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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장단에 권투하는 복서, 주성치도 웃고갈 엄태구표 코미디

중앙일보

입력

 9일 개봉하는 '판소리 복서'에서 엄태구는 뇌손상으로 기억을 잃어가는 전직 프로복서 병구(사진)를 연기했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9일 개봉하는 '판소리 복서'에서 엄태구는 뇌손상으로 기억을 잃어가는 전직 프로복서 병구(사진)를 연기했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번개 같은 주먹 병구 주먹 /천둥 같은 장단 민지 장단~!”

동틀 녘 붉은 기가 번져가는 푸르른 바닷가. 날렵한 몸의 청년이 소리꾼의 가락에 맞춰 주먹을 휘날린다. 구성진 전통 장단에 어우러진 권투 동작, 바위 위의 장구 치는 고수까지,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조합이 의외로 한 폭의 동양화처럼 어울린다.

9일 개봉하는 영화 ‘판소리 복서’는 펀치드렁크(뇌세포손상증) 증세를 보이는 전직 프로복서 병구(엄태구)가 어릴 적 소리꾼 친구와 꿈꿨던 ‘판소리 복싱’을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 도전에 나서는 이야기다.
영화 ‘밀정’의 일본경찰 하시모토, ‘택시운전사’의 검문소 중사 등 강하고 묵직한 역할을 도맡아온 배우 엄태구(36)가 착하고 열정적인 병구 역에 나섰다. 2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9일 개봉 영화 '판소리 복서' 주연 #판소리·권투 결합한 이색 성장담 #'밀정' '택시운전사' 엄태구 변신 #드라마 '구해줘2' 이어 주연 우뚝

주성치표 '병맛' 코미디 감성 

영화 '판소리 복서' 주연 배우 엄태구를 개봉 전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영화 '판소리 복서' 주연 배우 엄태구를 개봉 전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원작 단편에 완전 반했어요. ‘뭐지, 이 감독 천잰가’ 그랬어요. 이상한데, 슬프고, 재밌었거든요.”

그가 말한 단편은 정혁기 감독이 2014년 당시 주연을 맡은 조현철 감독과 공동 연출한 ‘뎀프시롤:참회록’으로, 그해 미쟝센단편영화제 등에서 독특한 스타일이 화제가 됐다. 정 감독이 이를 확장시켜 이번에 장편 데뷔했다.
사연은 딱하지만, 휘모리장단에 신들린 듯 움직이는 병구의 몸놀림 하며, 그의 열정적인 줄넘기가 일으킨 강풍이 주위를 휩쓰는 등 초현실적인 장면이 경쾌하다. 주성치표 ‘병맛’ 코미디 감성도 묻어난다.

김혜수 "엄태구 눈 사슴 같아" 

그가 사채업자로 분한 ‘차이나타운’에서 함께한 김혜수가 그를 두고 “얼굴선이 굵은데 반해 눈은 무척 촉촉하고 사슴 같다”고 했던가. 이번 영화의 병구가 바로 그런 모습이다. 촉망받던 시절엔 홍콩배우 양조위에도 비견됐지만, 한순간 실수로 프로선수에 제명된 지금 그는 박관장(김희원)네 낡은 체육관에서 허드렛일을 도맡는 신세다. 어수룩한 성격에 말투도 앳되다. 엄태구의 새로운 매력이다.

 엄태구는 ’원작에 대한 부담감이 컸지만 정 감독 캐스팅 제안에 도전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았다“고 했다. 사진은 병구가 체육관 유망주이던 시절 박관장(왼쪽, 김희원)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사진 CGV아트하우스]

엄태구는 ’원작에 대한 부담감이 컸지만 정 감독 캐스팅 제안에 도전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았다“고 했다. 사진은 병구가 체육관 유망주이던 시절 박관장(왼쪽, 김희원)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사진 CGV아트하우스]

‘밀정’ 악역 인상과는 딴판인데.  

“생각보다 순하게 생겼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다(웃음). 어수룩한 역할은 독립‧단편영화에선 종종 했는데, 이번엔 펀치드렁크라는 병을 진중하게 표현하려다 보니 그런 말투가 나왔다. 증상 중에 말이 어눌해진다는 게 있었다. 또 일상에선 티가 잘 안 나고, 기억을 잃어간다더라. 복싱 코치님과 많이 얘기 나누며 모든 걸 복합적으로 생각했다.”

판소리 복싱 마스터 비법은

판소리에 맞춘 복싱 동작은 어떻게 고안했나.  

“복싱 기본기를 다진 후에 장구 장단에 맞춰 이 동작, 저 동작 해보며 만들었다. 형인 엄태화 감독과 영화 ‘잉투기’를 하며 킥복싱을 처음 배웠지만, 본격적인 복싱 훈련은 이번이 처음이다. 코치님과 일대일로 두세 달, 하루 다섯 시간 기본기를 다질 만큼 목표를 높게 잡았다. 프로선수들이 봐도 이질감이 없어야 관객들도 이 (이야기) 안에 초대가 될 것 같았다. 장구 소리가, 현장에서 실제 고수가 치는 걸 들어보면 그렇게 파워풀할 수 없다. 같이 힘을 받았다.”

