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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첫 만국박람회 열린 ‘수정궁’…새로운 계급 ‘소비자’ 탄생시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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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호 26면

도시와 건축 

1851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전시장으로 세워진‘수정궁’은 철골과 유리로 만들었다. [사진 게티이미지]

1851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전시장으로 세워진‘수정궁’은 철골과 유리로 만들었다. [사진 게티이미지]

사회가 진화하면 새로운 종류의 건축이 만들어진다. 인류 초기에는 주거 건축만 있었다. 시간이 지나 괴베클리테페 같은 장례를 위한 건축물이 지어지다가 수메르 문명에 들어서는 지구라트 같은 제사를 위한 건축물, 이집트에는 피라미드라는 무덤 건축물, 그리스에 와서는 원형극장, 로마 시대에는 원형경기장이 나왔고, 동로마제국 때는 하기아소피아라는 거대한 교회가 지어졌다. 이러한 건축양식의 진화에는 두 가지 패턴이 보인다. 첫째, 한 사람을 위한 건축에서 대중을 위한 건축으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지구라트나 피라미드가 한 명을 위한 건축물이었다면 원형극장과 원형경기장은 시민을 위한 건축물이었고, 교회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건축물이다. 건축물은 점점 더 많은 대중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어왔다.

19세기 영국, 산업화로 계층 갈등 #거대 실내 전시장 지어 통합 한몫 #에스컬레이터는 백화점 탄생 기여 #롯데월드 같은 몰도 수정궁 후손 #공간 혁신으로 사회 갈등 풀어야

건축 공간, 대중·실내·대형화로 진화

실내 아이스링크인 서울 잠실 롯데월드. [연합뉴스]

실내 아이스링크인 서울 잠실 롯데월드. [연합뉴스]

두 번째 패턴은 ‘실내화’다. 그리스 원형극장과 로마 원형경기장의 다른 점은 로마 원형경기장에는 천막으로 만들어진 가변형 지붕이 있다는 점이다. 노천이었던 그리스 원형극장이 원형경기장이 되면서 절반의 실내공간이 된 것이다. 이후 만들어진 하기아소피아는 거대한 돔으로 완전한 실내공간을 만들었다. 인간은 점차 건축 공간을 대중화, 실내화, 대형화시켜왔다. 이런 원리는 상업공간에서도 적용된다.

에펠탑. [AP]

에펠탑. [AP]

그리스 ‘아고라’의 노천시장은 이스탄불의 지붕 덮인 시장인 ‘그랜드 바자’로 이어졌고 결국 1851년 영국 런던에 최초의 실내쇼핑공간인 ‘크리스털 팰리스’가 만들어졌다. 한국어로 ‘수정궁’이라고 불리는 이 건축물은 런던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장을 위한 전시장 건물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나서 많은 제품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런 제품들을 소개하기 위해서 거대한 시장이 필요했고, 그렇게 해서 고안된 것이 만국박람회다. 당시 산업혁명을 주도했던 영국이 최초의 만국박람회를 개최했다. 이때 제품들을 전시할 거대한 실내공간이 필요했고, 건축가 ‘조지프 팩스턴’ 경이 하이드파크 내에 철골과 유리로 길이 563m 폭 124m, 축구장 18개 크기의 거대한 온실 같은 건축물을 1년 만에 완성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렇게 빠르게 건축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공장에서 부재를 모듈러로 대량생산하고 현장에서 조립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실내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8년이 걸린 하기아소피아나 200년 넘게 걸린 노트르담성당의 경우와 비교하면 엄청난 기술적 혁명이다. 영국이 앞서나가자 경쟁 관계에 있었던 프랑스도 1887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를 개최했다. 영국이 수정궁으로 넓은 실내 공간을 만들자 파리는 높이로 승부를 보기로 하고 324m의 에펠탑(사진)을 건축했다. 에펠탑은  엘리베이터라는 신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건축물이다. 수정궁과 에펠탑은 모두 신기술을 이용해서 기존에는 없었던 규모의 건축을 이른 시간에 완성해 랜드마크가 된 건축물이다. 하지만 수정궁의 진짜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설혜심의 『소비의 역사』에 따르면 수정궁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는 등급제로 된 입장료 덕분에 가난한 사람들은 1실링만 내고 입장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철도시스템 덕분에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도 찾아와서 엄청나게 붐비는 장소가 됐다. 당시 영국은 산업화로 인한 계층 간의 갈등이 첨예한 문제였다. 그래서 만국박람회장에 많은 사람이 모이면 계층 간 폭력적 충돌이 발생할까 봐 걱정을 하였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수정궁의 공간과 수많은 제품에 압도됐다. 이들의 시선은 미래로 열린 것이다. 연세대 사학과 설혜심 교수는 이 현상을 “계급을 뛰어넘어 하나로 통합된 ‘소비자’라는 새로운 계층이 탄생한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수정궁이라는 건축공간은 다양한 사회적 계층의 사람들을 소비자라는 하나의 계층으로 통합시킨 장치인 것이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미국에서도 나타났다. 특이하게도 미국 역사에는 유럽에서 있었던 계급 간 유혈혁명이 없었다. 20세기 중반 프랑크푸르트학파나호프스타터(Richard Hofstadter)는 미국에 계급투쟁이 없었던 이유가 소비경제의 확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수천 년 동안 소수의 왕족 중 극소수만이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돈을 소비하는 순간에는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는 세상이 열린 것이다.

