법이 생긴 뒤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헤이트 스피치가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그동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사람들도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헤이트 스피치가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긴 싸움을 시작한다는 선언적 의미가 있다. 이 법의 정신에 입각해 여러 지자체에서 헤이트 스피치를 금지하고 벌칙을 부과하는 조례를 만든 것도 큰 변화다.
헤이트 스피치를 근본적으로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중요한 건 헤이트 스피치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그 아픔을 공유하는 것이다. 인권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가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리도록 인권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헤이트 스피치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대중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재특회가 정식 정당으로 등록해 헤이트 스피치를 하는 데 대해선.
선거운동은 정치 활동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 범위 내에서는 해도 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형태를 바꾼 헤이트라고 해서 용서될 수는 없다는 게 정부의 명확한 입장이며 앞으로도 이 같은 행위는 차단해야 한다.
한·일 관계 악화가 헤이트 스피치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현재 한·일관계 상황을 반영해 한국에 대해 엄격하게 말하는 논조가 많아진 건 사실이다. 국가 간 관계에서 각자 주장은 필요하며 정치적 주장까지 헤이트스피치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주장과 인권에 대한 주장을 뒤섞어서, 전혀 관련이 없는 재일교포나 한국 국민의 인권을 무시하거나 지역사회에서 배제하려 한다면 이는 용납될 수 없다. 특정 인물이 방송에 나와서 혐오 발언을 했다고 해서 일본 사회 전체가 ‘헤이트 스피치’를 강요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하고 싶다.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현재로서는 한·일간 민간교류를 확대하고, 정치가 이를 방해하지 않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멀리 있는 나라였다면 서로 무관심했겠지만, 그럴 수 없는 관계인 만큼 상대에 대해 감정적으로 세게 말하게 된다. 꼬인 한·일 관계 속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재일한국인들이 인권침해를 당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이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한국 정부가) 왜 좀 더 좋은 대응을 하지 않는지 복잡한 마음이다. 이런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좀 더 사이가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에서도 일본 정부가 더 잘하길 바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일부 정치가들의 발언은 지나치게 도발적이거나 외교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서로 그렇게 해봤자 생산성이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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