판소리 '수궁가', 장구 휘모리장단에 맞춘 복싱 몸동작이 푸른 바다 풍광과 절도 있게 어우러진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판소리 '수궁가', 장구 휘모리장단에 맞춘 복싱 몸동작이 푸른 바다 풍광과 절도 있게 어우러진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새벽 바닷가를 뛰는 훈련 모습은 눈이 시원하더라. 병세 때문인지 유독 여윈 몸 선이 부각되던데.  

“그 ‘선’이 보이길 바랐다. 재보진 않았지만 촬영하며 몸무게가 엄청 빠졌다. 모래를 밟으며 뛰는 게 아스팔트보다 몇 배로 힘들다. 진짜 훈련받는 것 같았다. 현장에선 죽을 맛인데, 찍힌 ‘그림’을 보니 힐링 되더라.”(웃음)

마지막 판소리 복싱 장면은 자신을 다 내려놓은 듯했다.  

“그 장면 찍을 땐 진짜 쑥스러웠다. 관중도 많고 동작 자체가 롱테이크여서 한 테이크만 촬영해도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막춤 같은 이상한 동작에, 옆 돌기까지 하니까 떨리고 부끄러운데, 신이 났다. 어쩐지 한스러움이 올라와서 장구 장단에 혼신을 다해 다 쏟아냈다.”

체육관 신입부원이자 병구의 유일한 말동무 민지. 아이돌 그룹 '걸스데이' 혜리가 맡았다. 극 중 장구는 촬영 한 달 반 전부터 특훈에 돌입해 소화했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체육관 신입부원이자 병구의 유일한 말동무 민지. 아이돌 그룹 '걸스데이' 혜리가 맡았다. 극 중 장구는 촬영 한 달 반 전부터 특훈에 돌입해 소화했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수궁가' 젊은 감각 변주 

배경에 흐르는 판소리는 ‘수궁가’를 토대로 글자 수에 맞춰 정 감독이 개사했다. 록음악에 우리 민요를 결합한 세계적 그룹 ‘씽씽’ 리더이자 영화 ‘곡성’ ‘부산행’의 장영규(어어부밴드) 음악감독, 젊은 소리꾼 안이호‧권송희도 걸출한 음색을 보탰다.
병구와 로맨스에 빠지는 신입 부원 “민지씨” 역 혜리(걸스데이)가 직접 특훈한 장구 장단을 보탰다. 병구의 광속 펀치가 내뿜은 바람에 그가 깔깔대며 즐거워하는 장면은 NG인 듯 아닌 듯 유쾌하다. 엄태구는 “(바람 효과를 위해) 강풍기를 쓸 땐 ‘너무 간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확실히 웃길 거란 감독님의 장담을 믿었다”면서 “혜리씨가 실제 웃어버린 모습이 찍혔는데 타고난 에너지가 보기 좋고 힘도 났다”고 돌이켰다.

병구와 민지의 로맨스도 풋풋하다. 가운데는 전설적인 복서 조지 포먼의 이름을 딴 체육관 강아지 포먼. [사진 CGV아트하우스]

병구와 민지의 로맨스도 풋풋하다. 가운데는 전설적인 복서 조지 포먼의 이름을 딴 체육관 강아지 포먼. [사진 CGV아트하우스]

가장 만족스러운 장면은?

“교회 오프닝 장면. 카메라는 가만히 있고 희원 선배님과 둘이 3~4분 자유롭게 놀았다. 역대 영화 중에 가장 좋아하는 악역이 ‘아저씨’의 희원 선배님인데 몇 개 대사만 갖고 그렇게 같이 호흡 맞춰본 게 배우로서 행운이었다. 병구가 박관장한테 복싱 복귀 허락받고 울컥 눈 가리며 혼자 흐뭇해하는 건 내 애드리브였다. 진짜 병구 같아서 마음에 든다.”

송강호 "떠오르는 실력자다" 

영화엔 아무도 찾지 않는 낡은 체육관, 시골 예배당, 필름 사진관 등 병구의 기억처럼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도 담았다. “시대가 끝났다고 우리가 끝난 건 아니잖아요.” 이런 대사처럼 병구는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결말은 보는 분마다 해석이 다를 것”이라고 엄태구는 귀띔했다.

영화에서 엄태구와 김희원이 몇 마디 대사만 정해두고 애드리브로 연기한 초반부 교회 장면. [사진 CGV아트하우스]

영화에서 엄태구와 김희원이 몇 마디 대사만 정해두고 애드리브로 연기한 초반부 교회 장면. [사진 CGV아트하우스]

평소엔 교회 신앙생활이나 집주변 산책이 주된 일상이란 그다. “귀신이 무서워서” 공포영화를 못 본다는 의외의 면모도 털어놨다.
배우로선 6월 종영한 OCN 드라마 ‘구해줘2’ 등 주연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밀정’ ‘택시운전사’를 함께한 송강호는 그를 “떠오르는 실력자”라 표현했다. 차기작은 박훈정 감독(‘신세계’)의 느와르 영화 ‘낙원의 밤’이다. 주인공인 남대문 조폭 역을 맡아, JTBC ‘멜로가 체질’의 전여빈과 호흡을 맞춘다.
“캐릭터도 중요하지만, 작품에 더 끌려요. 현장에서 선배들 연기하는 것만 봐도 저도 모르게 차근차근 몸으로 배워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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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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