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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 태우는 냄새'가 느껴지는 위스키, 궁금한가요?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37)

‘위스키’라는 이름을 달고 출시되는 제품은 세상에 너무나 많다. 한국에는 그 일부만 출시될 뿐이다. 그래서 한국에 출시되지 않는 제품은 외국에 나가지 않으면 맛보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위스키 마시러 주야장천 해외를 떠돌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갈증을 풀려고 외국 위스키 블로거들의 테이스팅 노트를 자주 본다. 거의 매일 염탐하는 사이트도 3개 정도 있다. 그들이 적어놓은 다양한 맛과 향의 뉘앙스를 통해, 그 위스키의 맛과 향을 상상해본다. 또 내가 맛본 위스키를 그들은 어떻게 느꼈는지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그런데 글을 읽다 보면 문제가 있다. 한국인으로선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단어들이 종종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부케 가르니’, ‘서양배’, ‘애플리콧 잼’ 같은 것들이다.

위스키 테이스팅. [사진 pixabay]

위스키 테이스팅. [사진 pixabay]

직접 먹어보기 전엔 모르는 맛

특히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맛 표현 중에 ‘서양배’가 가장 궁금했다. 평소 먹어온 배와 과연 얼마나 다른 맛일까. 다행히 인터넷에 서양배 파는 사이트를 발견해서 맛을 봤다. 한국 배보다 단맛은 적고, 과즙도 적다. 또 약간 더 딱딱한 느낌. 솔직히 내 입맛에는 안 맞았다.

그런데 이 맛이 위스키에서 났었나 떠올려보면, 버번 배럴 숙성 위스키에서 나던 맛 중에 비슷한 게 있었던 거 같았다. 한국 배는 단맛이 더 강해서 위스키 맛으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서양배라면 가능할 거 같다. 표준적인 서양배 맛을 알기 위해, 서양배 향미가 들어간 스파클링 음료도 마셔봤는데, 역시 위스키에서 느껴본 적 있는 맛이었다.

위스키 맛을 이해하려고 마셔본 서양배 맛 스파클링 음료. [사진 김대영]

위스키 맛을 이해하려고 마셔본 서양배 맛 스파클링 음료. [사진 김대영]

맛을 표현할 때의 단어는 누가 결정하는 걸까. 물론, 위스키가 서양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서양에서 익숙한 표현들이 많다. 특히 과일 맛은 오렌지, 서양배, 프룬, 파인애플, 라즈베리 등 서양에서 익숙한 과일로 많이 표현된다. 물론 이런 과일들은 한국에서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앞의 서양배 사례에서 봤듯이, 같은 품종이라도 맛이 다르다. 오렌지 뉘앙스의 향이라면, 우리에게 친숙한 감귤, 한라봉, 천혜향 등으로 표현할 수 없을까?

위스키 맛을 한국적으로 풀어내고 싶었던 선구자들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 아직 싱글몰트 위스키 등이 한국에 흔치 않던 시절의 일이다. 위스키 마니아인 이펴라 씨는 바텐더 등 위스키를 깊이 탐구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위스키 라벨이나 해외 블로그에 적힌 테이스팅 노트를 보며 ‘정말 이런 맛이 나는가?’에 대해 탐구했다.

그러나 접해본 적 없는 식재료가 테이스팅 노트에 적혀있을 때마다, 마치 영어문장에서 어휘를 몰라 독해를 못 하는 느낌을 받았다. 더 큰 문제는 같은 단어라도 지역에 따라 맛과 향이 다른 경우. 테이스팅 노트에 종종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적혀있다. 한국에선 크림 케이크지만, 영국에선 럼에 수십 시간 절인 과일을 넣은 퍽퍽한 파운드 케이크다.

하지만 이들은 절망에 빠지기보다 새로운 답을 찾기 위해 나섰다. 4명의 멤버가 5가지 위스키와 함께 홍대 앞 아지트 바에 모였다. 해외의 테이스팅 노트는 젖혀두고, 우리 식 표현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위스키를 시음하며 한국적 맛 표현을 쓰고, 그 내용을 공유하는 방식이었다.

‘숙성된 장맛 같은 달콤뜹뜨름한 맛’, ‘오랜 나무 장을 열었을 때 나는 고가구 향’, ‘아카시아 꿀맛’, ‘스피아민트 껌 향’, ‘귤을 까는 순간에 나는 향’, ‘금귤을 껍질째 씹어먹다 씨를 발라낼 때 나는 단맛’ 같은, 외국인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한국인에겐 금방 이해할 수 있는 표현들이 쏟아졌다.

이펴라 씨가 한국식 테이스팅 노트를 기록했던 bar, 팩토리. [사진 이펴라]

이펴라 씨가 한국식 테이스팅 노트를 기록했던 bar, 팩토리. [사진 이펴라]

이펴라 씨는 “테이스팅 키트와 수많은 노트를 보고 훈련한 전문가들의 눈에는 기존의 표현들이 명확하지만, 이런 표현들은 각자의 해석이 다를 수 있는 감성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도 “테이스팅 노트는 규칙과 프레임에 따르는 기록의 역할 외에도 감상과 공감의 영역도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요즘도 위스키를 즐기고 있는 그는 언젠가 이런 시도를 다시 해보고 싶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생각나는 향이 위스키 속에

1990년대 어느 가을날, 영광 버스터미널에서 대산면으로 향하는 버스 안으로 날아오던 지푸라기 태우는 냄새. 라가불린이라는 싱글몰트 위스키를 마실 때면, 늘 그 냄새가 생각난다. ‘요오드향’같은 익숙하지 않은 표현보다, ‘논에서 지푸라기 태우는 냄새’가 훨씬 또렷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라가불린 위스키를 마실 때면, 이제는 볼 수 없는 할아버지도 더불어 생각난다. 올가을엔, 지푸라기 태우는 냄새를 다시 맡아보고 싶다.

김대영 중앙일보 일본비즈팀 과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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