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윤석만의 인간혁명] 악당 조커를 탄생 시킨 건, 쏟아져 나온 '광장의 분노'였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악마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영화 '조커' 한 장면.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조커' 한 장면.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지난 달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조커’는 배트맨의 맞수인 ‘역대급’ 악당의 탄생기를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코믹스 영화 최초로 3대 국제영화제(칸·베니스·베를린)에서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죠. 이전에 칸과 베니스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연기파 배우 호아킨 피닉스가 악마로 변해가는 가난하고 소심한 광대 ‘아서 플렉’을 연기했습니다.

 1980년대 초 가상의 도시 고담. 부자와 빈자의 불평등은 극에 달하고, 플렉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은 내일이 오는 것조차 두렵습니다. 플렉은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곧 쓰러질 것 같은 아파트에서 광대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코미디언이 꿈이지만 정작 그는 남들을 웃기는 재주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그를 ‘해피’라고 부릅니다. 정작 플렉은 “인생을 살면서 단 한 순간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하지만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긴장된 상황에서 저절로 웃음이 터지고, 이를 멈출 수 없는 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양아버지에게 학대당해 뇌를 다쳤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하철에서 우발적 살인을 벌이게 된 것도 그의 질환을 비웃음으로 오해한 부자들과 시비가 붙어서였죠.

 이런 그를 사람들은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동네 불량배들에게 얻어맞거나 함께 버스를 탄 승객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죠. 시의 복지 예산이 줄면서 무료로 이용했던 정신과 상담마저 받을 수 없게 됩니다. 급기야 그는 조그만 실수로 회사에서 해고돼 천직이라 여겼던 광대 일자리도 잃고 맙니다.

 심지어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마저 쓰러지면서 플렉은 벼랑 끝에 몰립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어머니가 평생 숨겨왔던 비밀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은 어릴 때 입양됐고, 어머니 또한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망상에 빠져 살아왔던 거죠. 결국 어머니를 통해 들었던 친아버지와 자신에 대한 이야기 모두가 거짓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악당 조커의 탄생

영화 '조커' 한 장면.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조커' 한 장면.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혼란의 한 가운데 놓여 있던 플렉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자신과 어머니의 유일한 낙이었던 TV 코미디쇼에 출연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그는 방송에서 ‘조크’를 하기 보다는 세상을 향한 날선 비판을 쏟아냅니다. 특히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지하철 총격 사건의 범인이 자신이라고 자백하죠. 그러면서 세상을 향해 울분을 토합니다.

 “그들의 죽음이 그렇게 슬픈가? 토마스 웨인이 그들을 추모했기 때문에? 만일 내가 죽었다면 내 시체를 밟고 지나갔을 거 아니야!” 토마스 웨인은 시장 선거에 출마한 재벌로 훗날 배트맨이 되는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입니다. 플렉은 어머니의 망상 때문에 토마스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생각해 찾아갔다 흠씬 두들겨 맞고 옵니다.

 플렉은 방송 내내 자신이 겪은 고통과 사회적 모순을 가차 없이 고발합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에서 플렉은 방송에서 자신을 조롱했던 사회자를 총으로 쏴 죽입니다. 그의 모습이 전파를 타는 동안 성난 군중들이 열광하면서 거리로 쏟아져 나옵니다. 그가 읊었던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개 같은 코미디였어” 같은 대사에 공감하면서 말이죠. 이들은 모두 광대 분장을 하거나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나의 죽음이 내 삶보다 가치 있기를”

영화 '조커' 한 장면.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조커' 한 장면.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거리의 분노한 광대들은 경찰에 붙잡힌 플렉의 호송 차량을 탈취합니다. 그를 지지하는 군중들은 플렉을 마치 십자가 위의 예수처럼 경찰차 위에 눕힙니다. 의식을 차린 플렉은 자신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며 처음으로 환하게 웃습니다. 그러곤 입속에 난 피를 자기의 손에 묻혀 기괴하게 웃는 광대의 입술을 그립니다. 희대의 악당 조커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나의 죽음이 내 삶보다 가치 있기를.” 조커가 되기 전 플렉이 독백처럼 자주했던 말입니다. 그의 비극적 삶은 조커로 변신하면서 마침표를 찍습니다. 플렉이라는 과거의 자아가 죽음으로써 이제 더 가치 있는 삶으로 새롭게 태어난 거죠. 그리고 조커에 감정이입한 군중들이 그를 영웅으로 치켜세우며 반란이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의 폭력과 혼란을 막기 위한 브루스 웨인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 바로 ‘배트맨’입니다.