대형쇼핑몰인 스타필드 고양. 실내 쇼핑몰은 혁신적인 건물 같지만 168년 전 수정궁의 변형일 뿐이다. [중앙포토]

대형쇼핑몰인 스타필드 고양. 실내 쇼핑몰은 혁신적인 건물 같지만 168년 전 수정궁의 변형일 뿐이다. [중앙포토]

만국박람회나 백화점 같은 소비 건축공간은 소비자라는 계층을 만들고 그들을 시간 단위로 쪼개 왕이 될 수 있게 해줬다. 극소수만 점유했던 최고위 사회계급을 돈으로 시간당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백화점은 새로운 ‘템포러리(일시적인) 왕족’인 소비자의 탄생을 도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가 돈을 벌고 싶어 하고 쇼핑을 좋아한다.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으로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도시는 고밀화됐다. 일반적으로 상업시설은 접근성을 위해 1층에 위치한다. 그런데 도심 속 좁은 땅 위 1층에 산업화로 새롭게 만들어진 많은 제품을 모두 배치하기는 불가능했다. 때마침 강철과 엘리베이터 덕분에 고층건물을 지을 수 있었고, 사업가는 많은 물건을 좁은 땅에 전시할 수 있는 백화점을 만들었다. 하지만 높은 층의 가게로 사람을 유인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당시 엘리베이터는 너무 느려서 사람들이 타기를 싫어했고 바깥풍경이 보이지 않는 좁은 상자 안에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경험은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선을 위로 올리고 바뀌는 숫자만 쳐다보는 것이다. 이때 나온 해결책이 1882년 미국의 ‘제시 레노’가 발명한 에스컬레이터다. 에스컬레이터 덕분에 사람들은 걸을 때 느끼는 변화의 속도로 백화점 내부 풍경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상층부의 가게로 이동하였다. 에스컬레이터가 백화점을 탄생시킨 것이다.

아파트 재탕 신도시, 혁신 없는 상업공간

엘리베이터가 도심 속 건물의 밀도를 높였다면 자동차와 담보대출은 교외를 탄생시켰다. 1934년 국민주택법이 개정되면서 국가가 담보대출을 보증해주었다. 이때 대출시 주택가격 평가 때 신축건물을 더 후하게 쳐주는 경향이 생겨났다. 이런 조건은 사람들이 교외로 나가도록 부추겼다. 1956년 연방지원고속도로법이 제정되면서 본격적으로 고속도로가 만들어졌다. 고속도로와 자동차의 시너지 효과로 교외 주택가는 더욱 활성화됐다. 백화점은 고밀화된 도심 속 상업시설이었다. 그러나 교외는 도심과 달리 사람들이 밀도가 낮게 흩어져서 산다. 새로운 형태의 상업건축이 필요해졌다. 이때 나타난 것이 쇼핑몰이다. 설혜심의 『소비의 역사』에 따르면 몰이란 원래 영국 유명 쇼핑거리 ‘팰 맬(pal mall)’ 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런던의 팰 맬 거리는 가로수가 많아서 산책로로 유명했는데, 거리 주변으로 부자 주택가가 지어졌고 이후 명품거리가 조성됐다. 팰 맬은 상류층의 산책과 쇼핑의 공간이었다. 미국인은 교외에 새롭게 거리 같은 느낌으로 상업공간을 조성하고 ‘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야외공간으로 만들어졌던 몰 공간은 기술이 발달하면서 점차 실내화됐다. 최초의 실내쇼핑몰은 1956년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 ‘사우스데일 쇼핑센터’다. 실내 쇼핑몰은 대단히 혁신적인 건물 같지만 사실 168년 전에 지어진 수정궁의 변형일 뿐이다. 롯데월드나 스타필드 몰도 수정궁의 후손이다.

수정궁은 기술혁신을 공간적으로 체험하게 해준 건축이었다. 혁신적 공간체험은 소비자라는 새로운 계급을 만들었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하였으며, 갈등을 봉합했다. 우리 역사에서는 아파트나 롯데월드가 그러한 역할을 한 것이라 생각된다. 처음 겪는 고층주거인 아파트, 거대한 실내 테마파크라는 혁신적 공간체험이 대한민국 사회의 시선을 미래로 향하게 했다. 미래에 대한 밝은 비전은 현재의 갈등을 해소한다. 현재 우리 사회의 계층 간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공간적 혁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도시는 아직도 아파트를 재탕하고 있고, 상업공간에도 혁신이 없다. 기술혁신에 근거한 밝은 비전을 가진 새로운 건축공간이 절실한 시대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
하버드·MIT에서 건축 공부를 했다. 세계적인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 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젊은 건축가상 등을 수상했고 『어디서 살 것인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저술활동도 활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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