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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사법부에 압력" 논란 부른 양정철의 '문건 정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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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아침 여의도 국회 안팎의 많은 눈과 귀가 서초동을 향하고 있었다. 조국 법무부 장관 일가의 각종 비리 의혹과 관련해 직계가족(동생 조모씨)에 대한 첫 구속영장 발부 여부가 이날 밤 결정될 것으로 전망됐기 때문이다. 조 장관은 인사청문회 등에서 동생의 주요 혐의인 웅동학원 운영 관련 의혹에 대해 “잘 모른다”며 선을 그어 왔지만 직계가족 구속은 조 장관의 직무수행 적절성 문제를 다시 부각시킬 수도 있는 일이다.

9일 새벽 조국 법무부 장관의 동생 조모씨가 서울구치소에서 대기하다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밖으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9일 새벽 조국 법무부 장관의 동생 조모씨가 서울구치소에서 대기하다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밖으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구속 여부 결정에 앞서 정치권의 시선을 끈 것은 더불어민주당 부설 민주연구원이 당 공보국을 통해 출입 기자들에게 오전 9시 10분쯤 전달한 ‘이슈브리핑’이란 보고서였다. 제목은 ‘검찰ㆍ법원개혁 함께 추진할 제2사법개혁추진위원회 구성 논의 제안’이었지만 내용은 조 장관 수사과정에서 법원이 압수수색영장을 내 준 것에 대한 비난 일색이었다. 7쪽짜리 보고서는 “검찰만 압수수색을 남발한 것이 아니라 법원도 압수수색영장을 남발했다” “사법 농단 수사 당시 75일 동안 23건의 압수수색이 진행됐지만 조국 장관과 관련해선 37일 동안 70곳 이상의 장소에 대해 압수수색영장이 집행돼 법원이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등의 내용으로 채워졌다. 연구원은 김명수 대법원장을 9차례나 언급하면서 직접 겨냥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사법개혁’ 다짐이 무색하게도 법원은 무분별한 검찰권 남용에 대해 방관자로 전락했다” “김명수·윤석열 체제하에서 조국 장관 상대 먼지털이식·마녀사냥식 수사와 영장 남발, 여론재판이 이뤄졌다”는 등의 비난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17시간 뒤인 9일 오전 2시 30분쯤 명재권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조 장관의 동생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명 부장판사는 지난해 9월 초 ‘사법 농단’ 수사와 관련된 압수수색영장이‘줄 기각’되는 상황에 대해 여권(박주민 최고위원 등)에서 비판이 제기되자 김 대법원장이 긴급 투입한 검사 출신 판사다. 그는 지난 1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해 주목받았다. 명 부장판사가 매 주말 ‘조국 수호’ 목소리가 거리를 메우는 서초동에서 여권과 그 지지층의 주장에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조 장관 일가의 인신구속 여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은 여건이다.

2016년 여름 히말라야 트레킹 때 사진. 왼쪽부터 양정철 전 청와대 비서관,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 문재인 대통령. [탁현민 페이스북]

2016년 여름 히말라야 트레킹 때 사진. 왼쪽부터 양정철 전 청와대 비서관,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 문재인 대통령. [탁현민 페이스북]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민주연구원 보고서가 다시 주목받았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인지 외압이 됐는지를 두고서다. 특히 민주연구원이 집권 여당의 공조직이라는 점과 연구원을 이끄는 양정철 원장이 자타가 공인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점 때문이다.

9일 광화문에서 열린 ‘조국 퇴진’ 집회에 참석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민주연구원이 법원 개혁을 얘기한 뒤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이 부분에 대해서 국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는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거 같다”며 “대한민국이 법과 상식과 정의가 무너진 거 같다”고 말했다. 같은 당 김현아 원내대변인도 “민주연구원의 주장이 조국 일가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의 가이드라인이 됐다”며 “정당 소속 연구원이 검찰권 남용의 방관자라는 원색적 표현을 쓰면서 사법부를 협박하는 모습이 놀랍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이슈브리핑은 늘 해오던 정례적 업무”(이해식 대변인) “연구원은 당의 정책 뒷받침하는 기관인데 지나친 개입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박찬대 원내대변인) 등으로 반응했다.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이 지난 8월2일 오전 서울 종로구 SK경영경제연구소에서 열린 '경청 간담회' 참석을 위해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이 지난 8월2일 오전 서울 종로구 SK경영경제연구소에서 열린 '경청 간담회' 참석을 위해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양 원장이 이끄는 민주연구원이 논란의 중심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달 30일자 ‘법률 개정 없이 가능한 검찰개혁방안 즉각 시행해야’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특수부 통폐합 즉시 실행 등을 주장했다. 같은 날 발족한 당 검찰개혁특위(위원장 박주민)는 이 보고서의 내용을 대부분 그대로 받았다. 이런 흐름은 지난 8일 ‘이달 중 3개 검찰청을 제외한 특수부 폐지 및 직접 수사 축소’라는 조 장관의 발표로 이어졌다. 지난 한·일 간 무역분쟁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 7월 말에는 “한·일 갈등이 내년 총선에 유리하다”는 취지의 여론조사 결과보고서를 냈다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서면 경고처분을 받았다.

지난달 20일 민주연구원 전 직원에게 보낸 서신에서 양 원장은 “저는 이 시기, 총선 승리라는 목표에 '무한복무'하기 위해 연구원에 합류했다”며 “여러 상황을 결코 낙관할 수만은 없지만 선거는 절박한 쪽이 이긴다. 우리는 누구보다, 어느 때보다 절박하다”는 등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총선 승리에 올인하겠다는 양 원장의 태도는 정당 싱크탱크의 수장으로서 자연스럽지만 문제는 갈수록 그 방법이 논란을 부르고 있다는데 있다. 특히 박근혜 정부와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 거래 의혹을 “삼권 분립 훼손”이라며 비판했던 민주당이 내는 사법 개혁의 목소리는 더욱 정제돼야 한다. 보고서에 ‘글 내용은 집필자 의견이며, 민주연구원의 공식 견해가 아니다’라고 쓴다고 책임을 피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홍보기획자 마인드의 보고서로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익명 원한 수도권 의원)는 지적이 당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임장혁·이우림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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