악당을 만든 광장의 분노

영화 '조커' 한 장면.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조커' 한 장면.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 작품에선 조커를 연기한 호아킨 피닉스의 열연이 돋보입니다. 전작 ‘Her’에서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유약한 남성을 연기했던 그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23kg을 감량하며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등 뒤의 앙상한 뼈는 날개 잃은 타락한 천사를 떠올립니다. 뼈만 남은 그의 몸은 뒤틀린 그의 내면을 상징합니다.

 원래의 플렉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선하고 평범한 소시민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지극히 보살피고, 아이들에게 늘 웃음을 선사하기 위해 노력하는 성실한 코미디언 지망생이었죠. 폭력도 쓸 줄 몰라 동네 꼬마들에게 몰매를 맞을 만큼 약해 빠졌습니다.

 이와 같이 사회적 약자였던 플렉이 ‘배트맨’을 비롯한 DC코믹스의 세계관에서 희대의 악당 조커가 될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벤져스의 타노스나 울트론처럼 다른 히어로 영화의 악당들은 어마어마한 힘과 초능력을 갖고 있는데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빌런(코믹스 작품에 나오는 악당)을 해치우기 위해선 여러 히어로가 힘을 뭉쳐야 합니다.

 하지만 조커는 다른 악당들과 공통점을 찾기 어렵습니다. 몸은 삐쩍 말라 평범한 성인 남성조차 상대하기 어려울 만큼 유약합니다. 의상과 분장은 외모만으로도 두려움을 풍기는 다른 빌런들과 달리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커는 DC코믹스의 빌런 중 최고로 꼽힙니다.

파시즘을 등에 업은 안티 히어로

영화 '조커' 한 장면.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조커' 한 장면.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처럼 조커가 악당이 될 수 있었던 이유, 또는 그의 힘의 원천은 바로 ‘광장의 분노’에 있습니다. 생방송 도중 그가 사회자를 총으로 죽이고 경찰에 바로 잡혀갔다면, 성난 군중들이 그가 탄 호송차량을 탈취하지 않았다면, 광대 분장을 하고 가면을 뒤집어 쓴 시위대가 길거리에 나오지 않았다면 조커는 결코 악당이 될 수 없었을 겁니다. 분노한 군중은 십자가를 짊어질 새로운 주인을 찾아냅니다. 그게 바로 아서 플렉, ‘조커’였던 거죠.

 영화 속 고담시는 정치와 경제, 권력과 부를 모두 장악한 부르주아들의 세상입니다. 그 정점에는 한때 친아버지라고 믿었던 토마스 웨인(배트맨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 있고요. 하지만 이들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언론과 시민단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 환원하겠다는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마크 저커버그 같은 기업인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고담시에는 사회적 약자와 빈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정치적 채널이 부재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 체제 아래 정의의 원칙이 지켜질 때입니다. 그 중에서도 시장이 만들어낸 불평등을 용인할 수 있는 필수 조건은 롤즈가 말한 정의의 2원칙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라’가 전제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한 정치적 창구가 필요합니다. 정치 대표자들이 이 원칙이 준수될 수 있도록 책임을 다해야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대의(代議)’는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정치의 본질은 사회 갈등과 균열을 대리해서 조정하고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 속 고담시에서는 정치가 이런 역할을 못하고 있었죠. 그 때문에 플렉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이 외면되고, 이를 참다못한 군중들이 광장에 나와 폭도로 변한 것이었습니다.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

영국 산업혁명 당시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모습을 그린 그림. [중앙포토]

영국 산업혁명 당시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모습을 그린 그림. [중앙포토]

 현재처럼 정당을 통한 대의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것은 산업혁명 이후인 19세기부터입니다. 서구사회에선 자본가인 부르주아 계급과 그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이 갈등과 균열의 중심축이었고 이들을 대표하는 양대 정당이 만들어졌습니다. 중요한 사회적 이슈는 대부분 정당을 통해 조정되고 합의점을 찾았죠.

 그러나 사회가 분화되고 발전하면서 계급 외에도 다양한 갈등 요소가 생겼습니다. 젠더, 세대, 문화, 환경 등 복잡한 이해관계를 대표하고 조율할 수 있는 ‘대의’ 기능이 더욱 중요해진 거죠. 이 때문에 유럽은 다양한 가치를 표방하는 군소정당이 존재하며, 이들이 연정을 통해 합의점을 찾습니다. 미국은 양당제라도 다양한 이슈에 유연하게 대응하고 있죠.

 하지만 고담시엔 이와 같은 균열과 갈등을 대표할 만한 정치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컵에 물이 차면 언젠가는 넘치듯, 시민들의 분노는 광장을 통해 표출됐습니다. 영화 속에서 그 방아쇠를 당긴 것이 ‘조커’였고요. 시민들의 광기어린 파토스는 조커라는 에토스를 만나 폭력과 극단으로 치달았습니다. ‘우리’가 아닌 ‘너희’는 타도해야 할 적일뿐이죠.

‘대의’ 없는 한국 정치

조국 법무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는 집회가 3일 서울 광화문광장~서울역에서 열렸다. 임현동 기자

조국 법무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는 집회가 3일 서울 광화문광장~서울역에서 열렸다. 임현동 기자

 어쩌면 한국사회도 고담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헬조선’, ‘흙수저’로 대표되는 불평등과 양극화 문제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군중들은 좌우로 나뉘어 연일 광화문 광장과 서초동 일대를 가득 메웁니다. 시민들의 의사를 대변하고 사회 갈등과 균열을 봉합해야 할 정치인들은 자기만 옳다는 진영 논리에 빠져 ‘대의’할 생각조차 않습니다.

 시민들의 목소리는 다양한데 한국 정치는 진보와 보수 2개의 진영 논리뿐입니다. 무슨 이슈를 대입해도 한국 정치는 진보의 ‘적폐’와 보수의 ‘빨갱이’로 찢어져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여당이 됐든 야당이 됐든, 제도권 정당 중 어느 곳도 지지하지 않는 무당층이 계속 늘고 있습니다. 최근 20대가 여권에 등을 돌렸는데도, 야당의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것은 20대의 목소리를 대변할 정당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한국의 정치는 사회 균열구조와 정당체제의 불일치가 매우 심각한 상황입니다. 일례로 세대갈등이 번지는 주원인 중 하나는 이 문제에 있어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체 유권자 중 20·30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34%지만 20대 국회 당선자(지역구)는 0.4%에 불과합니다. 반면 유권자의 19.9%인 50대는 55.5%나 되죠. 40세 이하 국회의원 비율이 높은 덴마크(41.3%), 스웨덴(34.1%), 프랑스(23.2%) 등 유럽 국가들과 대조됩니다. 정치를 ‘종신직’으로 여기는 미국(6.6%)도, 세계 최고령 국가인 일본(8.3%)도 한국보다 높습니다. (2018년 국제의회연맹 보고서)

검찰 개혁을 촉구하고 조국 법무부 장관을 지지하는 집회가 5일 서울 서초동에서 열렸다. [뉴스1]

검찰 개혁을 촉구하고 조국 법무부 장관을 지지하는 집회가 5일 서울 서초동에서 열렸다. [뉴스1]

파시즘은 거리의 광기를 먹고 자란다

 결국 정당과 의회라는 공적 시스템을 통해 시민들의 목소리가 대표되지 못하기 때문에 직접 광장과 거리로 나서게 됩니다. 정치가 제 역할을 바로 해 다양한 사회 균열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면, 광장의 혼란과 갈등은 생겨날 틈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정당정치는 오히려 시민들이 거리로 나오길 부추깁니다. 시민의 의중이 무엇인지 파악해 정치적 의사를 대변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오히려 시민을 선동합니다. 이 때 특정 정치인과 정파에 대한 맹목적 지지는 광장의 광기를 키울 뿐입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칼 포퍼는 ‘개인이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자율적 행동을 통해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를 열린사회라고 정의합니다. 반대로 폐쇄적 민족주의와 전체주의처럼 피아 구분이 명확하고 상대의 의견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닫힌사회라고 비판합니다.

 광장은 4.19 혁명이나 87년 민주항쟁처럼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고 역사를 발전시키기도 합니다. 이는 자율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열린사회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70만 명이 모였던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뉘른베르크 군중집회는 전체주의로 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 지지와 자기만 옳다는 폐쇄적 민족주의를 통해 닫힌사회로 가는 잘못된 길이었죠.

 지금 우리 앞의 광장은 열린사회를 위한 걸까요, 닫힌사회를 향한 걸까요. 지금 우리의 정당정치는 시민의 목소리를 ‘대의(代議)’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자신이 ‘대의(大義)’라고 믿는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시민을 선동하는 걸까요. 길 끝이 희미해 잘 보이지 않지만, 포퍼의 다음과 같은 말을 되뇌어 본다면 우리가 갈 길은 명확해집니다.

 “우리는 짐승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문명사회의 인간으로 남길 원한다면 우리에겐 단 하나의 길, 열린사회의 길만 있을 뿐이다.”

sa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